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4 : 유채꽃이 없어도 눈부신 청산도
완도에서 청산도 가는 첫배를 타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렀는데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말았다.
배 떠나는 시간이 8시인데 8시 20분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운전자가 완도 구경한다고 시속 40으로 달렸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 역시 (안전운행에 영향을 줄까봐 그랬나) 재촉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유있는 드라이브 뒤에 오는 이 허탈!
하긴 뭐 두번째 배를 탄다고 탈날 일 있나. 두번째 배는 11시 20분에 있다고 하니 우선 항만터미널 근처에서 아침을 먹고 드라마 '해신' 촬영장이나 한바퀴 휙 돌기로 한다.
(청산도 가는 배 시간은 8 : 00 / 11 : 20 / 14 : 30 / 18 : 00 네 차례인데 계절에 따라 변동이 있으니 미리 전화해서 시간을 확인해두어야 한다. 항만터미널 전화번호 061-552-0116)
원래 전복죽은 청산도 가서 먹어보기로 했는데, 인근 식당들이 대부분 아침식사 하기에는 좀 거한 횟집들이고 '전복죽'이라고 써붙인 곳이 딱 한 군데 (영란식당) 눈에 띄길래 그리로 들어갔다.
(어땠냐고 묻지 마시라... 알면 마음 다친다. ㅎㅎ 한 그릇에 만 원 줬다.)
200% 만족한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해신 촬영장으로.... 완도대교를 건너와 바로 나타나는 중학교 옆골목으로 우회전하면 수목원과 신라방 촬영지로 데려다주는 아름다운 숲길이 나타난다.
중국에 살던 사람이 뭘 기대하고 갔을꼬?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최수종과 송일국 사이에서 사진 한장 찍고, 상하이 부근의 江南水鄕이라고 이름 붙은 동네들 분위기를 낸 개울가를 거닐다가 상점에 진열된 비단짐 한번 져보고.... 바로 돌아나왔는데도 벌써 10시 30분.
짜투리 시간 동안 항만터미널에 설치된 컴퓨터 하나씩 차고 앉아 잠깐 블러그에 들어가보니 이런이런... 나 놀러다니는 게 배아팠던 ㅋ모씨가 글쎄 기우제를 지내고 있네그려.
청산도까지 가는 배삯은 5800원, 차를 가지고 가면 19000원인데 운전자의 배삯까지 포함된다.
소요시간 50분.
바다구경 좀 할까 했더니 잔뜩 찌푸린 데다 바람까지 세게 불어 견딜 재간이 없다. 갑판에서 10분 정도 떨다 결국 온돌이 따땃한 선실로 들어가 배깔고 엎드려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청산도란다.
하선하라는 방송을 듣고 갑판으로 나가니 와~~ 확실히 물빛부터 다르다. 이런 걸 에메랄드빛이라고 하던가? 제주도 인근 牛島에서 보던 그 물빛이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드는 야트막한 산자락과 그 품에 안긴 알록달록한 농가지붕들... 섬에 발 딛기도 전에 벌써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블뤼가 물색해놓은 민박집은 은모래가 깔린 멋진 해변을 앞마당에 둔 한바다민박(061-554-5035).... 청산도항에서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지리해수욕장 부근이다. http://minparkzip.com.ne.kr/index.html
나는 '봄의 왈츠'를 한번도 안 봐서 모르는데.... 암튼 다니엘 헤니와 은영, 수호가 민박집에서 묵는 장면을 여기서 찍었다고 했다.
민박집 마당에서 찍은 사진들... 구경하세요(클릭하면 커지는 거 아시죠?)
좌) 민박집 강아지 똘똘이... 얼굴이 잘 찍힌 사진도 있는데 갸우뚱하는 포즈가 이뻐서...^^
우) 민박집이 앞마당 삼고 있는 해변.. 어떤 보석에서 저런 고운 물빛이 나올까.
좌) 멀리 등대도 보인다. 근데 민박집 앞에서 찍은 거 맞나? 제목은 그렇게 달렸는데.. 헷갈림.
우) 이튿날 아침 해변에 나가보니 밤새 쏟아진 폭우로 백사장 위까지 물이 찼다. 왼쪽 중간에 보
이는 초록색 줄은 김을 양식하는 틀(뭐라고 부르는지... )이고 왼쪽 끝에 보이는 것은 이 민박
집에서 빌려주는 낚싯배들이다. 청산도는 '봄의 왈츠'나 '서편제'를 찍기 전에는 바다낚시의
거점으로 이름난 섬이었다고 한다.
