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5 : 敎會.....攪會....
'두세사람이라도 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 하리라....'
오랫동안 읽지 않아 정확한 구절을 재생해낼 수 없지만(이럴 때 성서 검색엔진이라도 있으면 좀 좋아?) 아무튼 '교회'의 의미를 묵상하게 하는 이 구절을 글머리에 쓴 이유는 내가 전전했던 조금은 특이한 교회들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겐 좀 지루한 얘기가 되겠지만 그래도 내게는 대학생활의 상당부분(기간적으로는 2/3, 내용적으로는 1/3)을 점했던 중요한 대목이기에 한꼭지만 써보려고 한다.
20년 가까이 다니던 교회를 놔두고 같은방 식구 성희를 따라 S교회에 가게 된 이유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거리가 가깝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가족도 여전히 다니고 있고, 10년지기 친구들과 그 친구 부모님들까지도 매우 익숙한 우리 교회에서 도보로 10분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교회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우연히 한번 갔다가 독특한 교회 분위기, 특히 예배 후의 성경공부에 매료되어 계속 나가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교회는 전체 교인 200여 명 중 대학부 인원이 100명을 넘는 특이한 교회였다. 게다가 장로교 고신파...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대학을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 우선 개척되어 그런지, 그쪽에서 중고등부를 다니다 서울로 유학오면서 같은교단 교회를 찾은 케이스가 대부분이었으며(그래서 소수의 비경상도 출신들의 말투도 교회만 가면 어느새 경상도 말투로 바뀌었다는... ^^) 또한 그중 대다수가 서울대에 재학중이라 대학부 분위기는 매우 학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었다.
교리로 말하자면,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사함받는' 四靈理' 식의 경쾌한 측면보다는 '선택받은 자들의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삶'이라는 경건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보수 중의 골보수(그런데 85년 미문화원 사건 주동자들이 이 대학 출신이었다는 건 퍽 놀랄 만한 일이다)....
따라서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경건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quiet time과 성경공부가 강조되었고, 한창 피가 끓는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성경공부에 열을 올렸다. 성경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주해서와 신학서적이 동원되었고, 성구를 인용하여 모든 토론이 이루어질 정도로 모두들 성경구절 암송에 열심이었다. 실제 생활에서도 청교도적인 경건함의 모범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형제자매'들의 사명감은 실로 깊은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얘기하지만 생활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내가 알고 있던 교회들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성경공부의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린 지금도 아직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성경공부에 열중했던 기억(학교공부보다 더 열심히 했으니...) 그리고 2학년 때 학년 부대표가 되어 전국순회심방에 참여했던 기억이다. 이것도 아마 서울로 유학온 학생들이 방학이면 모두 집에 내려가 텅 비어버리는 이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제도였으리라. 부산에서 시작하여 마산, 대구, 김천, 영주, 광주, 전주 등지를 돌며 학생들의 집을 심방하는 데 꼬박 삼 주 정도 걸린다. 지방이라고는 거의 가보지 못하고 자랐던 나로서는 지금도 어느 지역 얘기가 나올 때 '어, 나 거기 가봤는데...' 하며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그 기억 속에는 S교회의 '전국순회심방'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S교회에서의 '성령충만' 상태는 대학부 소모임에서 시작된 '참된 이웃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한 세미나'에 참가하면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
말이 세미나지 사실은 원서강독이었던 그 모임에서 채택한 교재는 파울로 프레리의 'Pedagogy'(억눌린 자들을 위한 교육학).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단지 '원서'를 읽고 하는 세미나라는 점에 끌려 참가했는데, 열심히 세미나 준비(아마 서울대 아이들 속에서 영어실력만큼은 너희 못지 않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던 철부지의 컴플렉스가 작용했는지도 모르죵)를 하던 나는 얼마 안 가 그 책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당시 이 책이 禁書가 되어 마스터 제본으로 비밀리에 배포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억눌린 자', '억압하는 자'...
'억눌린 자들로 하여금 이 억압을 유지 재생하는 사회 경제적 구조에 눈뜨게 하고, 길들여진 순종의식에서 깨어나게 하여(이것이 훗날 공안당국이 선전해댄, 불순분자들이 순진한 학생 혹은 여공들에게 실시했다는 소위 '의식화'교육의 개념이다) 스스로를 해방시키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
도시빈민 출신인 나로서는 우리 사회의 빈곤과 보이지 않는 억압을 어쩌면 일찌감치 체득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이렇게 구조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확실히 '개안'을 하는 충격이었다.
