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그릴라 답사기 8 - 백수대 사람들
기나긴 구정연휴를 맞아 방콕하고 있는 두 남정네의 컴 경쟁에 밀려 꽤 오래 쉬었더니 여행길은 물론 여행기를 쓰던 기억마저 가물가물... 호랑이가 됐든 괭이가 됐든 어서어서 끝내야겠습니다. 좀 거칠게 나가더라도 이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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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는 별로 사귈 기회가 없었던 나로서는 사실 사찰 구경에 별로 흥미가 없는 편이다(아는 만큼 보인다니 그런가보다). 중국의 웬만한 관광지에는 거반 사찰이 끼어 있는데 불교나 불교미술이나 불교건축이나... 이런 데 관심있는 친구들과 함께 가면 친구가 사찰 구경 하는 동안 나는 밖에 나와 사찰을 끼고 있는 산을 즐기는 편.
하지만 송찬림사는 워낙 독특한 사찰이라 유심히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멀리서부터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저 드높은 위엄을 보라.
사원 아래 건물들은 절 부속건물이 아니라 민가. 이것도 꽤 독특한 세팅 아닌가.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로 작은 불당들이 늘어서 있는데 모두 저런 경통들을 갖추고 있다.
요란한 불당...
정면 왼쪽에 걸린 사진이 중국정부에 배신을 때린 판첸라마를 대신하여 세운 ** 대사라고 한다.
불경을 읽기엔 학식이 모자라는 중생에게 불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려진 탱화는 그래서 매우 사실적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 꽤 재미있을 듯...
정작 사진을 찍고 싶은 곳은 라마승들이 경을 읽는 곳이었는데.... 발까지 굴러대며 열정적으로 목청껏 경을 외는 모습 앞에서 (허락이 된다 해도) 어찌 사진기를 들이댈 수 있나. 사진은 못남겼지만 그 대단한 광경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대부분 법당 안에서도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법당 사진은 거의 남기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송찬린쓰 자체보다 이 세팅이 더 좋긴 했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
부처님 뵈러 왔다 가는 일가족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금관을 쓰고 속세를 굽어보고 있는 저 도도한 자태..
(불교신자님들, 죄송합니다. 단순무식한 저의 표현을 용서하시길...)
(이어서 씁니다...)
송찬린쓰에서 시내로 돌아온 시간은 12시.
백수대로 가는 버스가 1 시에 출발한다 하여 '딱 좋아~' 를 외쳤지만 그것도 잠시... 당일에 돌아오겠다는 야무진(!) 계획에 따라 백수대에서 샹그릴라로 돌아오는 막차시간을 확인하니... 크억, 2시란다. (당일치기를 할 생각이었으면 아침 9시에 떠났어야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틀렸고... 내친김에 다시 빵차를?
황룡이나 비슷하다는데 300원씩이나 내고 다녀오느니 생략하고 고성 골목 까페에서 죽칠까?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호텔 체크인할 때 만난 스페인 애들이 물어볼 때 갈고리를 꽂아둘 걸 그랬나? (샹그릴라에서 그냥저냥 한나절 죽치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고갤 드는 거 보니 이제 여행도 일상으로 접어들고 있는 모양이다. 아들아, 집에 갈 때가 된 모양이다... ㅜ.ㅜ)
어영부영하고 있는데 얌전하게 생긴 아저씨가 다가와 새로 뽑은 깔끔한 빵차로 우리를 꼬인다. 원래는 300원이지만 자기도 집(백수대)에 가는 길이니 200원에 해주겠단다. 그래, 오늘 샹그릴라에서 논다 해도 우리 둘이 200원 안 쓰겄나. 행동반경이 커지면 암만해도 견문도 더 넓어지겠지? 어떡할까.... 가? 마?
