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萬玉 2006. 3. 6. 10:49

드디어 작업의 날이 밝았다.

밝은 날에 맨정신으로 종이산을 바라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모양이지만 우쨌거나 피해갈 수 없는 쓰레기 세례라는 걸 파악한 남편, 양순하게 앉아 종이접기를 시작한다.

30분 정도 잘 한다 싶더니만......아니나 다를까, 종이 눌러놓을 넓은 판대기랑 무거운 물건이 필요하다, 묶어 치우면서 해야 하는데 끈 어디갔냐고 왔다갔다 분주하다. 실무는 나한테 시키고 자기는 manage만 하려는 속셈인가? 접은 게 얼마나 된다고...

 

분명히 저건 SOS 신호인데... 놔둬? 나가 봐?

결국 안방에서 옷장 정리를 하던 마음 약한 아줌마, 못참고 나와서 단순작업에 합류한다. 공공근로 나온 아줌마들 마냥 나란히 앉아서 부지런히 종이를 펴고 접고 하는 양이 정답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이 대목에서 왜 난 '쓰리랑 부부'라는 타이틀이 떠오르냔 말이다. ^^)    

둘이 하니 역시 속도가 난다. 단순노동에도 숙련이라는 게 있는 법... 늦은 점심 전에 꼭꼭 눌러 30센티 높이로 묶은 파지 덩어리 18개를 만들고 청소기까지 돌릴 수 있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버리는 과정인데...

우리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아파트의 4층이라 나 혼자는 죽었다 깨어도 못 버린다. 아니 버릴 수 있어도 시원치 않은 무릎 생각해서 그러면 안 된다. 그런데 재활용품 수거차량이 월요일 아침에만 오니 안 그래도 월요일 출근이 유난히 이른 남편이 이 일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남편이 경비실에 가서 자문을 구한 결과 쓰레기 내놓는 시점을 일요일 밤 11시 이후로 지정받았다. 수거차량 서는 곳이 인도 부근이기 때문에 더 일찍 내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 그런데...어젯밤 남편은 또 술이 떡이 되어 귀가했다. 30분만 자고 일어나 버려준다더니...... 땅이 꺼지도록 코를 고는 사람을 어찌 깨우라는 말인가.

 

오늘 못 내리면 다음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하는데....이번 주에 어머니 기일이 끼어 있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네 시누이 가족들이 모두 모일 텐데 종이충진재 묶음은 베란다로 내놓는다 쳐도 저렇게 거대한 박스가 현관 출입구를 막고 있으면 어떻게 손님들을 맞나... 신발장 문도 못 열 테니 중국식으로 신발은 문밖에 벗어두고 들어오세요, 해야 하나? 

 

쓰레기 버릴 걱정에 잠을 설치다 깜빡잠이 깊이 들었나보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나가보니 에그머니나... 현관이 훤하게 비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이다. 

아니, 어젯밤엔 완전히 혼수상태더니만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일어나 그 많은 박스들을 혼자 다 치웠대?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여 서둘러 종이묶음을 현관 앞으로 대령하고 꿀물 한잔 타놓고 기다리니 운동장 댓바퀴 뛴 사람처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돌아온 남편...의기양양하게 꿀물 한잔 마시고는 다시 종이묶음 절반을 끈에다 길게 주르륵 꿰어 어깨에 메고 계단을 내려간다.

ㅎㅎㅎ

 

쓰리랑 부부의 쓰레기 정복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