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1 : 장흥 키조개 축제 끝자락에서 하룻밤
외국여행이라면 모르지만 국내여행 얘기야 날짜별로 배열하여 주저리주저리 쓰면 좀 뻔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잠깐 머리를 굴려봤지만, 주제별로 정리할 만큼 내용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독특한 구성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다간 따끈따끈한 감흥이 다 식어버릴까봐 그냥 일정 따라 가기로 한다. 어차피 내 여행의 1차기록이니까...
'기대만땅!!!!'이라는 댓글이 주는 부담감은 콱 무시하기로 하고... ^^
5월 7일
일요일이다.
평소에는 같이하는 시간이 퍽 드문 남편을 두고 하필이면 일요일에 출발한다는 것이 맘에 걸렸지만 다행히(!) 남편이 회사에 나가봐야 한다기에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길 떠날 일로 마음은 바쁘지만 여느 일요일처럼 같이하는 운동만은 챙기려고 일찌감치 서둘러 아침운동 나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돌아와 문을 열려던 남편이 호주머니 네 개를 모두 뒤집고 야단이 났다. 평행봉 하는 동안 슬쩍 호주머니에서 탈출해버린 걸까? 평소엔 열심히 열쇠부터 챙기던 나도 하필 남편의 열쇠가 탈출을 결심한 오늘은 열쇠를 집에 두고 나왔네그려.
어디서 빠졌나 체포하고 말겠다고 왔던 길을 되집혀 간 남편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오후 네 시경 서울 송파에서 길동무를 픽업하기로 했고, 거기 가는 길에 여행지에서 읽을 세 권짜리 소설책 빌리러 시누이 집에 들리기로 했으니 집에서 12시 정도엔 출발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준비시간 생각하면 늦어도 11시까지는 집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벌써 10시가 넘었네.
혹시 열쇠를 못찾으면?
열쇠집에 연락해야지.
그런데 열쇠집이 오늘 일요일이라고 일을 안 하면?
잘하면 오늘 못 떠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열쇠집 전화번호가 찍힌 광고스티커를 찾아 아파트 이곳저곳을 헤맨 결과 대여섯집의 전화번호를 확보해놓고 남편을 기다렸다. 평소의 두 배로 운동을 하고도 결국 빈손으로 돌아온 남편....
몇 군데 열쇠집에 전화를 돌려 간신히 문을 열고 나니 어영부영 점심때가 다 됐다. 점심은 또 해멕여보내야지 어째. 잽싸 오징어 한마리 볶아서 낼 아침 먹으라고 남겨놓은 밥에 덮어 나눠먹고 설겆이 하고... 그러다보니 예정보다 한 시간은 늦어졌다.
그래도 떠나는 마음만은 호기롭다.
지금까지 달린 주행거리를 확인하니 1105km. 돌아오면 아마 10000km가 훌쩍 넘겠지?
책 빌리러 가는 곳은 산본이니 월곶IC에서 영동고속도로 타고 가다 외곽순환도로를 타면 되는데 잠깐 딴생각 하다 그만 서해안 고속도로로 빠지고 말았다. 직접 목포로 가버리려고? ㅎㅎ
벌써부터 헤매기 시작하다니.... 정신 바짝 차려야지 다짐하면서 매송IC로 나가니 낯선 들길이다.
그래도 네비게이션과 두둑한 배짱을 밑천으로 처음 보는 마을을 지나 산본으로 찾아들어간다.
그래, 뭐 천천히 간다고 큰일 있겄냐. 헤매면서 가면 배우는 게 더 많겠지. 이렇게 다녀오자구.
예정보다 늦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들른 집인데 신발도 안 벗고 책만 빌려가지고 돌아선다.
판교방향 외곽순환도로에 올라타니 파란 하늘이 넓은 품을 펼쳐 날 맞아준다. 스르르 기분좋게 밟히는 액셀을 따라 내 기분도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하고....
여행의 동반자는 블러그 친구 블뤼멍타그...
이 친구의 중국여행을 계기로 한번 만난 적이 있어 구면이라는데도 남편은 그렇게 스친 인연과 일주일이나 되는 짧지 않은 여행을 떠나는 게 좀 이상한가보다. 허나 이 친구나 나나 별로 낯을 가리지 않는 인종들이고 '여행'이라는 공통된 취미가 있고 게다가 짧지 않은 시간 사귀어온 블러그 친구다. 여행길에서는 초면인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데 뭐. 나이나 취향이나 생활습관이나 가치관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여행을 같이 하다 보면 서로간에 적응하는 법을 저절로 터득하기 마련이다. 늘 익숙한 환경, 익숙한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 나와 다른 사람과 찐하게 부딪치는 것, 그를 통해 견문과 시야를 넓히는 것... 이런 게 여행이 안겨주는 진짜 선물 아닐까?
화려한 싱글답게 이국적인 취향이 은은히 배어있는 그녀의 거실에서 시원한 감식초 한잔 얻어마시고.... 이제 진짜 출발이다. 오후 4시 20분.
