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이 4
일일이 다 읊을 수 없는 당시의 추억들과 함께 나의 뇌막에 깊은 문신으로 남아 있는(피터님의 표현을 바로 써먹어본다. ^^ ) 또 하나의 장면은 바로 미숙이네 집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걔네 집은 내 사춘기의 '陰地情緖'가 찾아낸 '숨어 있기 좋은 방'이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시절 前半戰, 만옥이의 학교생활은 온전히 陽地였다. 공부도 잘했고 예체능에서도 눈에 띄는 재능을 보였고 리더십도 탁월하여 전교학생회 부회장까지 지냈으니(요건 나의 陰地를 설명하기 위해 하는 얘기니 '웩'하고 싶어도 좀 참아주십쇼 ^^)....그런데 만옥이의 後半戰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춘기에 접어든 그녀에게 생겨난 '자의식' 속에는 어릴 때는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가난'이라는 키워드가 한 자리를 차자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고, 이렇게 분석을 해보는 지금도 그게 그 원인이었는지도 그리 분명치는 않지만...
그때까지 학교에서 주로 어울리던 친구들은 학교 밖 생활에서는 어울리기 어려운 부잣집 딸들이었다. 겉보기엔 선생님이나 부모님 말을 거역한 적 없는.... 전교 10위권 안에 드는 범생이들.
학생회니 문학의 밤이니 하며 학교 안에서는 늘상 똘똘뭉쳐 다니는 친구들이었지만 한번도 우리집에 데려온 적 없는.... 체육복 살 걱정이며 육성회비 낼 걱정 같은 것은 한번도 털어내본 적 없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관계도 그랬다. 학교에서 친한 친구들과 동네 와서 노는 친구들이 달랐지.
의도적으로 그랬을 리는 없고... 처한 상황에 충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을까?
아무튼 나의 교우관계는 좋게 말하면 '폭넓다',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박쥐' 같았다고 하겠다.^^
(다행히도 나의 성장과정에서 그 요인이 그리 부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있는 집 아이들'과의 이질감과 더불어 내 陽地의 빛을 퇴색시킨 것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조숙함(이것도 아마 가난의 영향이었다고 본다)이었다. 위로 다섯 명 언니 오빠가 있어 일찌기 어른들의 세계에 입문했을 뿐 아니라 부모님도 여섯 자식 굶길세라 여념이 없으셨으니 상대적으로 '자립심'을 키울 기회가 많았던 나는 여느 아이들보다 좀더 빨리, 좀더 강렬하게 '어른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지 않았을까?
학교나 부모가 금지하는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나의 '자주성'을 확인하는 수단이었고 '반항'의 쾌감은 나를 한껏 건방지게 만들었다. 점점 불량해지는 아이를 걱정하는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나는 오히려 자랑스럽고 기쁘게 받아들였지. 천편일률 바른생활 집단으로 둘러싸인 내 주변에서 그런 나의 일탈심리를 이해해주고 고무해준 건 오로지 미숙이와 그 일당들 뿐. 그래서 '미숙이'는 한 친구의 이름을 넘어 나의 반항기를 대표하는 상징이 된 것이다.
공덕동 산기슭의 허름한 한옥집 제일 안쪽에 있던 미숙이네 문간방은 아궁이 위에 놓인 툇마루를 밟고 올라가는 간단한 구조였다. 북향이었는지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어두운 작은 방의 아랫목은 늘 절절 끓고 있었고 방에서는 늘 박하향 비슷한 냄새가 감돌았다.
학교가 끝나면 난 습관처럼 그 빈방에 들어가 미숙이를 기다렸다가 함께 충정로로 출동하곤 했다. 그애의 하교가 대개 나보다 늦었기 때문에, 부엌문에 달린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내어 마치 우리집이나 되는 듯 익숙하게 자물통을 따고 들어갔다.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내 마음은 마치 엄마품, 아니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무한한 안락함을 느꼈지.
지금 생각해보면, 편안한 집을 두고 나와 고생을 사서 하는 아이들이 또래들과 함께 지내는 쪽방에서 느끼는 기분이 혹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심리적인 독립을 꿈꾸는 아이들이 그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들의 성가신 간섭을 피해 나름대로 홀로서기의 몸짓을 하지만 스스로도 여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불확신하고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 그것을 또래들 속에서 해소하고 안위받는 그런 기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