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시절의편지8 - 走馬看黃山
요즘 자전거 연습을 하고 있다.
저녁 일찌감치 먹고 차가 없는 빈터로 나가는데, 엎어지면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마음 상하기를
몇번... 이젠 커브도 돌고 섰다 갔다도 맘대로 한다.
하지만 아직 큰길에 나갈 마음은 없다. 나란히 걷는 것처럼 바짝 붙어 다니는
자전거들만 보면 아찔하걸랑.
황산 가는 기차표를 5일 전에도 못 구해 포기하고 있던 중 마침 아는분이 불교모임 멤버들과
함께 대우고속 한 대를 빌려 황산에 간다는 정보를 입수, 모집정원 45명에 42명이 찼을 때 잽싸게 꼽사리 껴서 정신없이
다녀왔다.
밤새 버스타고 가서 새벽에 산에 올라갔다가 하루 왼종일 걸려 간신히 한 바퀴 돌고 황산 시내 호텔에서 자고(개인행동이 허용되지 않으니 유감스럽게도 정상에서 자지 못했음)
이튿날 구화산(일행 대부분이 불교신자들이라 결정된 행선지임)을 향해 6시간을 내달려 오후 4시에 도착, 그 엄청난 산의 일부를 주마간산으로 두 시간 가량 둘러보고 7시 출발, 저녁 먹고 어쩌고 하다보니 새벽 2시에 상해에 내렸다.
황산은 詩的인 산이지만 사람 뒤통수만 보고 와서 그런지 내 눈에는 설악산만 못하더라.
물도 없고 경사가 매우 급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으니(소위 기암괴석들) 접근이 쉽지 않아서 전문산악인 아니면 두고두고 탐색할 만한 여지가 적고, 등산로에 몽땅 계단 깔아놓은 것도 맘에 안 들고... 은밀한 맛이 없다. 한마디로 산의 품에 안기는 맛을 모르겠거덩.
어쨌든 雲海는 질리도록 보았다.
황산 입구의 마을. 황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들은 짙은 운해에 가려 모두 꽝 됐다.
구화산은 뜻밖의 소득이었달까?
기대없이 갔다가 깊은 산을
구비구비 돌아 마침내 고원에 이르러 99개에 이르는 봉마다 버티어선 절의 기괴한 자태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해발 천몇백 고지의 고원에 절들이
여기저기 버티어 선 모습은 마치 티벳의 포탈라궁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지. 으시시한 게 鬼氣까지 느껴지는 이 절에서 면벽수도하면 혹시 도가
통할지도 모르겠더라.
배도 비행기도 없던 옛날에 개 한 마리 데리고 이 오지까지 와 절을 지었다는 신라 고승 김교각의 등신불을 보면 A가 좋아할 것 같다.
웃기는 얘기 하나...
가는 길에 저녁을 먹기 위해 蕪湖라는 시골동네 제일 좋은 호텔 앞에서 차를 멈췄는데
울긋불긋 등산복을 차려입은 외국인들 40여명이 우르르 들어오니 식당에선 오늘 횡재났다 신이 났을 테지. 그런데...
이 짜디짠 한국사람들 노는 꼴좀 보소... 음식중에 제일 싼 볶음밥에 오이무침만 시켜놓고 즈그들이 싸온 밑반찬들을 내놓고 먹는 거야. 겨우 맥주나 몇병 시켰나?
이 나라 사람들 밥 먹는데 보통 2시간은 걸리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 30분도 안걸려 후닥닥 해치우고 우르르 나가더니...
이튿날 돌아오는 길에 또 그 호텔에 들르게 되었네 그려...
메뉴도 똑같이 시키네 그려... 하하하...
참 별나다고 했을 거야. 돈도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몇 명은 호텔 마당에서 버너에 물을 올려 라면을 끓여가지고 들여오고....
한국사람들 암튼 못말린다니까...
요즘 우리가 한국에 없어서 그런가... 한국경제가 말이
아니라며?
공장 건축 첫 삽을 떠야 하는데 은행이 돈은 안 보내주고 빌려준 돈조차 회수하려 든다는 기쁜 소식만 들려오니 어쩌면 좋으냐.
한국에 연수 보낼 기술자 초빙 광고를 낸 후 고급 인력들은 몰려오고 공장건설이 초읽기에 들어갔는데....
그저 고국의 경제사정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오늘은 상해사대 운동회 날이라 학교에 안 가고, 한국 연수 보낼
기술원들 면접 봤다. 학교에서 수업 받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더라.
아직 세련은 덜 됐지만 사회적인 성취와 부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어 오르는 중국 유수 대학 졸업생들을 보면 꼭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은 느낌이다. 우리 항주 갈 때 만났던 분홍샤쓰의 사나이
생각나지?
지난 토요일에는 정환이랑 無錫에 갔었는데 너 왔을 때 혼자라도 가라고 할걸 싶은 생각이 들더라. 거기에도 뭐가 많더라구.
특히 삼국지를 찍었던 촬영장이 재밌더라. 하루에 몇 차례씩 表演이 있는데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도 하고 기마행렬이 함성을 지르며 지나다기기도 하고 말야.
무석 삼국성의 삼국지 촬영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잔해가... ㅎㅎㅎ
원숭이들이 달려들어 물건을 뺏어간다는 삼산공원도 갔었는데 비가 오고 하도 추워서 원숭이 그림자도 볼 새 없이 돌아나왔지.
30분씩 리프트를 태워주는 무석공원도 처음 들어설 때는 별거 없는 것 같았는데 갈수록 뭐가 자꾸 나오더라구. (조잡한) 볼거리가 하도 많아 다 보려면 지루하고 안 보려면 궁금해서 못 견디게 만드는 중국 관광지.
이제 상해 주변은 대강 감 잡았는데 아직도 돌아다닐 데가 많으니, 그것도 이젠 시간도 돈도 무지하게 들어가는 데뿐이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내몽고, 계림, 홍콩, 북경, 시안 하고도 대련도 좋다, 하문도 좋다, 아미산도 좋다 등등 리스트에 없던 데가 자꾸 추천목록에 올라오니 돈 벌랴 놀러다니랴 마음만 바쁘구나.
김대중이 대통령, 김종필이 총리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진짜더냐?
신문도 못보고... 단파 라디오에서 한국 방송을 잡을 수 있다고 해서 내일 하나 살 생각인데 아마 '한국 방송'이 아니라
'한국의 소리 방송'일 거다.
요즘은 '모래위의 욕망'이 인기리에 방영중이다. 이덕화도 황신혜도 중국말 잘 한다.
아무튼 매일 똑같은 일과가 되풀이되는 요즘 한국 생각 많이 한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 있는 나를 어엿비 여겨 바쁜 중에도 정치전망대 소식 가끔 보내주면 고맙겠다.
건강하고....
1997.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