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장난감
요즘 아이들, 휴대폰이 없으면 못 사는 줄 안다. 어학연수차 와 있는 조카딸이 지난달부터 휴대폰을 살까 말까 망설이며 자꾸 내게 의견을 구한다.
나같은 구닥다리에겐 물어보나마나... 일 년 있다 돌아가는데 사는 집에 전화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쓰던 휴대폰 가져와서 사용할 방법이 있다면 또 모를까,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목하 열애중도 아닌데.... 학생 신분에 무에 그리 촌각을 다투는 전화가 있겠나. 걸 사람들에게는 내가 정해준 시간에 정해준 곳으로 전화를 하라고 할 것이고... 내가 걸 일 있으면 길에 널린 공중전화를 이용할 테지.(나 구닥다리 맞다. ^^)
내게도 휴대폰이 있기는 하다.
회사와 집만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고 꼭
필요할 때면 회사 출장용 휴대폰을 빌려쓰면 되고 숨겨야 하는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별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살다가, 2년 전 한국학교
설립기금마련 바자회에서 마땅히 살 것을 찾지 못해 구입하게 되었다. 주로 서랍에 쳐박혀 있다가 가뭄에 콩나듯 쓰이던 이 휴대폰은 방학을 맞아
한국에서 들어온 아들놈 손에 들어갔다가 호되게 다쳐서 잘 터지지 않게 된 후로는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긴 뭘 사?
이제 몇 달이나 남았다고?"
"중국친구들한테 문자 보내고 받으려면 있어야 해요."
"아이고... 전화를 하지, 힘들게 왜 손톱으로
찍고 있는데? 그리고 내가 보기에 너는 읽는 것보다 말하는 연습이 더 필요한 거 같은데?"
"통화 하는 거랑 느낌이 달라요. 친구들은 다
문자로 해요. 문자는 받는 사람이 돈 안 내도 되잖아요."(중국에서는 휴대폰을 받아도 요금이 부과된다)
결국 조카딸은 한달 푸다오비를 휴대폰 구입에
투자했다. 890원짜리 빨간색 노끼야 장난감을 손에 넣은 날 그 애 방은 새벽까지 불이 꺼지질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열흘도 채 안 되어 그 휴대폰은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지하철에서 문자 보내다 내릴 때가 되어 호주머니에 넣고...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약 3분 동안에...
속상해서 밥도 몇술 못 뜨고 계속 메신저로 한국 친구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양이 최소 일주일은 가게 생겼다. 생각다 못해 위로가 될까 하여 내 휴대폰을 내주었다. 그거라도 수리해서 쓰라고... 사실은 그녀석이 새로 산 휴대폰을 가지고 놀 동안 나도 휴대폰놀이(특히 중국어로 문자보내고 받기)를 배우고 보니 어느새 재미가 들어서 이 놀이를 내 생활 속에 들여놓을까 하던 차였는데.....
녀석은 중고이기는 해도 다시 문자를 보낼 수
있게 되어 조금 위로를 받은 모양이고, 나는 회사 출장용 휴대폰을 당분간 쓰겠다고 한 대 빌려 새로 배운 장난질을 시작했다. 조카녀석의 휴대폰
도난사건은 이렇게 일단락을 지었는데....
지난 토요일에 이 녀석이 내 보물 2호인 디지털 카메라를 빌려가지고 중국친구와
놀러나갔다. 나도 외출했다가 밤 늦게 돌아왔는데 걔 방 불은 꺼져 있고 식탁에 "고모, 내일 아침 7시 반에 약속 있으니까 7시 전에 꼭
깨워주세요" 라는 메모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깨우니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친구 만나기로 했다면서 서둘러 나간다. 평소에 외출도 잘 안 하던 애가 연짱 이틀을?? 좀 궁금했지만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외출했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더니 제 방으로 나를 부른다.
"고모, 저 사고쳤어요. 대형사고...."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는
얼굴로 얘기를 시작하는데 안색이 하얗다. 토요일에 카메라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친구와 교대로 들고다니며 찍다가 자기는 안 받았는데 친구는
줬다고 하고... 둘 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일단 헤어져가지고 오늘아침에 돌아다녔던 곳을 다시한번 돌아다녀보기로 해서 아침에 그리 일찍 나갔던
것이란다. 그렇다고 설마 그게 그 자리에 얌전히 있을라고....
그러면서 재빠른 말투로 아빠가 돈을
부쳐줄 것이니 곧 똑같은 것을 사주겠다고 한다. 한편 속이 쓰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제 속은 어련하랴...
"아이구, 이녀석아... 무슨 그런
소리를....네가 남이냐?" 하니까 정색을 하며 "고모, 그럼 제가 무슨 얼굴로 여기 있어요.. 저 그렇게는 못해요."하더니 눈물이 핑 돌며
목소리가 금세 울먹거린다. 이런이런.. 어쩌면 좋아... 그까짓 물건이 뭐라고... 하루밤 잠못자고 종일 찾아헤매다 결국 아빠에게 전화하면서
자존심에 엉엉 울었겠지... 잃어버린 카메라도 카메라지만 조카녀석 상처받았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아팠다.
중국에 온 지 7년차에
돌아다니기도 엄청 돌아다니는 나도 지금까지 거리에서 도난당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째 이주일 사이에 연속 이런 일이... 好事多魔가 있으면
轉禍爲福도 있는 법이니 나쁜일은 빨리 털고 곧 있을 좋은일을 기다려야겠다
2004.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