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길(~2014)/재미·취미(펌 글)
[스크랩] 오오사카 성
張萬玉
2005. 11. 16. 00:17
전철역에서 내려 오사카성까지 걸어가는데 거의 20분이나 걸린다. 언덕 위에 위치한 오사카성까지 가는데 한참을 걸어야 한다. 머리 위에는 찌는 듯한 더위가 이어진다.
히메지성(姬路城), 구마모토성(態本城)과 함께 일본의 3대성 중의 하나인 오사카성은 오사카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자 오사카 사람들의 고향과 같은 성이다. 그러나 일본이 자랑하는 이 오사카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사령부였다.
오사카성 앞의 공원을 가로질러 멀리 오사카 성이 보인다. 이 성은 멀리서 바라보아도 그 거대한 규모가 압도적인 곳이다. 이 언덕 위의 거대 성곽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관점에서 보면 아주 훌륭한 곳이다.
오사카성 앞에 있는 고대 궁터를 찾아보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당시 목조궁궐을 올렸던 주춧돌뿐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663년. 이곳에는 나니와(難波) 궁이 있었다. 고대의 오사카, 즉 나니와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 특히 백제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4∼6세기에 일본 혼슈의 깊숙한 입구인 카와치(河內) 나니와에 발을 내딛은 백제인들의 후손들이었다. 오늘의 거대도시 오사카의 한 어귀인 나니와는 당시에도 일본 내에서 손꼽히는 훌륭한 항구였기 때문이다.
백제멸망 후, 아스카(飛鳥)에서 나니와까지 온 사이메이(齊明) 일왕은 이곳에서 백제 부흥군을 도울 왜의 원군을 모으고 칼과 창을 준비하도록 지휘했다. 그리고 사이메이 일왕은 직접 왜의 3만 원군을 이끌고 지금의 후쿠오카 아래의 다자이후(太宰府)까지 가게 된다. 당시 이 오사카 지역은 한반도 서쪽의 멸망당한 한 나라를 돕고 한반도 동쪽의 한 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가 출발한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900 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한반도의 조선 전체를 유린한 일본군의 사령부가 이 오사카에 들어섰다.
이 조선침략본부로 가는 길에 고꾸라꾸바시(極樂橋)라는 목조다리가 있고, 그 아래에 거대한 해자가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중요 문화재인 오테몬(大手門)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쪽과 안쪽에 모두 해자가 있다. 성 바깥쪽의 넓고 깊은 외부 해자에는 4개의 다리가 연결되고, 중심 마당과 천수각, 창고를 보호하는 내부 해자에는 2개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바깥 해자인 소토보리(外堀) 중 오사카성 입구인 서쪽 소토보리는 1959년에 갑자기 말라버렸는데, 지금도 이 소토보리는 바닥을 보이고 있다. 적의 침입을 지연시키는 해자에 물이 가득 차야 정상인데, 바짝 마른 해자도 나름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
칼의 전쟁으로 가득한 일본의 역사에서 이 오사카성의 해자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가 맞붙은 '오사카 여름의 진(大阪城夏の陣)'이라는 전쟁 당시, 도쿠가와 측은 밖에서 성을 둘러싸고 도요토미 측을 고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2중의 해자는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화친을 제의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건 화친 조건 중 하나는 오사카성 소토보리를 메우면 자신의 군대를 퇴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전쟁경험이 전혀 없고 오사카 성 밖에도 나가보지 못하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 황당한 조건을 수락하고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재빠르게 우치보리(內堀)까지 메워버려서, 오사카성은 해자 없는 성이 되어버렸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상황판단 능력이 이 정도이니, 성안의 사람들은 도저히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거대한 해자가 없는 오사카성은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니었다.
오사카성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지만, 성벽은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이 어마어마한 성벽의 높이는 적의 침입이 극심했음을 보여주는 높이이자, 적의 침입을 두려워한 높이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에는 전쟁이 없었기에 성벽이 이렇게 높이 올라가지를 못했다.
성의 정문을 들어서자 견고한 성벽 안에 내 키보다도 더 큰 거대한 바위가 박혀 있다. 오사카성 성벽의 제일 큰 바위는 표면 넓이가 일본 다다미 36장의 넓이와 같다고 한다. 저 바위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에게 바친 다이묘는 어떻게 바위를 이동시켰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정교한 성벽 또한 그 당시의 건축술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사카성 성벽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은 거대한 돌인 '잔넨 이시'가 성벽 밖에 남아 있다. 이 '유감스런 돌'은 성벽 안에 들어가지 못해서 상당히 유감스러웠겠지만, 성벽 안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이름까지 가진 돌로 남게 되었다.
