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견문록 5 - 은각사 / 기원.... 제자리걸음
다시 교토역으로 돌아와 은각사 가는 버스를 찾고 보니 금방 내가 내린 100번 버스다. 이런....
인파는 탈 때의 서너 배로 불어나 있다. 시간은 이미 오후 세 시 반.... 일본은 동쪽나라라 그런지 해가 빨리 지는데.... 버스야, 어서 달려라. 해지기 전에 얼른 한 껀 올려보세.
그러나 버스는 통 움직이질 않는다. 터미널 빠져나오는 데만 무려 15분, 큰 도로로 나섰어도 맹꽁이 콧구멍처럼 꼭 막혀 데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간다. 매 신호등마다 10분씩은 서 있는 것 같다. 토요일이라서 그런가? 고즈녁할 줄 알았던 교토 거리는 차량와 사람으로 꽉 차 있다. 한 블록 지나갈 때마다 절이요, 신사요, 미술관이요, 박물관이 시선을 끌지만 그곳에서 꾸역꾸역 쏟아져나오는 차량과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멋진 古都'라는 감탄 이전에 나의 목적지를 방해하고 있다는 짜증 밖에 안 나니.... 이럴 때야말로 '느리게 살기'의 미학과 철학이 필요한 때인 듯하다.
창밖과 버스 안의 볼거리로 눈을 돌려본다.
교토시립미술관. 유리창을 통해 찍었더니 빛바랜 칼라가 나왔다. 마음에 든다...
버스 천장에 붙은 폭력단추방센터(아마도 신고센터?) 광고...
열린 창을 통해 찍은 서민아파트. 발코니가 퍽 특이하다.
간신히 아까 왔던 청수사 앞을 통과하는데 벌써 날이 어두워온다. 벌써 네 시 반... 암만해도 은각사 들어가긴 틀렸다 싶다. 그 다음 정류장인 기원을 지나는데 벌써 홍등이 걸리고 흥청대는 분위기가 내게 '내려, 내려!' 속삭인다. 어쩌나, 어쩌나.... 길은 여전히 막히고....
그런데 참 일본사람들 대단하기도 하다. 우리나라 같으면 부글부글 끓고 항의하고 중간에 내려달라고 조르고 난리가 났을 텐데.... 아무도 불평하거나 내리겠다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초조해보이는 사람도 없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망설망설 하다가 그만 다음 정거장도 지나고... 에라, 모르겠다... 갈 데까지 가는거야!
은각사 앞에서 내리니 다섯 시 반이 넘었다. 거리감각으로 미루어보아 30분이면 뒤집어쓸 것을 두 시간 넘게... 이럴 수가 있나. 은각사 올라가는 길은 이미 어둠에 잠겼고....
어이가 없다. 이렇게 교토의 하루가 저물어가다니.
이 동네 살던 철학자 모모씨가 사색에 잠겨 걸었다고 하여 유명해진 철학자의 길 입구...
은각사에서 남선사로 넘어가는 오롯한 오솔길로 이어지는 모양인데 너무 으슥하고 인적이 드물어 포기하고 말았다. 울 아들넘이 분위기 좋다고 강추하는 바람에 굳이 찾아온 길인데... ㅜ.ㅜ
까페들이 늘어선 길을 오락가락하다 하릴없이 기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거장으로 가보니 줄이 끝이 안 보인다. 그 웬수같은 100번 버스를 타려는 인파다. 내가 몬산다 정말!!
저걸 또 타긴 싫은데.....그럼 어떻게 돌아가나?
구루마를 타볼까? (관광용 인력거를 여기서는 구루마라고 한다. 가장 친숙한 일본말..^^ )
구루마 타는 곳으로 갔더니 마침 영어가 되는 꽃미남 구루마꾼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기원 버스정류장까지 가겠다고 했더니 이 구루마는 관광용이라 그렇게는 안 하고, 기원 안까지 한 바퀴 돌아주는데 5000엔(버스요금 200엔)이란다. 나는 걸어다니면서 보는 게 좋으니 버스정류장까지만 싸게 데려다 달라고 하니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고개를 꾸벅거린다.