내일 폭우가 쏟아질 확률이 매우 높다니 혹시 사진 한 장도 못찍고 청산도를 나오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까봐, 오늘 우선 한바퀴 휘리릭 돌기로 하고 서둘러 민박집을 나왔다. 일단 면사무소쪽으로 나와 함평식당(민박집 아주머니 추천)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당리-- 영화 '서편제'를 찍었던 곳이자 '봄의 왈츠' 마지막 장면을 찍을 세트장이 있는 곳이다.
좌) 청보리밭을 두르고 있는 야트막한 돌담을 끼고 올라가면 8부능선에 봄의 왈츠 마지막 장면에
사용될 장난감 같은 이층집이 나온다. 아쉽게도 유채는 거의 졌다.
우) 정상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해안선이 아담한 바다 보인다.
좌)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본 마을의 모습. 지붕들이 빨강 파랑색으로 유난히 선명한 것은
KBS가 더 좋은 장면을 찍기 위해 마을의 지붕들과 돌담길을 보수해주었기 때문이란다.
우) 저 벤치에 앉으면 위 오른쪽 사진과 같은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은영이와 수호가 놀던 곳이라네.... 나도 덩달아 한컷. ㅋㅋ
두어 시간 있으면 해가 지겠기에 청계리 들러 앞개 들러 권덕리 해변에서 놀다가 신흥리로...
(이곳에도 보길도 보옥리 해변과 같은 갯돌 아름다운 해변이 있었고 두 군데서 모두 일몰시간을 기다렸기 때문에, 지금 돌이켜보면 머리속에 떠오르는 소소한 시추에이션이 도시당췌 청산도인지 보길도인지 엄청 헷갈림).
바람이 몹시 불어 서있기도 힘들 지경이었으나 무던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일몰을 기다렸는데... 바다의 표정을 잡아낸다는 것이 무척 어렵다... @#$%^&^*....
라고 어제 써서 올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사진들이 보길도 것임을 알려주는 블뤼의 메시지가 남아 있네그려.
읔!! 확인해보니 맞다. '일몰은 청산도에서, 일출은 보길도에서' 찍은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보길도 일몰 사진을 청산도 일몰 사진으로 올렸던 것이다. (이런 사태를 예상이라도 했던 걸까.. 바다의 그 심오하고 미묘한 표정을 잡아낸다는 게 쉽지 않다고 앞질러 써둔 것좀 봐라. ㅎㅎ)
강진에서 묵을 때 배터리를 충전해야 했는데 110V를 220V로 바꿔주는 어댑터를 빼놓고 와 완도 읍내에서 하나 샀고... 그 충전이 청산도의 첫날밤에서야 이루어졌으니 당리 이후에 찍은 해변사진들은 대부분 보길도 것이 맞다. 역시 블뤼 눈썰미는 알아줘야 한다.
블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친구가 나의 '機器 사용할 때의 나쁜 버릇'을 상당히 많이 바로잡아 주었다. 게다가 모르는 게 없는 잡학박사. (오죽하면 내가 '블뤼의 잡학사전 100選'을 작성하겠다고 외쳤을꼬). '아이, 그 정도는 사람들 다 아는 거예요.' 하고 손을 내젓지만 나로서는 아주 요긴한 정보들이었기에 열거해본다(나같은 기계치가 계시다면 도움이 되겠기에.. ^^ )
1) 시속 30킬로 이상에서 오버드라이브를 사용하면 엔진수명이 단축된다
내 차를 타자마자 계기판에 O/D on/off 燈이 켜져 있는 걸 보더니 당장 지적해줬다.