원래 이 오사카성이 자리한 이시야마(石山) 지역에는 1496년에 스님들 숙소가 만들어졌다가 혼간지(本原寺)라는 큰 사찰이 건설되었던 곳이다. 1580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자신에게 최대의 적이었던 불교세력의 이 혼간지를 함락시켰고, 오다 노부나가 사후인 1583년에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이시야마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3년부터 3년에 걸쳐 이곳에 오사카 성을 지었으며, 성의 중심인 텐슈가쿠(天守閣) 축조에만 약 1년 반을 투입했다고 한다. 30여 명의 다이묘(大名)들이 이 오사카성의 건설에 협력하였고, 성 축조를 위해 투입된 인력은 3년 동안 10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하루에 1만 명 이상의 인부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건설규모 상 이 오사카성은 당시 일본 국력의 총집결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축조된 오사카성은 일본 성의 건축역사에서도 대미를 장식하는 성이었다. 일본 성의 상징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큰 텐슈가쿠인데, 이 큰 텐슈가쿠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安土城)과 이 오사카성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즈치성을 본보기로 하면서도 아즈치성을 능가하는 성을 만들었다. 그는 일본 통일의 거점인 이곳에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거대 성곽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각 지방의 장군들도 이 오사카성을 모델로 자신들의 성을 건설하여 일본에서의 성 건축은 황금기를 맞는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통일 후,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해 다이묘들이 살고 있는 성(城) 이외의 성은 모두 철거시켰고, 1615년에는 성의 신축을 금지시킨다. 일본에서의 계속된 평화의 시대도 일본 성곽건축의 발달을 멈추게 하였다.
오사카성은 이 역사적인 텐슈가쿠를 중심으로 성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丸), 산노마루(三丸)를 만들었다. 오사카성은 혼마루를 중심으로 외곽에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을 배치하고, 성곽 주변에 깊은 해자를 둘렀다.
처음 건립 당시의 오사카성 영역은 현재 성의 영역보다 약 4배∼5배정도 더 컸다고 한다. 그 규모는 당시의 절대권력 외에는 완성시킬 수 없는 성이었다. 당시의 성은 현재의 평탄한 성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뒤얽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성의 지붕은 금박기와로 장식되었다. 성의 외벽은 검은 회반죽으로 꼼꼼히 덧칠한 후 그 위에 철 장식을 하였으며, 최상층 외벽에는 호랑이와 학 금박으로 장식하였다. 텐슈가쿠의 출입 미닫이문이 있는 벽에는 사신의 문신이 장식되었다. 성 내부도 금박으로 장식되었고, 초암(草庵)의 다실과 함께 황금의 다실도 만들어질 정도로 당시 오사카성은 화려한 성이었다.
당시 오사카성의 화려한 모습은 이 세상에 비할 수 없다 하여 '삼국무쌍(三國無雙)'이라고 칭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삼국은 일본과 고대중국, 천축(天竺: 인도)을 일컫는 것이니, 이 당시에도 일본인들의 머리 속에 '조선'이라는 존재는 미약해 보였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문화는 새롭게 부상한 다이묘와 상인들의 영향으로 웅장하고 현란한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데, 이러한 당시의 문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사카성이다. 그리고 이 오사카성은 일본의 근세 성시 문화를 이끈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 주변 성시를 계획적으로 건설하였으며, 오사카성으로 향하는 동서 축의 도로를 중심으로 성시를 정비하였다.
오사카성 혼마루 중심부에 들어섰다. 나는 왠지 화려하고 금빛 광채를 띠는 5층 8단의 텐슈가쿠(天守閣) 높은 누각으로 들어왔다. 이 현대적인 곳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던 거간(居間)이 있던 곳이란 말인가? 아니, 텐슈가쿠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어 엘리베이터까지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참하게 새로 단장된 오사카성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사카성은 그동안의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오사카성은 1615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 간의 전쟁 때 불 탄 것을 1620년부터 대규모 재건을 하여 1629년에 다시 완성되었다. 오사카성의 첫 번째 재건이었다. 그러나 재건 당시에 오사카성 영역의 많은 곳에서 성토가 이루어져서, 현재의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지은 성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 재건된 오사카성은 재건된 지 36년 후에 갑작스런 번개를 맞아 다시 불에 타버린다.
