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소동 1
지난 토요일 평촌에 있는 K학원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전문학원인데, 작년 겨울에 본격적인 한국생활을 계획하면서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을 때 친구 소개로 이력서를 넣었던 곳이었다. 서류심사 통과하고 試講하러 오라는 통지를 받았는데, 귀국일자가 지연된 남편으로부터 중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와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던 곳... 한국에 들어온 다음 한번 연락해볼까 어쩔까 하던 참이었다.
강사 한 사람이 피치못한 사정으로 갑자기 그만두어 급하게 되었다고 꼭좀 나와달란다. 할일없이 빈둥거리며 우울하니 적적하니 타령을 하던 참이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보니 한동안 백수생활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이 잠깐 브레이크를 건다.
중3을 맡으면 수업이 밤 11시 20분에 끝나는데 오이도행 전철이 그 시간까지 있을까.. 머리가 좀 컸다고 선생 머리 끝까지 올라앉으려는 녀석들을 다섯 반이나 맡으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원래는 초등부를 맡기로 했었다).... 망설이는데 한 시간 간격으로 계속 전화벨이 울린다.
그래, 일단 가는 거야! 이 나이에 불러주는 직장이 어디 흔한가?
(학원가에서는 40 넘으면 고령이니 나는 사실 할머니인 셈이다)
일요일에 전임 교사로부터 인수인계를 받고 나니 갑자기 몸과 마음에 시동이 빡세게 걸린다.
'자정 전에 귀가하려면 일단 차부터 한대 뽑아야겠다. 근데 운전대 놓은 지가 10년 가까이 되어 가니, 그것도 심야에 고속도로를 달려오려면 연수부터 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네 시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니 낮에 운전연습까지 하자면 바쁘겠는데? 그렇다고 운동을 빼놓을 수도 없고...
취침시간이 늦어지니 아침 6시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겠군. 그럼 남편더러는 나 깨우지 말고 회사 가서 아침 먹으라고 해야겠군. 블러그는 한동안 접어야겠고... 오늘 일주일치 청소 다 해두고 와이셔츠 다섯 장 다려두고....'
확실히 바빠야... 시간 쓰는 효율이 높아진다. 시간이 적으면 쪼개쓰게 되는 것이다. 직장에 나가게 되면 빡세게 걸리는 tension.... 힘들어, 힘들어!를 연발하게 하는 스트레스의 주범이긴 하지만 이 긴장감이야말로 삶의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리워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가운데 맞물려 돌아가는 소속감이 그리워) 나는 여전히 '소용돌이치는' 직장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어쨌든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때빼고 광내고 출근을 했다.
원래는 네 시에 출근하여 다섯시 반까지 수업준비를 마치고 수업에 들어가는데, 교재 확인도 제대로 안 된 상태라 두 시부터 준비를 시작했는데.... 와, 이거 장난 아니네. '성문기본영어' 하나에 보충으로 연습문제 정도 준비하면 되었던 고렷적 사정과는 비교도 안 되게 할 일이 많다. 한국인 교사는 듣기, 독해, 문법을 가르치는데 110분 수업시간을 잘게 쪼개어,
진도 나갈 독해교재에 대한 단어테스트(40개),
지난 시간에 배운 독해교재의 dictation 테스트,
지난 시간에 배운 독해교재 숙제검사...
그리고 독해교재의 새 진도도 빼고 다른 문법책의 진도도 빼야 한다. 듣기 과목이 든 날도 독해나 문법과 짝을 지어 진행을 하니 바쁘기는 마찬가지... 얼마나 바쁜지 책을 안 가져오거나 지각한 녀석들에게 잔소리 한 마디 할 시간도 없다. (대신 야단의 강도가 높아지는 거지)
수업 진행이 빡빡하다는 것은 그만큼 교사의 준비작업이 많다는 얘기... 수업설계는 기본이지만 각종 테스트 준비, 테이프 시작지점 확인, 숙제검사... 학생별 리포트...
어디 그뿐이랴. 여기처럼 학생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학원에서는 A/S도 만만치 않다.
단어시험과 dictation 결과는 중간 5분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잽싸게 채점을 해가지고 부모님께 보낼 리포트에 기재를 해둬야 하고 다섯 개 이상 틀린 아이들은 나머지공부를 시켜야 한다. 토요일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포함하여 주중에 부족했던 과목의 보충수업.... 게다가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 학교 시험기간에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별로 임시 반편성을 하여 보충수업까지......
수업준비를 하면서 짬짬이 약식 오리엔테이션도 받고 학부모 상담용 자료도 넘겨받고 하다보니 수업시간 임박해서야 간신히 수업준비가 끝났다. 얼마나 바빴는지 저녁은 커녕 물 한모금 마실 여유도 없어 입이 바짝 말랐다. 일주일만 돌리면 애들 상태도 파악이 되고 진도도 익숙해질 테니 점점 쉬워지겠지... 난 이런 긴장이 정말 좋아!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아이들이 나를 동네아줌마 같이 보고 개기면 어쩌나, 싫어하면 어쩌나'였다. 중학교 아이들 가르쳐본 것도 이미 십수년 전의 일이고 우리 애도 다 커버려, 한국청소년에 대한 감은 인터넷 등 매체를 통해서나 잡고 있을 뿐인데 과연 내가 '코드'를 맞출 수 있을지...
그러나 애들은 역시 애들.... 생각보다 순진했고, '선생님 바뀌었으니 단어시험 보지 말자'고 개기는 녀석들이야 있었지만 비교적 수업에 집중해주어 퍽 다행이었다.(첫시간이었으니 그랬을지도... 교실에는 체벌용 몽둥이가 갖춰져 있었음..ㅎㅎ)
준비가 부족했던 건 오히려 내쪽이었다. 한다고 했는데... 역시 학원강의는 처음이라 서투른 구석을 감출 수 없었다(스스로 느낀 거지만 아이들은 더 재빨리 감 잡았을 것이다.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엄청 돌아다니는 아이들... 내색은 안 해도 이미 선생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다).
우예됐든 얼굴이 버얼겋게 상기될 정도의 열강으로 110분짜리 수업 두 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흐미~ 목 상태가 심각하다. 목 안이 부어오르고 마치 구름이 끼어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말할 때마다 수반되는 찢어지는 듯한 통증... 6년 전에 경험했던 바로 그 증상이다.
(길어져서 자릅니다. 이 아줌마... 너무 수다해서 참 큰일입니다. 두 줄이면 될 이야기를...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