정작 모임을 시작해놓은 짜슥들은 데모 하느라고 빠지는 날이 더 많아 결국 그 책은 나의 독학 몫이 되었지만, 가끔 '지도'역으로 참가했던 선배는 나를 '기특하게' 보았는지 몇 권의 책들을 더 권해주었다. 이영희 교수의 '偶像과 理性' 과 노동운동가 유동우씨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
이것이 인연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닭살 돋는 이런 표현을 용서해주시길 바란다. 당시 철없는 대학생들이 쓰던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임) 나는 그 선배가 소개해준 야학을 찾아가 '봉사'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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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 얘기로 시작했으니 내친김에 교회와 관련된 얘길 조금만 더 하겠다.
'페다고지 세미나' 팀은 훗날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쪽으로 시선을 돌려 민중신학' 내지 '자유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교회의 성경공부에서 자꾸만 골치아픈 문제를 제기하고 성도들을 '실족'시키는 '문제아들의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긴장이 점점 노골화되고...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뭔가 작은 사건이 있었을 게다.. 결국 완고하고 숨막히는 교회를 탈출한 10여 명은 우리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의탁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교회가 정해지기까지 두어달 동안,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함께 하리라'는 성구에 의지하여 우선은 우리끼리 모여 우리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이름하여 '신등교회'('신림동 등산교회... 그곳은 지금의 신림동 녹두거리 뒷쪽에 있는 한 멤버의 자취방이었는데 가파른 산 꼭대기에 있어서 한번 올라가려면 숨이 턱에 닿을 지경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 )....
산에서 나무가지를 꺾어 한쪽 벽에 십자가를 만들어 붙이고, 우리는 기독교적 외피를 벗고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만이 살아나는 예배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신앙적 실험'에 들어갔다. 돌아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풋내기들의 치기였지만 그 나이 아니면 해볼 수 없고 또 그 나이에 해볼 가치가 있는 정신적 모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앙적 탐구'의 내용은 독자들을 고려할 때 부적절한 포스팅이라는 생각도 들고... 솔직이 지금 정리도 잘 안 되기 때문에 생략)
'신등교회'는 멤버 중 한 사람이 민중신학'을 공부하는 모임에서 알게 된 목사님의 인연으로, 그분이 막 개척한 작은 교회에 힘도 실어줄 겸, 우리가 추구하고자 했던 이념도 실현해볼 겸 기독교 장로회 교단 소속의 작은 교회를 찾게 되면서 해산되었다.
생각해보면 새로 찾은 그 교회도 평범한 교회는 아니었다. 주일예배 참석자가 20명도 채 안 되는 작은 교회에 등록된 전체 교인 70여 명 중에는 작가, 화가, 작곡가, 교수 등 문화계 인사들이 절반 정도나 되었고 예배 분위기나 형식도 내가 익숙한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기도도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즉석에서 하지 않고 사전에 세심하게 기도문을 준비하여 낭독하였고, 가끔 교인 중 한 분에 의해 작곡된 곡을 찬송가 대신 부르기도 했다. 도심의 작은 상가 한 칸을 빌어 본당 겸 목사님 집무실 겸 예배후 코이노니아 장소(예배가 끝나면 모든 의자를 뒤로 밀어놓고 간단한 식사가 준비된다)로 사용되는 공간은 평일에는 유치원, 토요일에는 문화공간으로 동네 주민에게 개방되었다. 마침 학교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던 나는(3학년 2학기였나?) 이 교회에서 유치원 보조교사 겸 교회총무로 6개월 정도 일하기도 했다.
이 교회에 다니던 시기에 나는 개인적인 이유와 맞물려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고 이 교회를 끝으로 교회와의 인연을 끊게 된다(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할 수 있다면....)
지금 생각해보면, 신앙의 핵심은 결국 개인적인 체험인데... 그것을 지적으로 구하고자 했던 과정을 거치며 가슴이 냉랭하게 식어버려.... 결국 모태신앙이라는 본능에 가까운 질긴 신앙심을 끊어내는 것이 더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