이후 오사카성은 에도바쿠후(江戶幕府) 시대 내내 방치되다가, 에도 바쿠후 말기에 상인들이 돈을 모아 대대적으로 보수하게 된다. 오사카성의 두 번째 재건이었다. 그러나 오사카성은 메이지유신 당시 일왕파와 바쿠후파간의 전투로 다시 소멸된다.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이 기부하여 성의 중심인 텐슈가쿠를 재건하였다. 그 때 당시에 현재에 볼 수 있는 황당한 철근콘크리트로 55m 높이의 천수각이 재건되었다. 오사카성의 세 번째 재건이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의 목조건물로 재건하는 것이 문화재 복원의 기본이 아니었을까? 1931년이면 전쟁준비에 광분하던 일제가 이 오사카도 지배하던 때이니, 단순한 일본 군인들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재에도 해악을 끼쳤을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오사카성은 그 내부와 주변의 군사시설 때문에 미군 전폭기들로부터 엄청난 폭격을 당했다. 그런데 당시 미군 조종사의 폭탄투하 실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성안의 주변 건물들은 대파되었지만, 텐슈가쿠는 폭탄을 맞지 않고 살아남았다. 차라리 폭탄에 맞아 텐슈가쿠가 파괴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오사카의 상징인 오사카성 텐슈가쿠가 폭탄에 날아감으로써 일본의 사기도 꺾였을 것이고, 파괴된 철근 콘크리트 위에 목조 성을 다시 재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오사카성의 2차 대전 때 소실된 부분은 1960년경에 다시 지어졌다. 오사카성의 네 번째 재건이었다. 이 재건으로 현재 남아 있는 성역은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の丸)와 텐슈가쿠이다. 그래서 나는 4번 불타고 4번 재건된 현재의 오사카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오사카성은 1997년 봄에 다시 한 번 새롭게 정비되었다. 텐슈가쿠는 외벽이 예전 모습대로 보수공사를 하였고, 진도 7도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고 휠체어도 전망대에 오를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지진 때문에 철근 콘크리트로 성곽을 재건한 것인가?
이 텐슈가쿠에 발을 내딛었다. 이 성의 중심인 높이 46m의 텐슈가쿠는 총 5층의 8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5층 8단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 구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리면서 알게되었다. 이 텐슈가쿠는 5층으로 건물을 올리고, 그 5층 위에 3단의 망루를 올린 것이었다. 텐슈가쿠 내부 1층은 엘리베이터와 안내데스크가 있고, 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5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 8층 전망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성 제일 위의 전망대까지 올라간 후 내려오면서 이 오사카성을 보았다. 내려오는 계단과 올라오는 계단이 구별되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니 다리는 편하지만, 머릿속에는 실망감이 자리 잡는다.
텐슈가쿠 내부는 도저히 일본전통의 유수한 성곽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깔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공사로 인하여, 마치 근세의 서양식 건물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새로 금박을 입힌 외부는 그래도 고색이 감돌지만, 텐슈가쿠 내부의 현대식 시설들은 전혀 외부와 어울리지 않는다.
텐슈가쿠 맨 위층에 자리한 전망대에 오르니, 성 아래의 오사카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망원경을 통해 오사카 전역을 살펴보는 사람들도 있다. 여행자들의 안전을 위해 전망대 창밖으로 걸린 안전망은 시야를 상당 부분 가리고 있다. 오사카성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휴게소까지 설치되어 있다.
가장 어리석은 여행자들은 여행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나도 일본의 가장 거대한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은 많이 찍지 않는 편이지만, 이곳에서는 기념사진 한 장 찍어두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례합니다.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아, 물론이지요. 세워서 찍어드릴까요? 옆으로 눕혀서 찍어드릴까요? 좋습니까?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내가 외국을 여행해 본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일본사람들이 남의 사진 찍어주는 데에 가장 친절한 것 같다.
역사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들과 손님들을 이 오사카성에 불러 텐슈가쿠를 자랑스럽게 안내하였다. 그는 스스로 앞장서서 많은 손님들을 이 텐슈가쿠를 둘러보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 건물의 외부에 장식된 금은과 텐슈가쿠 각층에 쌓인 보물들을 과시하였고, 손님들은 이 오사카성의 화려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어떤 모습이 연상되는가? 손님들의 놀라움과 칭찬에 만족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의 이러한 권력 과시욕이 결국은 조선을 침공하는 허망한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텐슈가쿠 내부의 2층∼7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사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이 텐슈가쿠 7층에는 이 성에서 13년을 살다 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와 가계도,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 무구, 의상, 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스크린 영상물은 일본 TV의 유명한 시대극이다. 입체영상의 사람들이 나와서 당시 오사카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멀티미디어 시설까지 꾸며져 있다.
아즈찌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 평범하고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사가 되어,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계속 명성을 얻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가장 유력한 무장이었던 그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찌 미쯔히데(明智光秀)를 우선 처단한다.
그리고 그는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 시코쿠(四國), 큐슈(九州)를 정벌하고, 오다와라(小田原)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마침내 일본 통일에 성공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성을 본영으로 삼아 일본통일의 과정을 수행하였으며, 1590년에 이 오사카성에서 그에게 감격스러웠을 일본통일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생애가 이 오사카성 텐슈가쿠 내부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한국에서 온 나의 눈은 그의 생애 설명 중에서도 '16번 항목'에 가서 멈춰 섰다. 이 16번 항목은 다름 아닌 조선출병(朝鮮出兵), 즉 임진왜란에 관한 것이다. 그가 일본통일 후 말년에 일으킨 임진왜란은 '조선출병'이라는 이름으로 단 몇 줄만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일본통일을 도운 다이묘와 가신들에게 전공에 따라 상을 주어야 하는데 나누어 줄 땅이 부족하였다. 그는 이 다이묘와 가신들의 갈등을 외부로 방출시키기 위해 중국과 인도까지 침략을 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에 길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조선에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그들의 역사 속에 이 임진왜란은 이른 바 '분로쿠게이쵸(文祿慶長)의 역(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役)'이라! 그 처참한 전쟁을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 것인가?
