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13 : '線'을 그러쥐다
아침 8시에 작업이 시작되면 12시까지 4시간, 다시 1시부터 5시까지 4시간.... 하루 8시간 작업이라면 그때 퇴근을 해야 정상이지만 저녁을 먹고 다시 2시간의 잔업을 해야 한다. 여기에 일주일에 세 번은 밤 10시까지 야간작업이 덧붙여지고 선적날짜를 맞추기 위해 한 달에 두세번은 철야작업을 한다. 휴일은 한 달에 둘째 넷째 일요일.... 라인작업이니 누구나 예외는 없다.
그렇게 일을 하면 한 달 후 받는 월급봉투에 찍히는 작업시간은 약 300시간(주당 75시간.... 요즘은 법정 근로시간이-- 토요일 격주근무로 치면--주당 44시간인가?) 그러나 봉급은 (시다일을 했던 내 경우) 5만원을 넘나드는 수준에 불과했으니 가히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이란 말이 선동하는 문구가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라인 앞에는 목표매수와 생산매수를 첵크하는 숫자판이 걸려 조금만 뒷쳐져도 반장의 고함소리가 뒤통수를 치니, 잡담이나 딴짓은 물론 나같은 미숙련공의 서투른 헛동작도 용납되지 않는 강도높은 라인작업은 사람을 완전히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어떻게든 사람들과 친해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나로서는 식사시간이야말로 절호의 찬스인데, 대부분이 파김치가 되어 미싱다이에 엎어져 있으니..... '끝나고 같이 떡볶기나?'가 다 뭔가, 탈의실에서 옷갈아입기 바쁘게 다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없다. 하긴 나 자신도 집에 가면 씻을 새도 없이 쓰러지기 바쁘니....
일하기 위해 깜빡잠을 자고 쥐꼬리만한 월급은 일할 힘을 얻기 위해 입에 풀칠하는 데 써버리고 마는 1980년의 여공들은 정말 인간기계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도 돈 쓸 일 없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면서 거의 손도 안 댄 월급을 고향에 꼬박꼬박 부치는 낙으로 그 힘든 공장생활을 견디는 애들, 그런 생활을 10년 가까이 해온 억척이들을 보면 참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바로 저 힘을 부당한 억압을 떨쳐내고 빼앗긴 권리를 찾는 싸움으로 끌어내야 하는 거지....
활동은커녕 단순노동에 파묻혀 아침이면 퉁퉁 부은 얼굴로 달려나가고 밤이면 세수하다가 코피 터뜨리느라고 바쁜 나날이 석 달가량 지나갔다. 그래도 그 와중에 어떻게든 짬을 내어 라인 사이를 누비고 다닌 덕분에 같이 핫도그(새끼손톱만한 소시지가 주먹만한 밀가루 외투를 입은) 나눠먹을 친구도 생겼고 와끼 박는 누구는 전기실 주임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하는 입방아에도 끼어들 정도로 안면이 넓어졌고... 무엇보다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서투른 시다업무도 손에 익어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면서도 눈은 뚤레뚤레 현장을 돌아볼 만한 여유도 생겼다.
이 정도 적응을 했으면 이제 현장 오기 전에 소개받았던 언니를 찾아봐도 될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위 '윗선'이었지만 그때 나는 '같은 구로공단에 있는, 현장경험 많은 학출 선배'라고만 생각했다. 이미 헤어진 그애와 만나던 시절에 그애가 소개시켜준 '현장에 있는 선배 형'을 통해 얻은 소스를 가지고 찾은 '언니'(공장으로 면회를 간 것도 아니고 자취하는 집을 알았던 겄도 아닌데.... 어떻게 찾았는지 암만 행각해봐도 생각이 안 난다)는 이미 현장생활 3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3교대하는 방적회사의 불규칙하고 고된 노동에도 끄떡없이 이미 현장동료들과 노동법 학습소모임까지 하고 있던 언니를 만나니 소진해가던 힘이 저절로 났다.
언니는 자기 사업장에서 머지 않아 일이 벌어질테니 자기를 계속 만나는 것이 보안상 문제가 될 거라면서 70년대 노동운동의 대명사로 꼽혔던 사업장에서 해고된 경력이 있는 '노출' 활동가를 소개시켜주었는데 놀랍게도 우리 회사, 그것도 나와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애였다(N이라고 해두자).
라인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나는 N을 몰랐지만 N은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학출인지는 몰랐지만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뭔가 냄새가 났다고 했다. (내가 좀 설쳤거나.... 위장에 서툴렀거나. ^^ ) 허나 동지가 생겼으니 이제 뭔가 앞이 좀 보이려나.. 하는 희망을 가졌던 나에게 N은 인근의 다른 사업장으로 옮겨갈 것을 권했다. 자기 사업장에는 활동가들이 이미 충분히 들어와 있고(그랬어?) 다음달쯤에 인근의 대기업 계열기업인 W산업에서 사람을 뽑는데 자기가 알기로 활동가가 거의 없으니 거기서 제대로 시작해보면 어떻겠냐고....
섭섭했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N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내가 주로 어린 시다들을 몰고다니더라고.... 그렇게 처신을 하면 실제로 현장에서 말빨을 세우는 고참미싱사들이 붙질 않는다, 고참미싱사들 가운데는 동거하는 애들이 많으니 꽤 친하기 전에는 사생활을 묻지 마라, 함께 활동할 만한 사람을 발견했어도 '학출' 신분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하고, 그 대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한 자연스러운 시나리오를 짜두어라.... 등등의 요긴한 활동지침들을 꼭꼭 찝어주던 N....객지생활 7년차에 이미 이전 사업장에서 모진 풍파를 겪고 난 그애는 나와 동갑이지만 나와 비교할 수 없는 침착성과 과감함이 몸에 밴 어른이었다. 이후 삭막하던 나의 현장생활에도 낙이 생겼다. 한두 주에 한 번 정도 N의 집에 들러 정보도 교환하고 이런저런 푸념도 해가며 김치찌개 끓여먹는.....
한 달 뒤 나는 계획대로 W산업에 라인검사로 취직을 했고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 기숙사로 들어갔다. 이 회사는 파카를 만드는데 하루 10시간 노동이야 역시 기본이지만 야간이나 철야는 그리 많지 않고 일당도 약간 센 편이고 현장 분위기도 H양행보다 화기애애하여 공원들의 들락날락이 적은...비교적 안정된 회사였다. 여섯 명이 함께 쓰게 되어 있는 기숙사 방도 비닐장판이 깔린 텅빈 공간에 불과하지만 샤워장도 있고 로비에 TV도 있고(여기 모이면 사람들 사귀기가 좋다) 깨끗하기가 대기업의 계열기업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어 '각오했던 만큼' 기숙사 생활이 불편하진 않았다.
W산업에 무사히 안착한 뒤 바빠서 한동안 발을 끊고 있던 N의 집에 갔더니 방문이 잠겨 있고 열쇠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부엌은 어쩐지 오랫동안 사람이 건드린 흔적이 없다. 일전에 자취집을 옮겨야 한다고 하더니 혹시 집을 옮겼나? (짐은 그대로인데?) 혹시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나? 무슨 일이 있어서 고향에 갔나?
궁금해하며 쪽지를 남겼다. 'W산업에 취직됐고 *반 검사로 있다... 이번 일요일은 애들이랑 놀러가기로 했으니 다음 일요일에 놀러오겠다, 그전에라도 시간나면 점심시간에 면회 오든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