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정착민 VS 유목민1 - '의식'으로 먹고살던 시절

張萬玉 2005. 6. 18. 11:00

알바 얘길 쓰다 보니 난 직장생활도 알바처럼 해오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요즘같은 세월에는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기성세대의 눈으로 볼 때  '평생직장' 내지 '무슨일 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정체성은 '호구지책'을 넘어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하고 있는 역할...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인생에 채워지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본인이 인정하든 안하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직장'이란 '알바'와는 달리 '올인'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젊은시절에 진즉 확립되었어야 하지만 나는 그 시절에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다. 개념이 없었으니 계획이 없었던 건 물론이요 시간과 정력을 '평생의 업'과 거리가 먼 일에 몽땅 쏟아붓고 있었다.

 

아니, 이제 와서 돌아보면 직업에 대한 의식이나 비전이란 게 원체 내게 희박했던 건 아니었나 싶다. 우리 세대 여성들이 대부분 그렇게 자랐다. 우리 어머니들처럼 남편과 아이에게 종속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식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해온 여성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분들은 대단히 부러운 분들이다)

 

의식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를 갖는다.

나는 아이 하나 낳고 난 뒤에야 '여성의 독자성 확립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점차 동의하게 되었지만(소위 '막스주의적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적 여성운동' 간'의 논쟁을 보면서) 의식 없이 흘려보낸 시간과 그로 인해 이미 객관적으로 조건지워진 삶을 극복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사실, 다른 변명은 필요치 않다. 그때도 늦은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는 나의 '끈기부족'이 중요한 원인이었지.

3년을 못채우고 전전했던 직장들.... 그만둘 당시에는 뭐라뭐라 이유가 다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거기서 주저앉지 말고 좀더 밀어올렸더라면....' 하는 회한이 다 조금씩 남는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을 피력하는 지금에서조차도 다시 일을 갖게 되면 끝까지 밀어붙여서 나의 마지막 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내 인생의 세 가지 컴플렉스 : 지구력 부족, 숫자감각 부족, 못생긴 눈... ㅎㅎ)

 

돌아보면 내겐 정말 프로근성이 부족했다.

81년부터 공장에서 노동운동 하던 3년간.... 초기 고생은 다 겪어놓고도 막판에 겹친 불운을 견디지 못해 결혼이라는 끈에 의지했던 것.... 이것이 어찌 보면 나의 '자주성'에 대한 최초의 포기인 셈...

 

제도권 안으로 몸을 절반쯤 들이밀고 살았던 85년 이후 93년까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군사독재의 폭압과 감시에 '배째라'고 들이밀 만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첫2년간은 구로지역 연대파업투쟁으로 발생한 수백명 구속자노동자들의 법정투쟁 지원을 위한 가족모임을 조직하여 보안사, 대공분실, 경찰서, 법원, 구치소 등지에서 열심히 '일했다'.

감옥에 간 남편을 구실로 마련된 활동의 공간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이때가 내 생애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몸바쳐 일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누가 밥먹여주는 것도 아니니 투쟁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하던 일 제쳐두고 뛰어나올 수 있는 알바를 찾아야 했다. 당시에 내게 '직업'의 개념은 그런 것이었다.

작은 수입이라도 있으면 닥치는 대로 했다. 번역도 하고 양말장사도 하고 버섯농사도 거들고...

훗날 解禁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利敵표현물'이었던 홍명희의 임꺽정 영인본을 교열을 보며 원고지에 옮겨적는 일을 하다가 형사가 들이닥치는 통에 혼비백산했던 일이 떠오른다(ㅎㅎ 형사는 다른 일로 온 건데....)  

암튼 나는 단기간에 화끈하게 해서 끝내는 일만은 똑소리나게 잘한다.

 

87년부터는 적으나마 그래도 월급을 주는 단체로 자리를 옮겨 2년간 홍보간사 일을 했다. 

지금 그 단체는 사단법인으로 크게 발전하여 여러가지 뜻있는 사업들을 벌여가고 있고, 같이 일하던 실무자들 중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먹고살기 어렵다는 핑게로 나오긴 했지만(참 나올 때 어렵게도 나왔다) 사실은 나의 끈기가 거기서 끝을 보였기 때문이었던 게다. 업무파악이 되고 익숙해질 때쯤이면 찾아오는 매너리즘을 잘 극복해내지를 못한다. 비전을 찾고 돌파해내야 하는 시점에서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들어간 것이 사회과학 출판사...

출판에 대해 뭐 아는 것도 없이 소싯적 국어실력에 의지하여 교정 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교열, 편집, 제작... 작은 출판사라 두루두루 거치며 3년 반... 이제 제법 출판쟁이 냄새를 풍길 때가 되니 또 그놈의 '한계' 병이 도졌다. 나이도 있고 머리가 굵었으니 이제 출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기획' 혹은 출판마케팅 쪽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거기서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이 무렵부터 내게 'proffessional job'에 대한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사실 그건 내 개인의 한계 이전에 사회주의 국가 붕괴 이후 좌표를 잃고 헤매던 군소 사회과학출판사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분명히 함께 실패하고 실험하고 고민하면서 헤쳐갔어야 하는....

난관은 뚝심으로만 돌파할 수 있다. 내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게 바로 이거다. 막내로 자라서 그런가..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오는 '파파걸 컴플렉스'....

 

마침 남편도 세번째 출소를 마지막으로 경제적 가장의 자리로 돌아왔고 '전문인' 스트레스와 씨름하던 나는 얼씨구나 사표를 던졌다. 어차피 사회과학출판사의 퇴조 속에 그 출판사도 뒷날 인원을 대폭 감축하긴 했지만, 이 대목도 두고두고 나의 '끈기 컴플렉스'를 건드리는 부분이다.

 

그리고는 곰곰히 생각해봤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한 호흡에 다 써서 끝내야 하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여기서 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