이 '조선출병'을 설명하는 텐슈가쿠의 설명문 중에 임진왜란 중 조선 양민에 대한 잔혹행위가 있었다는 대목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애를 설명하는 이 전시실에서 이 대목을 굳이 설명하는 것은 이 성을 가장 많이 찾는 외국 관광객이 한국인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던 그가 이곳에서는 사랑 받는 영웅 중의 한 명이다.
오사카 사람들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일본 천하를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전장을 헤쳐나가서 권력의 정상에 올라섰다는 데에 존경심을 느끼는 모양이다. 한국인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한갓 전쟁광인데 말이다.
일본군이 아직도 우리나라의 남해안에 머물고 있던 1596년 9월, 명(明) 나라의 정사 양방형(楊方亨)과 부사 심유경(沈惟敬)이 이 오사카성에 당도한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명나라 협상 파트너로서 명나라 조정에 임진왜란에 대한 허위보고를 했던 사람이었다. 이 명의 사신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너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勅書)를 내린다.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통역을 하는 승려에게 허위 통역을 부탁하였다가 거절당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칙서의 내용을 뒤늦게 알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가 총애하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만류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목숨은 살려두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597년이 밝아오자마자 일본군은 다시 대대적으로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의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다시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무모한 조선 침략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그들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과도한 전쟁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한 전쟁광 때문에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전대미문의 참상을 겪었다.
나의 발은 천천히 텐슈가쿠의 5층에서 4층, 3층으로 내려간다. 이 곳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무장들의 갑옷, 투구, 창, 칼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오사카성이 건축되는 순서를 설명하는 조형도도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성에 진열된 것 중 가장 압권인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의 패권싸움인 '오사카의 진(大阪の陣)'을 미니어처 인형으로 재현해놓은 것이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손에 든 양측 군대의 모습이 너무나 정교하여, 이 군사들이 금세 싸움을 벌일 것 같은 기세다.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이 50세를 넘겨서 애첩인 요도기미(淀君)와의 사이에 히데요리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처제인 오고우(於江)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며느리로 삼게 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여러 가신들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며 죽는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성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의 유언에 의해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5명의 가신들로부터 섭정을 받는다. 새장 안에 갇힌 허수아비인 그는 그 그릇이 크지 못하여 다이묘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게 되고, 오사카성에서의 정무는 그의 어머니인 요도기미가 대신하게 된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많은 부하들이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 있는 동안, 일본 전국은 계속 바뀌어 갔고, 일본의 패권은 관동지방에서 꾸준히 세력을 키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어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에 있던 많은 장군들이 소위 '조선출병'으로 경제적, 군사적 타격을 입었지만, 그는 임진왜란에 출전하지 않은 장군으로서 일본 전체를 탐낼 만한 권력과 함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인 센히메(千姬)와 결혼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가문을 살려두려고 했었다. 그러나 요도기미와 그 측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화친을 거부하였고, 요도기미의 책략으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가문 측은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영지를 삭감하는 등 핍박을 시작하였다. 1600년 설날, 그는 이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와 동등한 자리에 앉아 다이묘들의 신년인사를 직접 받는다.
1600년 9월 15일, 도요토미 히데요리 보좌 세력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인 동군 간에 일본의 패권을 다투는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서군에게 전세가 유리했지만, 결국 동군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다. 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65만석을 가진 다이묘가 되어 버렸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다. 일본 역사는 여기에서 한 전환점을 돌게 된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에도바쿠후(江戶幕府)를 새로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으로 최후의 통첩을 보낸다. 그 통첩은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떠나거나 히데요리의 생모인 요도기미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 통첩을 거절한다. 1615년,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를 지지하는 10만 명의 군사를 다시 일으킨다. 이 커다란 전쟁이 이 오사카성 텐슈가쿠에 미니어처로 전시된 '오사카 여름의 진(大阪城夏の陣)'이라는 전쟁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의 책략으로 오사카성은 해자가 메워진다. 본성만 남은 오사카 성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였던 사나다 유키무라(眞田幸村)는 군사를 이끌고 최후의 돌격을 시도한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독특한 전술로 승리를 목전에 두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생모 요도기미는 오사카성의 후미진 식량창고에 숨어 있다가 공포에 떨며 자살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오사카성에 승자로서 자랑스럽게 입성하고, 짧은 세월동안 일본을 지배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은 일본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오사카성의 텐슈가쿠도 일본역사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된다. 내가 내려오고 있는 이 텐슈가쿠는 한때 일본의 실질적 수도였던 곳이었다.
텐슈가쿠에서 내려오니 성안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자결터가 남아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믿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도요토미 가문은 종말을 맞이했다.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회를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의 막부는 조선과 선린의 관계를 유지했다.
