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7080-6 : 노동야학의 순진한 음악선생님

張萬玉 2006. 3. 28. 09:31

2학년이 끝나가던 겨울방학.. 세미나에 가끔 나오던 선배의 소개로 야학 교사가 되었다. 

앞에서도 썼듯 다분히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신앙적 동기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현재의 영동백화점 맞은편 이제는 금싸라기 땅이 되어 그 어디서도 '소외된 이웃'을 찾아보기 어려운 그 동네에 '영동야학'이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노인대학이 들어섰다고 들었다)

원래의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컴컴한 단층건물로, 들어서면 칠조차 되지 않아 살벌한 시멘트가 알몸을 드러낸 교실이 세 개....손으로 두들겨 만든 듯 거친 책걸상이 50여 쌍, 칠판과 낡은 풍금, 양철캐비닛....이것이 난로 하나 없이 겨울을 나던 가난한 야학살림 전부였다. 당시는 강남 개발 초기라 (조금 떨어진 학동 부근에) 무허가 판자집들과 소규모 공장들이 꽤 많았고 한강을 건너면 바로 성수동 공장지대였는데, 우리 학생들 대부분은 그 공장들에서 일하는 근로청소년이었다. 

 

방학을 맞아 귀향을 한 교사의 자리를 땜빵하느라 준비없이 급하게 들어갔던 첫 수업...

그날따라 야근하는 학생들이 많아 자리가 많이 비었길래 학생들과 인사도 할겸 첫시간임을 핑게 삼아 음악수업을 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옆반 학생들까지 몰려와 모두 같이 풍금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시간표에는 일주일에 한 번 음악시간이 있었지만 음대 다니던 선생님이 그만둔 뒤로는 그 시간에 제대로 음악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풍금소리에 학생들이 신이 났던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교사 종례를 하는 자리에서 '부임인사'를 하는데 반응들이 영 시원찮았다. 게다가 학생들이 즐거워했던 음악시간에 대해 뜻밖의 멘트가 나왔다. '음악책 편집작업이 진행중이니 당분간은 음악수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쓰던 음악책은 중학생용 국정교과서였는데... 왜 음악책을 편집한다는 것인지? 

편집작업을 해야 하는 것은 음악책 외에도 국어, 역사, 사회.... 이제 방학이 되었으니 매일 오전에 야학에 나와 교재 편집작업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종례가 끝나고 신입교사를 환영하는 벌어진 술자리에서 나는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였다. 말이 환영회였지 교사들은 신입교사는 관심 밖이고 '고시야학'이니 '노동야학'이니 하는 문제로 격론을 벌이느라 정신없었다. 술을 얼마나 무섭게 퍼대는지...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또 얼마나 매운지... 어느새 잊혀진 나는 구석에 쳐박혀 '내가 와야 할 곳에 온 건가?'하는 야릇한 소외감을 되씹었지. '그래,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나도 좀 알아봐야겠다'는 오기와 함께.... 

 

이튿날 세미나에 참석해보니 우리나라 근대사에 대한 학습이 진행중이었는데, 중고등학교 시절 연대기로만 배웠던 한 사건이, 그 사건의 정치경제적 배경, 그 사건 주체들의 (계급적) 성격, 그 사건이 민중들의 (정치사회적) 역량에 미친 영향 등등... 전혀 생소한 틀로 분석되고 있었다.

세미나 준비를 해온 노트들을 보아도 전혀 처음 보는 '창작과 비평' 등 각종 계간지와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의 리스트가 나열되어 있었고, 나에게 참고하라며 권해준 책들도 박현채 '민족경제론',  송건호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전공자들이나 볼 만한 서적들처럼 보였다.

 

조금 생소하기는 했어도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나를 위해 단독세미나도 해주겠다니... 나도 열의를 가지고 그 딱딱한 사회과학서적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는데... 눈 가리고 귀를 막았던 분단시대 교육의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가면서 나는 놀라움과 함께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탐구하려는 열정에 완전히 붙들려 한발한발 '의식화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게' 되었다.

(본문에서 인용부호를 단 것은, 당시에 사용했던 표현, 혹은 시니컬한 뉘앙스를 담은 표현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인용부호 안에 있는 표현에 발끈하는 분이 없으시기를....) 

 

한편으로 공부하고 한편으로는 그 내용을 정리하여 '교과서를 집필하는'... 야심차지만 위험한(!) 작업을 함께하면서도 나의 '시각교정' 내지 동료교사들과의 아이텐티티 형성은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친구들의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근본적(radical)인 사고방식 연습'은 내게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모든 사람들을 계급적으로만 보는' 편향된 시각'으로 보였고.... 나는 늘 토론의 말미에 '사랑이 없는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지론을 펴곤 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다른 주장이나 비판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서슬 퍼런 군부독재하에서는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공자님 말씀... 그 친구들에게 나는 얼마나 순진하게 보였을까.

 

교정이 최루탄으로 얼룩지고 옆에 있던 친구가 개처럼 끌려가던 날, 죄책감과 울분에 술을 마시고 수업을 빼먹거나 술에 취해서 수업에 들어가 독재정권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친구들에게 바른생활소녀는 기본을 지키라고 잔소리를 쏘아대었고(당시에 학내시위가 있던 대학은 불과 두세 개 대학에 불과했으니...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현장에 가본 적이 없었거든), '서울로 가는길', '노동의 새벽' 등 '노동자들의 현실인식을 깨우는 노래'들로만 편집된 음악교재를 만들 때도 왜 이렇게 부정적인 노래만 뽑느냐, 영 삭막하니 '희망의 나라로'나 슈베르트의 '들장미', '그집앞' 처럼 고운 (무계급 무역사 무국적의) 노래들을 절반 정도 끼워넣자고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아직은 내가 '극복'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통일된 인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야학 안에서는 '부화뇌동하여 너무 나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순진한 보수주의자로, 야학 밖에서는 '왜곡된 현실을 보지 못하거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과격한 '주의자'(민족주의자인지, 자유주의자인지, 사회주의자인지.... 도대체 무슨 주의자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막연히 무슨 '주의자'의 윤곽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지 않았나 싶다. ^^) 로 과장된 처신을 했던 모순덩어리... 이것이 당시의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