걸어가면 어떻겠냐고 물으니 자상하게 길을 일러주다가... 아마 한시간쯤 걸릴 테니 차라리 택시를 타란다. 그런데 택시줄도 장난이 아닌 걸.. 다른 버스 노선을 물었더니 전방 1킬로 정도 걸어가 좌회전해서 내려가면 있는 것 같단다.
자기 구루마도 안 타주는데 이렇게 친절하다니... 중국 인력거꾼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매너... 진짜 감동먹었다. 게다가 구루마꾼과 영어가 통할 줄은 예상도 못했던 터라 감동 두 배.
일본 길거리에서 정말 영어 안 통한다. 중국보다 더 심하다. 안 통할 뿐만 아니라 영어로 말을 걸면 미워하는 눈치... 쓰면 알아보는데 듣기는 완전 꽝이다. 초반에 그런 낌새를 알아채고 아예 영어 쓰기를 포기해버렸는데... 이 청년이 일본에서 영어가 통했던 딱 두 사람 중 하나다.
할 수 없이 버스 줄로 돌아간다. 그 동안 길이가 좀 줄긴 했다. 이러다 기원에 들르기도 어려울지 모르겠다. 오사카로 돌아가는 마지막 전철이 몇 시에 있는지 확인 안 해둔 게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사이에 버스가 두 대 왔다가고 드디어 다음 버스가 오면 나도 탈 수 있겠다. 앗, 그런데....
비상사태 발생.
교통정리하는 아주머니가 와서 빠른 일본말로 뭐라뭐라 떠드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모두 흩어진다. 어떤 이들은 뒤쪽으로 가고 대부분은 앞쪽으로 간다. 아, 이게 도체 무슨 일이랴? 영문을 알아야 따라가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닌가베...
태평한 나도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허둥지둥 하던 중 외국남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아가씨 발견... 외국애인을 두었으니 영어가 되겠다 싶어 쫓아갔다. (헉, 그런데 아가씨는 영어를 전혀 못하고 애인이 일본말을 잘한다. @.@ ) 서양아저씨 왈, 원래는 이 길이 버스노선이 아닌데 관광인파가 많은 주말에만 임시로 운행을 한단다. 이제 관광이 끝날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에 노선이 취소되었단다. 다행히 친절한 구루마꾼의 길안내가 있었기에 이젠 그리 걱정 안 된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기원 거리에는 붉은등이 요란하게 걸렸다. 그러나 가이드북에서 본 그림은 없다. 이상하네? 아무튼 눈에 띄는 신사 쪽으로 올라가본다.
하필 사진을 찍는 데 버스가 가로막았네..
그래도 기온 거리의 화려한 불빛을 보여주는 사진은 이것 뿐이라...
내외 혹은 연인이 함께 새끼줄을 잡아당겨 꼭대기에 매달린 항아리 같은 것을 울린다. 무슨 효험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심들이다.
청천하늘엔 별들도 많고~ 사람들 가슴엔 소원도 많네~
전통적으로 게이샤의 마을로 알려진 기원에서는 중앙의 三條 거리 양편 뒷골목 구경을 해야 하는 건데... 당시엔 그걸 몰라 앰한 쇼핑거리와 신사만 훑고 다녔다. 아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면 사전정보가 없었더라도 그 골목길들을 찾아냈을 텐데.... 해질녘의 독특한 분위기도 놓치고 기모노 입고 돌아다니는 아가씨들의 게다 방울소리도 못듣고... 오사카로 돌아갈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급해진 걸음은 어느새 케이한 四條(시조)역에 도착해 있다. 아 속상하다, 슬프다... 이리 허무하게 교토를 떠나다니!! 교토, 나는 너를 교통지옥으로 기억하겠다!!
꾸벅꾸벅 졸며 오사카로 돌아오니 비로소 무릎이 시큰거리고 종아리 땡기는 느낌이 온다. 오늘 최소한 오십리는 걸었을 꺼다. 내일 잘 일어나질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