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각 - 중국말도 천천히 하면....
간만에 밝을 때 귀가를 했다.
동네 놀이터에 아이들 노는 모습도 참 오랜만에 본다.
같은 단지에 살던 J차장 집이 이사를 가기 전에는 놀이터에서 늘 중국애들과 어울려 노는 용용이와 몽몽이를 볼 수 있었는데....
애들과 노인은 어울리는 데 말이 필요없다.
고 녀석들, 세 살배기, 네 살배기로 처음 중국에 와서 말 하나도 못할 때도 금방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말도 필요없이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공을 차면서 만국공통어인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 그만... 중국유치원을 2년이나 다닌 지금 중국아이들 못지 않게 유창한 중국말을 구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99년 봄에 친정 부모님이 상해에 다니러 오셨다. 당시 아버지 연세가 83세, 엄마 연세가 77세였는데 그때만 해도 두 분 모두 여기저기 놀러다니실 정도로 건강하셨다.
2년이나 떨어져 있던 막내딸 집에 오셨으니 비자기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있겠다고 작정을 하고 오셨는데.... 당시 어학연수중이던 나로서는 오신 첫 일주일 수업전폐하고 열심히 놀아드렸지만... 어쩔 수 없이 상당히 많은 자유시간(!)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통하는 데다 연세도 고령이시니 무슨 사고라도 날까봐 나 없이는 절대로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우리 세 식구 아침에 모두 나가고 나면, 젊을 때부터 한곳에 가만히 못 계셨던 말띠 우리 아버지, 좀이 쑤셔서 너무나 괴로우셨던 것 같다. 당시에는 위성수신기도 달지 않았으니 못알아듣는 TV 참고 보는 것도 한두시간이죠, 파출부가 오기는 해도 중국아주머니니 말도 안 통하죠... 겨우 하신다는 게 아파트 입구에 있는 수퍼에 가서 과자 한봉지씩 사오시거나 놀이터에 나가 동네 노인들 노는 양을 구경하시거나...
어느날 아침 아버지 말씀
“요 건너집 머리 벗겨진 데 큰 점 있는 노인네 있지?”
나는 사실 잘 모른다. 그래도 말씀 대접으로 “네” 했더니
“그 노인네가 글쎄 90이래”
“어, 아버지 어떻게 그 할아버지랑 말씀을 하셨는데요?”
“내가 이랬지(자기를 가리키고 손가락으로 여덟 개, 세 개를 펴보이신다), 그랬더니 그 노인네 끄덕끄덕 하면서 이러더라구(자기를 가리키고는 손가락 아홉 개를 펴보이신다) ”
우하하... 노인들은 모이면 일단 나이부터 확인하신다는데... 그런 것도 만국공통인가보다.
엄마는 더 웃기신다. 파출부 아주머니('가족과 함께 출근하기'에 나오는 락씨 아주머니)에게 줄기차게 한국말을 하신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엄마, 못 알아듣는 말을 왜 하세요?” 하고 말려도 천천히 말하면 조금은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신념을 꺾지 않고, 한국 가실 때까지 중국아주머니에게 한국말을....
한번은
아주머니에게 거실 화분을 가리키며 “저거 어제 우리 딸이랑 식물원 가서 사온 거예요.” 하니까 아주머니가 얼른 그 화분을 베란다로 내놓더란다.
그래서 베란다에 있던 다른 화분을 가리키면서 “저것도 어제 사온 거에요” 하니까 이번에는 그걸 얼른 거실로 들여오더라나.
하도 웃겨서 아주머니에게 엄마가 뭐라고 하셨길래 그렇게 했는가 물어보니 아주머니 말쌈, “저거는 햇볕을 좀 쬐어야 한다”고 했고 베란다에 있는 것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충분히 쬐었으니 그만 들여놓으라”고 했단다... ㅎㅎㅎ
말은 안 통해도 호의는 통했는지... 이 한족 아주머니, 우리 엄마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두 분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 집에 초대까지 했다. 넉넉잖은 파출부 아주머니 초대를 받아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엄마 아버지가 너무나 가보고 싶어 하셔서 응하기로 했다. 20여평도 안 되는 비좁은 집이지만 깨끗이 청소하고 생화까지 꽂아놓고... 더 놀랐던 것은 그집 아저씨까지 음식준비를 하기 위해 휴가를 냈던 일이다.
몇년 전에 넘어져 허리를 다치신 후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버린 엄마...
이런 사진 남들 보인다고 저승에서 화내시려나.. (내 눈엔 그래도 엄마가 젤 이쁜데...)
양쪽끝에 선 것이 파출부 아주머니 내외, 배경은 그분들 사시는 전형적인 중국서민아파트.
중국에 다녀가신 후 몇 개월 안 되어 두분이 나란히 병석에 누우시게 되었다. 회사가 확실히 자리를 잡은 뒤에 모실까 하다가 보고싶은 마음에 서둘러 오시라고 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 때를 놓쳤으면 중국 간 막내딸네 잘 사는지 어쩌는지 궁금하셔서 눈도 제대로 못 감으셨을 것 같은데...
두 분은 2001년 겨울과 2002년 초여름에 나란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2004.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