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많은 스카이라이프
오늘 드디어 인권이라이프를
달았다.
한국에서 취미활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영화 편식하기'가 중국에 오면서 일단 좌절된 이후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인권이라이프는 내게 어떤 만족을 가져다줄 것인가..
97년 처음 중국땅에 발을 디뎠을 때 내가 즐길 수 있는
거라곤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TV뿐이었다. 내용도 모르고 화면만 들여다보며 버틸 수 있는 시간은 20분을 넘기기 어려웠기 때문에 네살박이
어린아이처럼 광고만 기다리다가 신나게 따라하는 것으로 문화생활을 대신하던 일주일을 보내고...
그러다 중국어 자막이 나오고 대사는
영어인 VCD에 착목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한국에서 20여년 이상 사랑받아온 VTR 시대를 아주 짧은 기간에 훌쩍 뛰어넘어버리고 이미 한 장
3원짜리 해적판이 거리에 넘치는 VCD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영어는 절반 이상 들을 것이라 자신하고 한꺼번에 열 장 정도
사왔는데...
여러분, 이거 아시는지...
귀로는 영어로 나오는 대사를 듣고 눈은 중국어를 본다? 서로 보완작용을
할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한발 물러서서, 그럼 중국어로 대사가 나오고 눈으로도 중국어대사를 볼 수 있으면?(중국은 방언이 많기
때문에 중국어로 말하는 정규방송에서도 아래 중국어 자막이 지나가는 사례가 아주 많다)...... 이거 역시 눈을 감고 듣느니만
못합니다.
한국에 가서 이 실험을 다시 해보았다. 귀로는 영어를 듣고 눈으로는 한글 자막을 보고...
영어 듣는 것으로만 하면 확실히
덜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시청각을 분산시키면 시각과 청각이 서로 돕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방해를 하는 것 같다.
상황을 보고 때려잡는
데는 시각이 도와줄지 모르나 소위 'listening' 연습을 하려면 귀에 쏙 들어오는 이어폰으로 주위 상황을 차단한 채 몰두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아무튼 간에
치고받는 액션이나 코미디, 에로물 아니고 뭔가 대화가 복잡해지는 영화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매다가 자존심에 상처만 안고 끝내는 일이 다반사... 더군다나 디테일한 것을 즐기는 나로서 '골라보기'는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더군다나
치고받거나 사이코가 등장하는 비슷한 영화들이 범람하다 보니 산 VCD를 또 사오는 웃지못할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내가 사온 것 아님. ^^
)
반 년 정도 지나 중국어가 어느 정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이제는 서양사람들이 중국어로 말하는 영화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왜냐...
영어로 'Are you hungry?' 하고 물어보려면 네 음절이 필요하지만 중국어로는 '니으어마?'(으어는 한
음절이니까 세음절이다)로 한 음절 줄어들어 입모양에 맞추기 위해서는 중국어는 자연히 느려지게 되어 있다. 즐거운 듣기연습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 시절의 영화보기는 TV 어느 채널에선가 밤 10시경의 大寶劇院으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이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듣기연습도
좋지만 메뉴가 영 '꼬졌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의 대거 이주에 발맞추어 복사판 VTR 대여 시대로 넘어간다.
100원에
12개로 시작하여 (치열한 영업경쟁으로 인해) 차츰 갯수가 늘어나 17개에 이르기까지 두 주에 한번씩 전화벨 울리기를 2년여....
좋은
점은 한국 출시 시점 한달 정도 후면 여기서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흥행과 거리가 있는 작품들은 아쉽게도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잡지에서 본 화제작을 언어의 장애 없이 세밀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이 시절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너무나 험해진 테이프를 소화하다가 지쳐버린 VTR 기계가 망가지고, 이에 맞춰 고화질 DVD가 가격인하에 나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Beautiful mind, 찬란한 태양 아래, 패닉 룸, JSA, I am Sam 등등...
VTR 수리할 곳을 찾지 못해 주말의
명화로 만족하고 있던 중 한국보다 30%정도 싸다는 DVD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이웃들이 DVD와 함께 해적판 신편들을 마구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오는정이 있으면 가는정도 있어야 하는 법....
주메뉴는 한국영화...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는 한달 이내에 영상점에 깔려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질투는 나의 힘'을 비롯하여 '시월애','동승', '내마음의 풍금' '내 인생의 콩깍지'에 이르기까지...곧 '옥탑방
고양이'도 중국 전역의 영상점을 강타하리라..
하지만 이 방법도 메뉴의 한계, 그리고 아직도 만족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부실한 LAN 서비스 때문에 인터넷에서 내려받기는 요원한 얘기고.... 마음대로 골라보던 시대는 갔나보다... 하고
포기하려니 아직도 화제의 영화들이 궁금하다.
과연 인권이라이프는
나의 문화생활 여건을 조금 더 개선해줄지?
1999.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