이번 여행의 목적 중 첫번째인 '운전연수'(예전에 운전을 안 한 건 아니었는데 중국에 있는 동안 완전히 핸들을 놓았더니 거의 초보수준이 되었다)를 달성하기 위해 운전석엔 내가 앉는다. 경부고속도로를 타다가 논산에서 호남고속도로로 바꿔타고 해가 질 때까지 달리는 동안 초보운전 주제에 운전에 집중 않고 계속 수다를 떨어댔으니 아마 블뤼의 심장이 서늘했을 것이다. ㅎㅎ 그래도 무탈하게 정읍휴게소에 도착한 우리는 출출한 배를 고구마찰떡이란 놈으로 살짝 달래고(오늘의 목적지인 장흥이 키조개축제 기간이라고 하여 위장을 비워둬야 했다) 이제 일몰 후 운전담당인 블뤼가 운전석에 앉는다.
동광주에서 빠져나와 29번 국도를 타고 보성에서 2번 국도로 갈아타고 장흥으로... 가로등도 드문 밤길이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는 순조로웠는데 장흥읍에서 수문항 가는 길이 잠깐 꼬였다. 허나 작은 읍에선 헤매봐야 5분이면 족하다. 친절한 아저씨들이 앞다투어 길을 알려주니까.. ^^
(수문리에 도착한 시간이 8시 30분이었으니 4시간 남짓 걸렸나보다.)
밤바다 같은 어둠을 헤치고 달리는데 알록달록한 불빛과 요란한 밴드 소리가 갑자기 달려든다.
올해 키조개 축제는 5월 4일부터 5월 8일까지였는데 우리가 내려간 날이 7일이었으니 축제의 절정은 이미 지난 시점이기도 했지만 어제 내린 폭우가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우리의 도착시간이 늦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군에서 개최하는 행사 치고 너무 썰렁해 보였다. 그래도 수문리 부녀회원들이 키조개를 요리해 파는 널찍한 간이식당 곳곳에서 각설이 아저씨들이 흥을 돋구고 그 옆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선 7080 오빠들이 "나 어떡해"를 열창하고 있다.
레파토리는 비슷해도 KBS의 7080보다 훨씬 향토색이 짙어 정다운.... ^^
관중이 함께해야 공연은 더 즐거워지는 법.....
다른날에는 어떤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뭐 참신한 것좀 없수?
에그머니나!!
저 아가씨 돌았군... 하고 질겁을 하니 목젖 튀어나온 아가씨(!)가 껄껄껄 폭소를 터뜨리며 사진 찍었으니 호박엿 사란다.
원래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던 키조개가 생산량이 늘면서 국내판매가 가능하게 되자 키조개 홍보 겸 관광수입도 늘릴 겸 시작된 장흥 키조개 축제는 올해로 3회를 맞는다고 했다. 이 기간 동안 키조개는 kg당(8개~14개) 3만원 정도에 살 수 있고(나는 키조개 값이 도시에서 얼마 정도 하는지 모르니 어느 정도 싼지 모르겄음) 무침이나 회, 탕 등은 3인분 정도 되는 양을 3만원 정도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축제 이벤트로 낮에는 키조개를 뻘 속에 숨겨 놓고 관광객들이 직접 캐내가는 체험 행사도 있다는데 우리에게 장흥은 들러 가는 도시였으니 그때까지 기다릴 순 없고.... 기념으로 아무거나 한접시 먹고 내일 아침 일찌거니 이 동네에 유명하다는 철쭉구경이나 잠깐 하기로....
이거이 키조개 무침이라는 거이다. 내 마음 속에 그리고 있던 건 키조개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맛볼 수 있는 회였는데 회무침과 회를 혼동하여 잘못 주문하는 바람에...
아무튼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큼지막한 패각근 맛에 홀려 둘이서 저 한 접시를 게눈 감추듯...
떠나기 전에 수문리 인근의 숙소를 물색해보니 인터넷에 뜨는 전화번호는 오로지 옥섬워터파크모텔. 그러나 이미 방이 꽉 차 있어 우리는 그냥 부대시설(찜질방이지 뭐...)을 이용하기로 했다.
목욕탕은 지금까지 내가 본 목욕탕 중 가장 넓은 듯한데 이상하게 손님이 한 사람도 없어 으시시하다. 마침 욕조 청소중이라 해수목욕이고 약초목욕이고 불가능한 상태. 대강 샤워만 하고 찜질방으로 올라가니 이미 불이 다 꺼져버려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 딱 밟기 십상.
에휴, 첫날밤이 좀 그렇다... 싶었지만 블뤼 말에 따르면 시골 찜질방은 도시의 그것과는 달리 24시간 영업을 하지 않는 곳도 많다니 우짯뚠 하룻밤 누울 곳을 찾아낸 것만 해도 감사할 밖에... 나름대로 비교적 쾌적한 공간을 찾아 몸을 누이니 천리길을 달려오느라 고단했나보다. 바로 꿈나라로 직행.
숙박정보
옥섬워터파크모텔 : 일반실은 3만원. 찜질방은 7000원. 전화번호 061-862-2100.
인터넷에서 소개하는 또다른 숙박업소는 멀지 않은 장흥읍내에 있다.
장흥관광호텔(061-864-7777). 4~5인 가족이 머물만한 넓은 방이 30,000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