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上海通信(舊)

"중국생활, 고마움만 가지고 떠나요"

張萬玉 2006. 2. 14. 10:22

얼마 전 상하이 교민지에서 일하는 친구가 커피 한 잔 하자 하여 나갔더니 펜과 노트를 꺼내든다.

'Life & Leisure / people' 코너에 오랜 중국생활을 접고 귀국하는 이 아줌마의 소회를 취재하여 싣겠단다. 허걱, 기사꺼리가 부족한가? 나한테까지 차례가 다 오고...

 

친구도 도와주고 나름대로 기념도 되겠다 싶어 인터뷰에 응했는데.... 막상 기사화되어 나온 것을 보니 정말 중요한 포인트가 빠져 좀 서운했다. 지면이 작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기자의 의도가 크게 작용을 한 듯 주로 남편 회사에서 일했던 이야기, 그것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는 이야기, 한국에 가서도 그 경험을 발판으로 계속 일을 하겠다는 이야기... 온통 일 이야기뿐이었다.

(내가 분명히 얘기했잖아... 회사 얘기, 한국학교 얘기, 여행 애기...짧게라도 좋으니 내 중국생활의 중심축으로 이 세 가지를 꼭 다뤄달라고...) 

 

5년 전 '실크로드 기행'을 연재한 이후, 이 취재사건 역시 상해생활의 추억이니 갈무리해두고 싶긴 한데.... 이왕이면 내 맘에 들게 살짜기 손을 봐야겠다(욕심많은 아줌마 같으니라구, ㅉㅉ... 하지만 본문을 최대한 살리면서 미진한 몇마디만 추가할 꺼다.)

 

 

 

중국생활, 고마움만 가지고 떠나요

 

--상하이생활 8년 만에 귀국하는 장만옥씨

 

 

 

8년 만의 상하이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장만옥씨를 만난 곳은 홍징루의 꽃시장이었다. 중국을 추억할 수 있는 기념품을 고르러 온 것이다.

"남편 회사 상황이 가족을 데려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제가 우기고 와서 처음에는 한국사람으로 누려야 할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지요. 게다가 제가 상하이에 왔던 97년은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었거든요."

 

회사의 방침은 먼저 공장을 짓고 어느정도 매출이 발생하여 회사운영이 본궤도에 오른 뒤에 가족을 데려가라는 것이었지만(당시만 해도 중국에 투자했다 실패한 경험들이 수두룩하던 때였으니 중소기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장만옥씨는 당시 중1이었던 아들에게 아빠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장씨네 일가는 시대적 상황으로 거의 10년 가까이 제대로 된 가정을 꾸려오지 못했고 그래서 장씨는 자녀양육 문제에서 이 부분을 매우 중시했던 것이다)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남편과 회사를 설득했다. (사실 장만옥씨 스스로 모험이 고팠던 것이다. ^^)

 

어렵게 떠난 길인데 IMF의 강풍을 만났다고 좌절할 수는 없었다. 웬만한 회사들은 철수하고 대기업조차 상주인원을 줄이는 가운데 공장건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나 최소한의 본사 지원만 있으면 낡은 공장에서라도 일단 시작하겠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장만옥씨도 팔을 걷어부쳤다.  

 

"제가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처음 몇 달간 저희 집을 사무실로 사용했기 때문이었죠. 남편보다 중국어가 조금 나아서 전화받고 면접 볼 때 동참하고.... 그러다 보니 회사에 필요한 문서수발도 하게 되고... 특히 믿을 수 있는 회계를 채용하기가 쉽지 않아 숫자치인 제가 기를 쓰고 출납도 보고 은행도 다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회사 식구가 된 거예요. 그땐 당연히 무보수였죠."

 

"지금은 아마 하라고 해도 못할 꺼예요. 점심은 5원짜리 기름투성이 도시락 먹었죠, 에어컨도 없이 뜨거운 바람 나오는 선풍기에 의지해서 38도 찜통더위를 견뎠죠, 본사에서 엔지니어들이 출장을 오면 호텔비 아낀다고 당연히 저희 집에서 재우곤 했다니까요. 서로 못할짓이었지만 그래도 그땐 오로지 회사를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뭉쳐 제 정신이 아니었죠.'

 

악전고투 1년 반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본사로부터 완전히 자립을 이룬 회사는 2001년에는 4년간 미뤄두었던 사옥을 신축했고 2003년에는 청도에, 2005년에는 광주 동관에 공장을 추가 건설하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장만옥씨는 99년 한국학교 설립에 참가하여 2년간 한국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지만 2002년에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회사 생활은 경제적인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제게 주지요. 그중 가장 귀중한 건 중국인, 중국사회에 대한 이해와 중국생활에 대한 자신감인데 사실 이런 것들은 적지않은 마음고생, 몸고생을 통해 얻어진 거랍니다. 저희 회사 시장의 90% 이상이 중국내수고 저희 사는 동네가 외국인이 거의 살지 않는 동네라 고생을 피해갈 도리가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 고생들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있어요."

 

이런 경험과 탄탄한 중국어실력을 바탕으로 장만옥씨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일을 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다.

"나이가 있으니 경쟁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국과 중국이 교류하는 데 한몫 하고 싶어요. 보수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먼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실력을 인정받을 기회가 오지 않겠어요? 사실 상하이에 주재하는 한국 부인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정말 많아요. 능력있고 의지도 있는 사람들이 타이타이 대접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조건 때문에, 스스로도 점점 그게 '호.강'이라고 믿게 되거든요. 한국에 비해서 훨씬 기회가 적긴 하죠. 그렇지만 귀중한 경험들을 쌓는다 생각하고 양에 안 차는 일이라도 적극적으로 도전해보는 여성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

 

8년 반의 세월이면 기억이 아련할 듯한데 지난 일들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을 하는 장만옥씨에게 "기억력 좋으시네요" 했더니 자신의 중국 생활에는 시간을 묶어준 굵직한 매듭들(회사생활, 한국학교 교사생활, 어학연수, 중국의 삼대휴가를 놓치지 않고 거의 매년 다녔던 여행 등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헤아려보면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온다고 한다.

 

"저는 정말 중국 덕분에 새로운 인생을 살아봤어요. 시야도 넓어졌고 배짱도 두둑해졌죠. 참 중국으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가요. 회사 창업 때부터 같이해온 회사직원들, 친구같은 교수님들과 푸다오 선생님들, 호의로 가득찬 이웃들..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네요."

 

부디 한국에 돌아가서도 한국과 중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잘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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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글씨는 빠뜨린 내용이 불만스러워 내가 완전히 덧붙인 거고... 문장도 쬐끔 손봤어요. 나기자, 이 글 보면 삐지지마~~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