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민 VS 유목민2 - 영어로 먹고살던 시절
출판사를 그만두고 난 뒤에 복학을 했다.
노동운동에 뜻을 둔 이래로 '대학졸업장'이라는 것에 일말의 미련도 두어본 적 없었지만
누가 외국어학원을 해보라, 투자하겠다고 제의하길래(원장을 하려면 교사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나) 그 약속을 믿고.....
남편도 원칙적으로 '사회에 복귀'한다고는 했지만 구체적인 생업은 여전히 구상중이던 때였다.
학교 다니면서 새벽에 영어회화학원을 다녔다.
'양키 고우 홈'을 외치던 대학시절에 잠시 잠수했던 영어에 대한 내 지독한 애착이 다시 맹렬하게 살아났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학원을 졸업했는지 스스로도 기특하다.
학교도 1년이요 학원도 1년이었지만 학교 다닌 기억보다 그 학원 다닌 기억이 더 선명하다.
저렴한 학원비와 꼼곰한 학사관리 때문에 이틀밤 줄을 서야 등록할 수 있는 것으로 소문이 짜했던 SDA...
정말 소문처럼 이틀밤을 (그것도 북풍한설 몰아치는 동짓날 긴긴밤을 지하주차장에서) 새워 등록에 성공했는데,
문제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두 달짜리 한 레벨이 끝나면 다음 레벨에 등록할 때 또 그렇게 줄을 서야 한다... 운 나쁘면 두 달 기다려 다시 줄 서야 하고...
그러니 1년만에 과정을 다 끝내려면 우선등록권을 부여하는 excellent 를 한번도 놓치면 안 된다.
나.... 엄청 노력했다. ㅠ.ㅠ
새벽 6시 수업에 지각 안 하려고 새벽 네 시 반이면 일어나 식구들 밥상 차리고 아들넘 도시락 싸고 새벽별 보며 집을 나갔다.
학원수업 끝나고 학교 가서 수업 듣고... 집에 오면 퍼지니까 학교에 남아 밀린 숙제 다 하고 장 봐가지고 저녁 8시에나 집에 들어와 청소하고 밥하고....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 때가 그때와 '장인편집실' 시절이다.(이건 뒤에 다시 쓰자)
1년 안에 졸업하면 그 학원의 '전설'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쉽지는 않은 과정이었지만, 어쨌든 나도 그 학원의 '전설'이 되었다.
(나이 많다고 선생님들이 많이 봐준 것 같다. 아니면 내 영어실력보다 내 넉살에 넘어가주었는지도 모르고...)
학원과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그전에 다녔던 직장이야 여타 직장과는 다르게 '운동권' 선후배들이 능력이 있든 없든 의리 하나로 이끌어주던 곳이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낯선 '사회' 속에서 객관적으로 능력을 검증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 남편이 취직을 하면서 학원 차리겠다는 계획은 물건너갔고...
그래서 신문을 보고 응시를 한 곳이 시사영어학원.
어린이 영어학원을 여러 지역에 개소하면서 교사를 일괄 모집하여 훈련시킨다고 했다.
일단 1차 토익시험에는 합격하여 면접을 보러갔는데 면접관의 첫질문이 심상치가 않다.
"나이가 많으시군요.." (당시 38세였다)
"많은가요? 한참 일할 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잘나가는 어린이 영어학원 교사로서는 고령인 셈이다. 그땐 그런 생각 안 해봤다. )
"결혼 하셨군요... 아이가 4학년이고.... 우리 학원은 밤 11시나 되어야 퇴근할 수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각오는 무슨 각오.... 면접관 얘기 듣고 아이쿠나 했지..)
결과는 미역국이었다.
나중에 하는 얘기들을 들어보니 면접관들은 서류나 인상을 딱 보고 아니다 싶으면 일단 불리한 질문을 골라 던진다고 한다.
면접자 스스로도 '분명히 나 떨어졌을꺼야...' 깨닫게끔.
나로서는 퍽 약오르고 쓰라린 경험이었다. 나이 많은 기혼여성이 취업을 하는 데는 능력이 크게 고려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처음 느낀....
이후 중학생 영어과외를 하며 소일하고 있던 중...
'*선생 영어교실'을 하고 있던 후배가 일 좀 해보라고 연락을 해왔다.
영어테잎과 교재를 판매하고 주3회 전화와 주1회 방문으로 학습상태를 점검해주는 일이다.
'판매능력' 보다도 '관리능력'의 비중이 더 클 것 같아 한번 시작해보았다.
처음에 사무실에서 배당해주는 다섯명 학생의 관리로 시작했는데 한 달이 못되어 금방 열다섯명이 되고 소개가 꼬리를 물어 넉 달만에 55명으로 불어났다.
회원이 불어나면 수입도 불어나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이들 만나는 거 좋아하는 나에게 방문관리는 일이라기보다 일종의 즐거움이었지만...
매일 아침 6시 반부터 8시까지 25명에게 전화를 한다고 생각해보라...이게 장난이 아니다.
동료교사 얘기다. 한번은 자다 깨어보니 시계가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단다. 늦었다!!
깜짝 놀라 허겁지겁 첫번째 아이에게 전화를 거니 아빠가 받으신다.
"안녕하세요, *선생인데요... *** 좀 바꿔주세요." 하니 이 아빠, 잠시 주춤 하다가
"지금요?" 하신다. 그리고 아이가 전화를 받았는데 영 어리버리 횡설수설이다.
아무튼 제대로 공부했는지를 확인하는 질문 몇 개 던지고 전화를 끊었는데....
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니, 흐미... 새벽 2시 35분...
잠결에 시침과 분침을 바꿔 본 것이다.
그 아빠도 참 특이한 분이라고 해야 하나... ㅎㅎ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