해자를 건너 오사카성 밖으로 나서니 찌는 듯한 더위가 나를 다시 공격한다. 오사카 성안의 자료들을 훑어보고 나오니, 성의 성벽과 해자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화려했던 성이 조선침략의 본영이었고, 그 후 일본 통일의 과정에서 수십만 대군이 이 해자와 성벽을 둘러싸고 공방전을 벌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걷고 있는 이 길도 전쟁 당시에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한 곳이 아니었겠는가?
칼의 피비린내에 의해 한 시대를 마감하고 한 시대를 시작하며 그 시대의 문화를 만들어가던 나라. 머릿속의 이 일본 역사와 함께, 교토로 돌아가는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나약해 보이는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조금은 혼란스럽다. 역사는 역사일 뿐인가? 아니면 이 나약해 보이는 젊은이들의 마음속에도 그 시대의 유전자가 남아있는 것인가?
출처 : in Tokyo Japan |글쓴이 : melon [원문보기]
히메지성(姬路城), 구마모토성(態本城)과 함께 일본의 3대성 중의 하나인 오사카성은 오사카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자 오사카 사람들의 고향과 같은 성이다. 그러나 일본이 자랑하는 이 오사카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사령부였다.
오사카성 앞의 공원을 가로질러 멀리 오사카 성이 보인다. 이 성은 멀리서 바라보아도 그 거대한 규모가 압도적인 곳이다. 이 언덕 위의 거대 성곽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관점에서 보면 아주 훌륭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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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오사카성 원경 |
ⓒ2005 노시경 |
백제멸망 후, 아스카(飛鳥)에서 나니와까지 온 사이메이(齊明) 일왕은 이곳에서 백제 부흥군을 도울 왜의 원군을 모으고 칼과 창을 준비하도록 지휘했다. 그리고 사이메이 일왕은 직접 왜의 3만 원군을 이끌고 지금의 후쿠오카 아래의 다자이후(太宰府)까지 가게 된다. 당시 이 오사카 지역은 한반도 서쪽의 멸망당한 한 나라를 돕고 한반도 동쪽의 한 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가 출발한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900 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한반도의 조선 전체를 유린한 일본군의 사령부가 이 오사카에 들어섰다.
이 조선침략본부로 가는 길에 고꾸라꾸바시(極樂橋)라는 목조다리가 있고, 그 아래에 거대한 해자가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중요 문화재인 오테몬(大手門)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쪽과 안쪽에 모두 해자가 있다. 성 바깥쪽의 넓고 깊은 외부 해자에는 4개의 다리가 연결되고, 중심 마당과 천수각, 창고를 보호하는 내부 해자에는 2개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바깥 해자인 소토보리(外堀) 중 오사카성 입구인 서쪽 소토보리는 1959년에 갑자기 말라버렸는데, 지금도 이 소토보리는 바닥을 보이고 있다. 적의 침입을 지연시키는 해자에 물이 가득 차야 정상인데, 바짝 마른 해자도 나름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
칼의 전쟁으로 가득한 일본의 역사에서 이 오사카성의 해자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가 맞붙은 '오사카 여름의 진(大阪城夏の陣)'이라는 전쟁 당시, 도쿠가와 측은 밖에서 성을 둘러싸고 도요토미 측을 고사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2중의 해자는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화친을 제의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건 화친 조건 중 하나는 오사카성 소토보리를 메우면 자신의 군대를 퇴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전쟁경험이 전혀 없고 오사카 성 밖에도 나가보지 못하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 황당한 조건을 수락하고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재빠르게 우치보리(內堀)까지 메워버려서, 오사카성은 해자 없는 성이 되어버렸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상황판단 능력이 이 정도이니, 성안의 사람들은 도저히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거대한 해자가 없는 오사카성은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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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토미 히데요시 동상 |
ⓒ2005 노시경 |
성의 정문을 들어서자 견고한 성벽 안에 내 키보다도 더 큰 거대한 바위가 박혀 있다. 오사카성 성벽의 제일 큰 바위는 표면 넓이가 일본 다다미 36장의 넓이와 같다고 한다. 저 바위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에게 바친 다이묘는 어떻게 바위를 이동시켰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정교한 성벽 또한 그 당시의 건축술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사카성 성벽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은 거대한 돌인 '잔넨 이시'가 성벽 밖에 남아 있다. 이 '유감스런 돌'은 성벽 안에 들어가지 못해서 상당히 유감스러웠겠지만, 성벽 안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이름까지 가진 돌로 남게 되었다.