그러다가 어쩌다가... 얼떨결에 上車! 백수대까지는 68km이니 평지 같으면 한 시간 거리겠지만 오늘 역시 해발 5500m의 합파설산을 바라보며 오르락내리락 한다니 왕복 4시간은 잡아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백수대에서 놀 시간이야 한두시간 나겄지. (이런 걸 보고 울 아들은 '가러 간다'고 한다. ㅎㅎ)
아름다운 초원으로 유명하다는 삐타하이(碧塔海)도 겨울을 나느라 황량하기만 하다. 봄이 되면 고운 꽃들을 피워올릴 과수원들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달리자니 어느새 차는 산길로 접어든다. 이곳도 해발 4000미터급의 고산지대지만 오늘 보는 풍경은 웬지 강원도 어느 산골에 온 듯한 느낌이다. 내가 본 중국의 여느 산과는 확실히 다른.... 아저씨 말로도 봄에는 두견화,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고 하니 이곳의 식생은 아마도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일찌감치 관광지로 이름을 올린 덕분에 백수대 가는 길은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다. 나시족 기사 아저씨 和慶善씨는 좀 과묵한 사람인 듯 했지만 쉴 새없이 쏟아지는 나의 질문에 견디지 못하고(이왕 떠난 길 이렇게라도 흥을 돋굴 필요가 있다) 자기 고향 백수대 자랑을 시작한다. 백수대야말로 나시족의 진정한 발원지라나. 나시족들이 조상 때부터 나쁜 일이 생기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좋은 일이 생기면 모여 춤판을 벌였던 곳이 바로 이곳 백수대였단다. 지금도 백수대 때문에 온 마을이 먹고사니 백수대를 끼고 사는 자기 마을 사람들은 福이 많은 거란다. 백수대 때문에 외부로 나가는 길도 다른 마을과 달리 일찍 닦였고 그 때문에 발전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트럭기사로, 장거리버스 기사로 일하면서 청뚜고 충칭이고 사천 운남 일대의 웬만한 곳은 다 밟아봤다는 和씨 아저씨... 듣기로 나시족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일 안하고 아편만 피웠다던데, 일찍 바깥세상에 눈뜬 이 나시족 아저씨는 아주 책임감있고 건실한 가장인 듯하다.
처녀뱃사공이 아니라 처녀마부들이 많은 동네....
백수대에 도착하니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향해 마부아줌마들이 몰려든다. 올라가는 길도 좋고 그리 멀지도 않다기에 애당초 말 탈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가 생글생글 웃는 어느 마부아줌마에 꽂혀서... 게다가 단돈 10원이라길래 못이기는 척하고 올라타고 말았다. 허나 워낙 말 타는 것도 안 좋아하고 말잔등에 앉아 등산씩이나 해본 적은 더더욱 없어 사실 좀 무서웠다. 허나 몸이 130도로 제껴지는 비탈을 올라가면서도 말고삐 단단히 쥐고 상체는 힘을 빼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 와중에도 아줌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백수대 아래까지 올라왔다.
나보다 더 들어 보이지만 알고보니 다섯 살이나 적은 이 아줌마는 이미 아들과 딸은 결혼을 시켰고 막내아들은 북경 과기대에 진학을 하여 내년이면 졸업을 한단다. 아들이 북경에서 취직만 하면 자기도 북경 구경 한 번 할 수 있다고 자랑이 늘어졌다.
백수대 위쪽으로 올라가면 물바닥이 다 들여다보이는 수정같은 호수가 나온다.
말에서 내린 곳은 백수대 바로 아래쪽... 바위에 걸터앉아 아들넘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윗쪽에서 유랑극단 배우 같은 차림을 한 할아버지? 아저씨?가 아는척을 한다. 왜 여기 있느냐, 꼭대기 풍경이 아름다운데 자기가 데려다 줄테니 같이 가잔다. (헉, 아저씨가 누군 줄 알고 따라가요?) 자꾸만 치근덕대는 이 수상한 아저씨랑 말 섞기 싫어 딴 데로 가고 싶지만, 아들넘을 만날 수 있는 길목이 여기 뿐인 듯하여 움직이지도 못하니 열여덟 청춘인 양 새침하게 눈을 착 내리깔고 딴청을 피우는데, 혹시 기다리는 게 한국 젊은이 아니냐, 내가 꼭대기에서 만났다 한다. 얘길 들어보니 울 아들이 맞는 것 같은데.... 아니, 그럼 녀석이 말타고 올라온 나보다 더 빨리 올라갔단 말이냐. 엊저녁까지 비실비실하더니 산에 오니 갑자기 기운이 펄펄 나나?