나는 그 등이 왜 켜져 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켜진 건지도 몰랐고... 내 차에 타봤을 남편도
'왜 이리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 하기만 했지 그게 오버드라이브 등인 줄은 몰랐는지 주의를
안 했는지... 구입한 지 아마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핸드브레이크를 조작하며 나도 모르게 엄지
를 사용했던 모양이다. 연료의 소비와 소음을 줄여주고 수명을 길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 기
능을 나는 엔진을 마모시키는 데 사용을 했으니... 블뤼가 아니었으면 계속 자동차 발목을 붙
잡으며 돌아댕겼을 것이다.(기계를 사면 매뉴얼부터 챙겨보는 신세대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텐데... ㅜ.ㅜ)
2) 좁은 공간에서 차를 돌리기 위해 후진해서 빠져나갈 때 전륜구동차의 경우는 몸체가 절
반 이상 빠져나간 상태에서는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핸들을 더 이상 틀지 않아도 충분
히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니 마음 푹 놓을 것(당연한 얘기인지 모르나 실습현장에서 이 도
움말은 아주 유용했음. 어, 어디선가 ㅋㅋ 웃는 소리가... )
3) 모든 기계는 켤 때 동력 소모가 가장 많으니 사용을 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면 끄
지 말고 그냥 두는 게 좋다(자동차의 경우는 공기오염을 유발하는 공회전이 문제가 되
니 해당사항이 없긴 하지만).
내가 가져온 카메라 배터리 두 개중 하나는 5년 넘게 사용한 것이라 아마도 수명이 다 된 20분
정도만 쓰면 방전이 되어버려 여행 내내 배터리 절약에 신경을 썼다. 그 절약방법이라는 것
이 안 쓰는 동안 파워를 꺼놓는 방법이었으니...꼭 필요 없는 곳에서 플래시도 터뜨리고..ㅎㅎ
4) 리튬 전지는 니켈카드뮴계 전지보다 똑똑해서 完充이 되지 않았거나 完放이 안 된
상태에서 충전을 하더라도 이전의 충전상태를 거의 기억하기 때문에 전지 수명에 영
향을 주지 않는다. 휴대폰 배터리 역시 리튬전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처음 사용하기 시작
했을 때 완충과 완방으로 메모리를 최대한 키워준 다음에는) 종일 사용하던 휴대폰을 배터리
잔량과 상관없이 충전기에 꽂아서 충전하면 되는 것이다(나는 이 문제를 확실히 몰라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할 때 늘 망설이곤 했었다. 바보... ㅎㅎ)
5) 특별한 사진을 찍고 싶다면 자동 카메라의 수동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라
이 강의는 보길도에서 땅끝으로 나오는 배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손에 잡힐듯
말듯 아물아물하다. 카메라 잡고 부지런히 복습을 해야 할 듯...
내가 찍은 사진들을 품평하는 것을 들어보니 '기록'사진 이상으로 찍으려면 상당한 연구와 실
전훈련이 필요하다는 절실히 느끼겠더군. (솔직이 나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사진찍기에 열광
하는지를 잘 몰랐었다. ^^ )
아무튼 칼바람에 벌벌 떨며 일몰사진을 (블뤼만) 찍고 난 우리에게 한시라도 빨리 필요한 것은 포근한 보금자리와 뜨끈한 국물... ^^ 읍내에 들러 라면과 맥주, 과일을 사가지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민박집에서 김치 한 보시기를 얻어놓고 라면 끓이기에 들어갔는데....
읔, 김치맛이 죽음이다. 남도 땅에 들어와 먹어본 모든 김치가 다 우리를 감동시켰지만 이집 김치맛은 그 중에서도 최고였다. 잘 익은 과일 같은 맛.
내일은 폭우가 쏟아져 배가 뜰지 어떨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루 정도 발이 묶이면 어떠리... 뜨끈한 방에 배깔고 엎드려 읽던 소설책 마저 다 읽어치우면 그뿐이다.
내가 들고 온 책은 시누이의 시댁쪽 조카며느리가 쓴 세 권짜리 소설로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배경 속에서 진로를 모색하던 노동운동가들의 고민과 사랑을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묘사한 작품인데, 아는 사람이 썼다는 점 외에도 내가 시작해놓은 7080을 염두에 두고 이런 이야기가 운동권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에겐 어떻게 비칠까 하는 관심이 발동하여 들고 왔다.
그 당시 '노동자신문'의 기자로 필력을 떨쳤던 저자의 솜씨도 좋지만 실제상황이 짐작이 가는 스토리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 짬짬이 잡았는데도 벌써 두 권이 끝나가고 있다. (장필선 지음 / 필맥출판사 간/난주(주인공 이름) 전3권) 휘몰아치는 바람에 실려온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창문을 때리는 가운데 우리의 밤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