원래 이 오사카성이 자리한 이시야마(石山) 지역에는 1496년에 스님들 숙소가 만들어졌다가 혼간지(本原寺)라는 큰 사찰이 건설되었던 곳이다. 1580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자신에게 최대의 적이었던 불교세력의 이 혼간지를 함락시켰고, 오다 노부나가 사후인 1583년에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 이시야마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3년부터 3년에 걸쳐 이곳에 오사카 성을 지었으며, 성의 중심인 텐슈가쿠(天守閣) 축조에만 약 1년 반을 투입했다고 한다. 30여 명의 다이묘(大名)들이 이 오사카성의 건설에 협력하였고, 성 축조를 위해 투입된 인력은 3년 동안 10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하루에 1만 명 이상의 인부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건설규모 상 이 오사카성은 당시 일본 국력의 총집결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축조된 오사카성은 일본 성의 건축역사에서도 대미를 장식하는 성이었다. 일본 성의 상징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큰 텐슈가쿠인데, 이 큰 텐슈가쿠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安土城)과 이 오사카성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즈치성을 본보기로 하면서도 아즈치성을 능가하는 성을 만들었다. 그는 일본 통일의 거점인 이곳에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거대 성곽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각 지방의 장군들도 이 오사카성을 모델로 자신들의 성을 건설하여 일본에서의 성 건축은 황금기를 맞는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통일 후,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위해 다이묘들이 살고 있는 성(城) 이외의 성은 모두 철거시켰고, 1615년에는 성의 신축을 금지시킨다. 일본에서의 계속된 평화의 시대도 일본 성곽건축의 발달을 멈추게 하였다.
오사카성은 이 역사적인 텐슈가쿠를 중심으로 성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丸), 산노마루(三丸)를 만들었다. 오사카성은 혼마루를 중심으로 외곽에 니노마루, 산노마루 등을 배치하고, 성곽 주변에 깊은 해자를 둘렀다.
처음 건립 당시의 오사카성 영역은 현재 성의 영역보다 약 4배∼5배정도 더 컸다고 한다. 그 규모는 당시의 절대권력 외에는 완성시킬 수 없는 성이었다. 당시의 성은 현재의 평탄한 성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뒤얽힌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성의 지붕은 금박기와로 장식되었다. 성의 외벽은 검은 회반죽으로 꼼꼼히 덧칠한 후 그 위에 철 장식을 하였으며, 최상층 외벽에는 호랑이와 학 금박으로 장식하였다. 텐슈가쿠의 출입 미닫이문이 있는 벽에는 사신의 문신이 장식되었다. 성 내부도 금박으로 장식되었고, 초암(草庵)의 다실과 함께 황금의 다실도 만들어질 정도로 당시 오사카성은 화려한 성이었다.
당시 오사카성의 화려한 모습은 이 세상에 비할 수 없다 하여 '삼국무쌍(三國無雙)'이라고 칭해졌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삼국은 일본과 고대중국, 천축(天竺: 인도)을 일컫는 것이니, 이 당시에도 일본인들의 머리 속에 '조선'이라는 존재는 미약해 보였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문화는 새롭게 부상한 다이묘와 상인들의 영향으로 웅장하고 현란한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데, 이러한 당시의 문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사카성이다. 그리고 이 오사카성은 일본의 근세 성시 문화를 이끈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 주변 성시를 계획적으로 건설하였으며, 오사카성으로 향하는 동서 축의 도로를 중심으로 성시를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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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오사카성 전시 갑옷 |
ⓒ2005 노시경 |
오사카성은 그동안의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오사카성은 1615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 간의 전쟁 때 불 탄 것을 1620년부터 대규모 재건을 하여 1629년에 다시 완성되었다. 오사카성의 첫 번째 재건이었다. 그러나 재건 당시에 오사카성 영역의 많은 곳에서 성토가 이루어져서, 현재의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지은 성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 재건된 오사카성은 재건된 지 36년 후에 갑작스런 번개를 맞아 다시 불에 타버린다.
이후 오사카성은 에도바쿠후(江戶幕府) 시대 내내 방치되다가, 에도 바쿠후 말기에 상인들이 돈을 모아 대대적으로 보수하게 된다. 오사카성의 두 번째 재건이었다. 그러나 오사카성은 메이지유신 당시 일왕파와 바쿠후파간의 전투로 다시 소멸된다.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이 기부하여 성의 중심인 텐슈가쿠를 재건하였다. 그 때 당시에 현재에 볼 수 있는 황당한 철근콘크리트로 55m 높이의 천수각이 재건되었다. 오사카성의 세 번째 재건이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의 목조건물로 재건하는 것이 문화재 복원의 기본이 아니었을까? 1931년이면 전쟁준비에 광분하던 일제가 이 오사카도 지배하던 때이니, 단순한 일본 군인들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재에도 해악을 끼쳤을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오사카성은 그 내부와 주변의 군사시설 때문에 미군 전폭기들로부터 엄청난 폭격을 당했다. 그런데 당시 미군 조종사의 폭탄투하 실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성안의 주변 건물들은 대파되었지만, 텐슈가쿠는 폭탄을 맞지 않고 살아남았다. 차라리 폭탄에 맞아 텐슈가쿠가 파괴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오사카의 상징인 오사카성 텐슈가쿠가 폭탄에 날아감으로써 일본의 사기도 꺾였을 것이고, 파괴된 철근 콘크리트 위에 목조 성을 다시 재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오사카성의 2차 대전 때 소실된 부분은 1960년경에 다시 지어졌다. 오사카성의 네 번째 재건이었다. 이 재건으로 현재 남아 있는 성역은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の丸)와 텐슈가쿠이다. 그래서 나는 4번 불타고 4번 재건된 현재의 오사카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오사카성은 1997년 봄에 다시 한 번 새롭게 정비되었다. 텐슈가쿠는 외벽이 예전 모습대로 보수공사를 하였고, 진도 7도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고 휠체어도 전망대에 오를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지진 때문에 철근 콘크리트로 성곽을 재건한 것인가?