정말 조금 있으니 아들넘이 내려온다. 아들넘 얘기로는 저 아저씨가 좋은 데 보여준다면서 동굴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향을 피우라 하고 돈을 받았다고 한다. ^^
여기가 백수대고...
여기가 사천성의 황룡이다. 백수대는 황룡의 축소판이라고 보면 된다.
백수대에서 내려다본 정다운 마을 풍경
전망좋은 곳에서 싸들고 온 계란이랑 귤 까먹으며 좀 놀다가 슬슬 내려가니 약속시간 전인데도 화선생이 벌써 와 있다. 집에 가서 점심 먹고 한숨 자고 왔단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고 학교 다니고 장가들고...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 길도 자기가 18세 되던 1975년에 트랙터로 밀어낸 길이라 한다. ‘아, 그럼 개띠?’ 하고 한번 찔러보니 '당신도 개띠?' 하며 싱그레 웃는다. 그 다음부터 과묵해 보이던 이 아저씨, 이야기 보따리가 늘어졌다.
우리가 백수대 부근에서 만난 향장사 아저씨는 아이가 다섯인데 다섯째를 낳자마자 계획생육정책이 발표되어 마을 사람들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얘기며, 마부 아줌마는 영리하고 재간이 많아 처녀 때 인기가 무지 인기가 있더니 자기 닮은 아들을 낳아 온동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는 얘기며.... 자기 마눌과는 어렸을 때부터 앞뒷집에서 자란 靑梅竹馬 연인 사이였단 얘기며...
(익지 않은 매실을 따먹고 죽마를 타며 놀던 사이라는 이 단어는 어릴 적부터 키워온 남녀관계를 이르는.. 퍽이나 서정적인 표현으로, 새삼 아저씨의 옆모습을 훔쳐보게 만든다. 표의문자 사용자들은 종종 이렇게 시적인 단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하여 날 놀라게 하더군.)
가다 보니 거지꼴을 한 젊은이 셋이 누운 채로 차를 세우는 흉내를 낸다. 이 마을 이족 청년들이란다. 샹그릴라현으로 취직해 나갔다가 마약을 배워 저 꼴이 되었는데 마약 살 돈 때문에 외지사람들만 보면 강도로 돌변하여 푼돈을 털려고 든단다. 공안이 가만 놔두느냐 하니 모두 한마을 사람들이라 위에서 단속지시가 내려오지 않으면 안 잡는단다.
99년도에 대리에서 들었던 애기가 생각나 운남성 일대에 정말 그렇게 마약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물어보니 운남성의 웬만한 도시, 특히 유흥가 일대에는 매우 광범하게 퍼져 있어 이 마을에도 쭝디엔에 돈벌러 나갔다가 마약쟁이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루를 붉게 물들이며 서쪽으로 가라앉는 저녁노을
'원숭이 앞에서 닭잡지 마라'(애들 앞에선 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는 뜻)는 얘기의 유래로부터 사천 샹그릴라(야딩)와 운남 샹그릴라의 차이점, 좋은 송이버섯 고르는 법, 소학생 때 겪었던 문화혁명 이야기 등등... 우리동네에선 들어본 적 없는 신선하고 즐거운 화제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국적과 민족과 학벌과 경험을 뛰어넘어 이렇게 격의없이 놀 수 있다니... (진짜 내 또래의 남자 친구와 놀고 있는 기분이었다. ^^)
즐거운 이바구에 정신 팔다 보니.... 어느새 샹그릴라다.
아저씨는 훗날 그 많은 손님들 중 나를 기억할까? 나는 이 아저씨가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다. 99년에 우리 기사를 해준 나시족 이씨 아줌마도 참 오랫동안 생각이 났는데.... 암만해도 나시족과 우린 뭔가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벌써 저녁 9시가 다 돼간다. 거의 굶다시피한 점심까지 벌충하려고 어제 봐둔 고성 앞 노아까페에 들어가 호화찬란한 저녁을 먹었다. 놀라지 마시라, 푸짐한 샐러드에 치즈쇠고기 스테잌과 참치스파게티, 생감자 튀김, 그리고 맥주 한병이 단돈 47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