'老人'을 위한 변명
중국어에서 새 단어를 배울 때 이 단어가 貶意詞(그 자체에 폄하하는 뜻이 들어있는 단어)인지 褒意詞(칭찬하는 뜻이 들어 있는 단어)인지를 한번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말을 예로 들자면 '늙은이'라는 말은 어떻게 사용한다 해도 폄하의 뜻이 들어가는 것이며 '어르신'이라고 하면 후배들에게 전해줄 것이 많은 연세 지긋한 분을 떠올리게 되는 이치이다.
'老人'은 분명 貶意詞도 褒意詞도 아닌 中性詞에 해당하는 단어다.
중국에서는 아직도 '老'짜가 존경을 받는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오래된 경험많은 고참들은 '老圓工'(나이가 젊든 많든).
오래 사귄 친한 친구를 지칭하는 말 老朋友(이것도 나이와 관계없음).
남편이나 부인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도 老公, 老婆(신혼의 젊은 부부라 해도.. ^^).
성실하다는 말에도 老짜가 들어간다. 늘 알차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는 '老實'이다.
자기 고향을 말할 때도 老家라고 한다.
생각나는 대로 몇개 예를 들었지만 찾아보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아, 물론 폄하하는 말도 있긴 하다. 老頭... 그러나 끝에 頭짜를 붙이면 대부분 경시하는 어감으로 변해버리니 꼭 老짜 때문만은 아니다).
이렇게 읊어대다 보면 老人이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褒意詞로 다가오게 된다. 즉 경험 많고 친근하여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 단어가 貶意詞 대접을 받고 있는 엄연한 현실... 부정할 수 없다.
하긴 중국사회도 빠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전 경험의 가치를 존중하는 '老'의 개념을 서서히 폄하해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잘못됐다... 老짜를 존중해야 한다... 이 얘기가 아니고
나도 머지 않아 끼어들 이 대열을 바라보니 어째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는 얘기....
한국사회는 너무나 젊다. 사오정에 오륙도라니...
임금피크제 같은 것도 없으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가 꽉 차기 무섭게 바로 '뒷방노인네' 신세다. 한국사회가 젊다 보니 노인들마저도 너무너무 젊다.
한술 더 떠 이 사회의 시니어 그룹을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사회구조의 격변과 맞물려 새로운 문물도 조수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고
사람들의 의식도 잠시 넋놓고 있다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저만치 달아나 있고
이에 따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요소인 정서조차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해간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자각하게 되는 건 신체적 반응이 느려진다는 것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새로운 것에 대해 입력도 출력도 점점 느려진다.
열심히 노력하면 젊게 살 수 있다고? (그래봐야 트렌드의 꽁무니 따라다니기도 바쁘다)
그렇게 살면 과연 행복할까? 불행할까?
한번은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7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분이 두리번두리번 빈 자리를 찾고 계시길래 우리 일행 옆에 자리를 만들고 이리 오시라고 불렀다.
그 분이 자기 소개를 하시는데 (퇴직하고 할 일 없는 신분이 아니라) '현직학생'임을 강조하신다. 한국에서 중문과 3학년 다니다 휴학하고 전공을 살리려고 어학연수 오셨다고 한다.
쉽지 않은 케이스라 '아, 마음이 굉장히 젊고 열리신 분이겠구나...' 약간의 기대감이 있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역시.... '노인은 노인'이었다. 하실 말씀이 많은....
일방적으로 '연설'을 하신다. ㅠ.ㅠ
다음에도 만나면 인사하고 옆에 앉아드려야겠지만, 그러다 친해지면 좀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누를 수 없었다(못된것! 우리반 애들도 나에 대해 저런 거리감 느끼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냐? )
역시 한세상을 살았으니 경험도 풍부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람이 어느 연령에 이르면 (요즘 나도 조금씩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데) 어떤 문제에 대해서나 나름대로 '일가견'이 생기는 것 같다. 통찰력(insight)이라고나 할까......배웠든 못배웠든 폭넓은 사회활동을 했든 가정의 울타리 안에만 있었든.... 그 견해가 편협하든 보편적이든 시야가 넓든 좁든 상관없이....
이런 것을 두고 소위 '인생의 지혜'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한 사람에게는 한세상을 살아온 수고에 대한 댓가로 누릴 수 있는 귀중한 에센스 같은 것이겠다.
시니어들은 이 확고한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어 안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확고함'이 '구닥다리'로 밀쳐지는 원인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젊다고 자부하며 젊은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고 믿는 시니어들 가운데 '不可遠 不可近'.... 이런 인물이 적지 않다는 사실.... 시니어들은 잊으면 안 될 것이다..... ^^;; )
반에서 그래도 난 아직 왕따까진 아니라고 자위하지만.... 남몰래 이질감 내지 소외감을 솔솔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소한 '감각'이나 '정서'와 관련된 부분에서....
잔주름 쪼글쪼글 오십 바라보는 동창들이 만나면서 반가워서 내지르는 소리가
'어머, 어쩌면 하나도 안 늙었니... 옛날 그대로야!!" (아이고, 애들이 들을까 무섭네...)
'아이고, 늬들도 이제 이제 아줌마 다 됐다" (허거걱!! 그럼 그동안은 대학생이었니?)
노친네들 속에 있으면 이렇게 늙어감도 잊어버린다.
여전히 청바지에 통기타를 젊음의 자부심으로 끌어안고.. 행복하다... ㅎㅎ
10년 뒤에 나는 그렇게 '행복하게' 살 건지....
아님 젊은사회와 코드를 맞추려고 계속 돋뵈기 돗수 올리며 소외감을 꾹꾹 씹어삼키며 침침한 눈을 비비고 있을 건지...
쓰다 보니 두서가 없어졌다. 어쨌든 변화무쌍한 사회에서 '늙어간다'는 말은 확실히 서글프구나.
노후대책 차원에서 한번 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