이 텐슈가쿠에 발을 내딛었다. 이 성의 중심인 높이 46m의 텐슈가쿠는 총 5층의 8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5층 8단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 구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리면서 알게되었다. 이 텐슈가쿠는 5층으로 건물을 올리고, 그 5층 위에 3단의 망루를 올린 것이었다. 텐슈가쿠 내부 1층은 엘리베이터와 안내데스크가 있고, 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5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 8층 전망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나는 성 제일 위의 전망대까지 올라간 후 내려오면서 이 오사카성을 보았다. 내려오는 계단과 올라오는 계단이 구별되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니 다리는 편하지만, 머릿속에는 실망감이 자리 잡는다.
텐슈가쿠 내부는 도저히 일본전통의 유수한 성곽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깔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공사로 인하여, 마치 근세의 서양식 건물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새로 금박을 입힌 외부는 그래도 고색이 감돌지만, 텐슈가쿠 내부의 현대식 시설들은 전혀 외부와 어울리지 않는다.
텐슈가쿠 맨 위층에 자리한 전망대에 오르니, 성 아래의 오사카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망원경을 통해 오사카 전역을 살펴보는 사람들도 있다. 여행자들의 안전을 위해 전망대 창밖으로 걸린 안전망은 시야를 상당 부분 가리고 있다. 오사카성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휴게소까지 설치되어 있다.
가장 어리석은 여행자들은 여행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나도 일본의 가장 거대한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은 많이 찍지 않는 편이지만, 이곳에서는 기념사진 한 장 찍어두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례합니다.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아, 물론이지요. 세워서 찍어드릴까요? 옆으로 눕혀서 찍어드릴까요? 좋습니까?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내가 외국을 여행해 본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일본사람들이 남의 사진 찍어주는 데에 가장 친절한 것 같다.
역사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다이묘들과 손님들을 이 오사카성에 불러 텐슈가쿠를 자랑스럽게 안내하였다. 그는 스스로 앞장서서 많은 손님들을 이 텐슈가쿠를 둘러보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 건물의 외부에 장식된 금은과 텐슈가쿠 각층에 쌓인 보물들을 과시하였고, 손님들은 이 오사카성의 화려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어떤 모습이 연상되는가? 손님들의 놀라움과 칭찬에 만족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의 이러한 권력 과시욕이 결국은 조선을 침공하는 허망한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텐슈가쿠 내부의 2층∼7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사박물관과 같은 곳이다. 이 텐슈가쿠 7층에는 이 성에서 13년을 살다 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와 가계도,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상, 무구, 의상, 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스크린 영상물은 일본 TV의 유명한 시대극이다. 입체영상의 사람들이 나와서 당시 오사카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멀티미디어 시설까지 꾸며져 있다.
아즈찌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 평범하고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사가 되어,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계속 명성을 얻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가장 유력한 무장이었던 그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찌 미쯔히데(明智光秀)를 우선 처단한다.
그리고 그는 삿사 나리마사(佐佐成政), 시코쿠(四國), 큐슈(九州)를 정벌하고, 오다와라(小田原)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마침내 일본 통일에 성공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성을 본영으로 삼아 일본통일의 과정을 수행하였으며, 1590년에 이 오사카성에서 그에게 감격스러웠을 일본통일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생애가 이 오사카성 텐슈가쿠 내부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한국에서 온 나의 눈은 그의 생애 설명 중에서도 '16번 항목'에 가서 멈춰 섰다. 이 16번 항목은 다름 아닌 조선출병(朝鮮出兵), 즉 임진왜란에 관한 것이다. 그가 일본통일 후 말년에 일으킨 임진왜란은 '조선출병'이라는 이름으로 단 몇 줄만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일본통일을 도운 다이묘와 가신들에게 전공에 따라 상을 주어야 하는데 나누어 줄 땅이 부족하였다. 그는 이 다이묘와 가신들의 갈등을 외부로 방출시키기 위해 중국과 인도까지 침략을 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에 길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조선에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그들의 역사 속에 이 임진왜란은 이른 바 '분로쿠게이쵸(文祿慶長)의 역(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役)'이라! 그 처참한 전쟁을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 것인가?
