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11 : 分手
중국말로 이별을 分手(fenshou)라고 한다. 물론 離別이란 말도 쓰지만 구어체에서는 分手라고 한다. 새김이야 같지만 어감이 더 구체적이다. 잡았던 손을 놓는 것이니까.
손을 놓았을까 놓쳤을까.
나는 처음에 놓쳤다고 생각했다.
학내 시위의 배후조종자로 늘 내부수배 상태였던 애지만 9월 들어 공개수배 상태가 되었다.
살던 방도 빼고 定處하지 않은 상태가 되니 헤어질 때 다음 약속을 하지 않으면 그애가 연락을 해오지 않는 이상 나는 마냥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수배상태 때문에 만나기 어려워진 것만은 아니었다. 이틀이 멀다고 만나던 간격이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멀어지고 점차 두 주일에 한번 잠깐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 만나도 얼굴이 누렇게 떠가지고 얘기도 건성건성... 정신을 어디 빼놓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끝에 어렵게 만났어도 반갑고 기쁘기는커녕 옆에 있어도 옆에 있는 것 같지 않고 닿으려 해도 닿을 수 없는 그 마음이 점점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나는 '너 예전 같지 않다'고 앙탈을 했다. 그애는 '야학일이나 잘 하고 있는 거냐?'고 다그쳤다.
내가 '일은 일이고 우리는 우리'라고 떼를 쓰면 그애는 '네게 그런 소부르조아적 근성이 있는 줄 몰랐다. 실망했다'고 응수했다.
오랜만에 어렵사리 만났다가 헤어질 때 울며 돌아서기를 몇차례 되풀이하다가 결심했다. '상황이 위험하고 일이 바쁜 문제가 아니다....분명히 마음이 변한 거다... 이렇게 의심을 쌓아둔 채로 관계를 계속할 수 없다....확인을 해야 한다. 해보고 아니면 접는다....'
그러나 그 결심을 실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경황없이 헤어지느라고 다시 연락이 끊겼기 때문에...
다시 기다리다 지친 나는 어느 이른 아침, 확실친 않지만 짚이는 숙소를 찾아갔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다. 그곳은 (훗날에서야 알았지만) 그야말로 운이 나쁘면 사형까지 받을 수 있는, 공안당국의 표현을 빌면 소위 '이적단체'의 조직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곳.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애가 내 손을 놓으려고 생각한 것이 어느 시점이었는지.
어쩌면 그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노란 은행잎이 천지를 수북이 덮었던 그날...
경복궁 안의 찻집이었다. 헤어지기를 원하는 건지 확실히 말해달라고 다그쳤지만 그날도 그애는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꼭 지금 해야 하느냐.... 기다려줄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기다릴 수 없다고 했고 그 애는 대답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미 차갑게 닫혀버린 그애의 마음을 느끼지만 그애는 분명히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표를 찍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결국 그애를 정리해버리지 못했다.
未練은 정말 사람을 미련하게 만든다. 그애를 만난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건만 나는 그후로부터 1년을 기다렸다. 피가 마르는 기다림 속에서....
사실 어찌 보면 그애보다도, 그애와 함께 했던 시간보다도, 그애를 기다렸던 고통스런 시간 때문에 그애와의 사연이 이 나이 되도록 잊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 얘길 어디엔가 조금 썼던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크리스마스의 추억' http://blog.daum.net/corrymagic/1482174에 있군그래.
난생 처음 홀로 보낸 대학 3학년 때의 크리스마스 이브.
무신론자가 되고 나니
정말 크리스마스 이브는 별 볼일이 없는 날이 되더군. 그런데 하필 그때가 실연한 지 얼마 안 되어 몸도 마음도 다 아팠기에 식구들과 공유하는
공간조차 힘겨워, 방학을 맞아 귀향한 친구 하숙집에 삼박사일을 숨어있었다.
밥도 안 먹고 불도 안 켜고 청승맞게 누워있는 내 귀에 어느 집
티브이에선가 내일 성탄은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못참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멈추기 위해 이불로 입을 틀어막고... 하하..
뭐가 그렇게까지 슬펐지?? 평생을 두고 그 아픔을 잊지 못할 것 같았는데 세월이 지나니 그 고통스러운 시간들도 아련한
그리움이다.
(흐흐흐...거긴 불도 안 땐 냉골이었다. 웬 궁상!!)
며칠 후 다시 만날 것처럼 헤어진 이후.... 이제나 저제나 연락이 올까 애태우면서 6개월, 어느정도 포기한 심정으로(아니, 현장생활에 적응하느라고 많이 잊었지만 간간이 생각하며) 6개월을 기다렸다. 돌아보면 그 기다림의 시간은 나에게 인생의 쓴맛을 가르쳐준 참 값진 시간이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던가?)
우선 우리의 관계를 냉정하게 돌아보게 만들어줬다.
내가 원한 것은 '그애'였지만 그애가 원했던 것은 ('혁명'의 길에서 고난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 ' 인생의 동반자' 였던 것 같다. 솔직이 우리의 시작은 그애의 구애로부터 시작됐지만 일단 불이 붙은 뒤 그애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나는 '우리가 함께 바라보아야 할 길'이 아니라 '그애'만 바라보느라 정신없었다. 설상가상 그애는 자신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일을 앞에 놓고 비장한 결단을 하고 있는 마당에, 턱쳐들고 앉아 '사랑밖에 난 몰라'를 외치는 이 계집애는 정말 감당이 안 됐겠지. 그렇다고 놓아주기는 아깝고.....
(아까웠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서로 손을 놓친 게 아니라 그애가 내 손을 놓아버렸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열심히 내 길을 가다 보면 언젠가는 한 길에서 만나겠지. 그때 내 있을 자리에 튼튼하게 뿌리내린 모습으로 만나리라....'
망설여왔던 현장행을 결심하고 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기다림은 일단 접었으나 그 다짐만은 처음 들어간 공장의 고달프고 막막한 생활 속에서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 구실을 해주었다.
그런데...
6개월 후 바람결에 그애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애의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구체적인 사연은 밝힐 수 없지만 아무튼 그 1년 동안..... 대단한 조직사건의 핵심인물로 구속되었고, 영향력이 있는 아버지의 수완으로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가문에 걸맞는 여자와 중매로 결혼을 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단다.
할말을 잊었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
그것으로 그애에 대한 마음은 깨끗이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