이 '조선출병'을 설명하는 텐슈가쿠의 설명문 중에 임진왜란 중 조선 양민에 대한 잔혹행위가 있었다는 대목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애를 설명하는 이 전시실에서 이 대목을 굳이 설명하는 것은 이 성을 가장 많이 찾는 외국 관광객이 한국인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던 그가 이곳에서는 사랑 받는 영웅 중의 한 명이다.
오사카 사람들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일본 천하를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전장을 헤쳐나가서 권력의 정상에 올라섰다는 데에 존경심을 느끼는 모양이다. 한국인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간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한갓 전쟁광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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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명의 칙서 |
ⓒ2005 노시경 |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글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통역을 하는 승려에게 허위 통역을 부탁하였다가 거절당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칙서의 내용을 뒤늦게 알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가 총애하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만류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목숨은 살려두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597년이 밝아오자마자 일본군은 다시 대대적으로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의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다시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무모한 조선 침략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그들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과도한 전쟁비용을 지출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한 전쟁광 때문에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많은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전대미문의 참상을 겪었다.
나의 발은 천천히 텐슈가쿠의 5층에서 4층, 3층으로 내려간다. 이 곳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무장들의 갑옷, 투구, 창, 칼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오사카성이 건축되는 순서를 설명하는 조형도도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성에 진열된 것 중 가장 압권인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의 패권싸움인 '오사카의 진(大阪の陣)'을 미니어처 인형으로 재현해놓은 것이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손에 든 양측 군대의 모습이 너무나 정교하여, 이 군사들이 금세 싸움을 벌일 것 같은 기세다.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이 50세를 넘겨서 애첩인 요도기미(淀君)와의 사이에 히데요리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처제인 오고우(於江)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며느리로 삼게 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여러 가신들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며 죽는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성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의 유언에 의해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5명의 가신들로부터 섭정을 받는다. 새장 안에 갇힌 허수아비인 그는 그 그릇이 크지 못하여 다이묘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게 되고, 오사카성에서의 정무는 그의 어머니인 요도기미가 대신하게 된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많은 부하들이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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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토미 가문 |
ⓒ2005 노시경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인 센히메(千姬)와 결혼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가문을 살려두려고 했었다. 그러나 요도기미와 그 측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화친을 거부하였고, 요도기미의 책략으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가문 측은 사이가 벌어지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영지를 삭감하는 등 핍박을 시작하였다. 1600년 설날, 그는 이 오사카성에서 히데요리와 동등한 자리에 앉아 다이묘들의 신년인사를 직접 받는다.
1600년 9월 15일, 도요토미 히데요리 보좌 세력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인 동군 간에 일본의 패권을 다투는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가 일어난다. 처음에는 서군에게 전세가 유리했지만, 결국 동군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다. 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65만석을 가진 다이묘가 되어 버렸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다. 일본 역사는 여기에서 한 전환점을 돌게 된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에도바쿠후(江戶幕府)를 새로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으로 최후의 통첩을 보낸다. 그 통첩은 '오사카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떠나거나 히데요리의 생모인 요도기미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 통첩을 거절한다. 1615년,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를 지지하는 10만 명의 군사를 다시 일으킨다. 이 커다란 전쟁이 이 오사카성 텐슈가쿠에 미니어처로 전시된 '오사카 여름의 진(大阪城夏の陣)'이라는 전쟁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의 책략으로 오사카성은 해자가 메워진다. 본성만 남은 오사카 성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였던 사나다 유키무라(眞田幸村)는 군사를 이끌고 최후의 돌격을 시도한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독특한 전술로 승리를 목전에 두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생모 요도기미는 오사카성의 후미진 식량창고에 숨어 있다가 공포에 떨며 자살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오사카성에 승자로서 자랑스럽게 입성하고, 짧은 세월동안 일본을 지배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은 일본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오사카성의 텐슈가쿠도 일본역사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된다. 내가 내려오고 있는 이 텐슈가쿠는 한때 일본의 실질적 수도였던 곳이었다.
텐슈가쿠에서 내려오니 성안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자결터가 남아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장 믿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도요토미 가문은 종말을 맞이했다.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회를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의 막부는 조선과 선린의 관계를 유지했다.
해자를 건너 오사카성 밖으로 나서니 찌는 듯한 더위가 나를 다시 공격한다. 오사카 성안의 자료들을 훑어보고 나오니, 성의 성벽과 해자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화려했던 성이 조선침략의 본영이었고, 그 후 일본 통일의 과정에서 수십만 대군이 이 해자와 성벽을 둘러싸고 공방전을 벌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걷고 있는 이 길도 전쟁 당시에는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한 곳이 아니었겠는가?
칼의 피비린내에 의해 한 시대를 마감하고 한 시대를 시작하며 그 시대의 문화를 만들어가던 나라. 머릿속의 이 일본 역사와 함께, 교토로 돌아가는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나약해 보이는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조금은 혼란스럽다. 역사는 역사일 뿐인가? 아니면 이 나약해 보이는 젊은이들의 마음속에도 그 시대의 유전자가 남아있는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