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6 : 海翁 혹은 孤山을 만나다
다섯 시에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눈 비비고 기어나간다. 보길도의 첫태양을 맞기 위해서...
해는 어디서든지 뜨지만 여행지에만 오면 왜 새꼽맞게(이거 충청도 사투린가유?) 일몰과 일출에 집착하는 건지... 물론 풍경이 좋은 곳에서 해가 뜨면 더 아름답겠지만 그보다도.. 이렇게 '보길도 일출' 하고 점 하나 찍어놓으면 훗날의 기억에도 하나의 말뚝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 거다.
어젯밤에는 '길이라도 좋다, 아니라도 좋다'(어느 자동차 광고 카피)를 외치며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 속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던 곳이지만 동트는 새벽에 보니 바닷바람에 촉촉하게 젖은 모습이 퍽 다정해 보이는 예송리 해변 마을.
전망대와 해변에서 쌀쌀한 아침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찍었지만 역시 표정있는 사진을 찍는 데는 역부족...(블뤼는 베스트 5에 꼽을 만한 사진이 여기서 하나 나왔다던데... ㅜ.ㅜ 나는 그리 좋은 사진이 없어 이후 들렀던 송시열 글쓴바위와 세연정, 낙서재 등 사진을 함께 엮어 동영상 파일 속에 밀어넣기로 한다)
화면 오른쪽 아래의 볼륨을 좀 키워주세요..
흐르는 곡은 Beatles의 'Here Comes the Sun'입니다.
좀더 동양적인 음악을 깔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가진 게 별로 없어서서리..
이른아침부터 톳과 다시마를 말리느라고 분주한 바닷가 동네를 거쳐 중리 쪽으로 나와 송시열 글씐바위(진짜 저렇게 표기되어 있음)를 보러간다. 글은 씌었으되 비바람에 씻겨 흔적만 남아 있는 바위가 그리 큰 볼거리는 아니지만 절벽 아래 바다를 끼고 들어가는 길은 일품이다.
숙소로 가는 돌아가는 길에 병원에 가기 위해 배 타러 가신다는(보길도에는 보건소만 있고 인근 노화도에 병원이 있단다) 동네 할머니들 세 분을 태웠다. '이렇게 좋은 동네 사시니 얼마나 좋으세요?' 하니까 '우덜은 옆에 살아두 벨루 안 가. 타지에서들 많이 오데. 놀러온 사람들헌티 찐옥수수나 폴러 갈까.... 지금은 조용혀두 여름이믄 이 길에 차가 나래비랑게. 그런거 보믄 여가 좋기는 좋은 게지.'하신다. 내리시면서는 '집 떠났다구 밥 굶고 다니지 말구... 돈 애끼지 말구 맛난 거 많이 사먹어' 당부하신다. ^^ 자식들은 떠났어도 저렇게 벗들과 어울릴 수 있으니 어쩌면 할머니들에겐 섬 생활이 더 행복하실지 모르겠다.
숙소에 들러 짐을 꾸려가지고 이제는 보길도 섬 중앙에 있는 윤선도 유적지로.....
윤선도가 직접 가꾸고 소일하였다는 멋진 정원 세연정(洗然亭)에 들렀다가 길 건너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洞天石室-윤선도의 독서실)로 갔는데 신발 바닥은 미끄럽고 바위가 좀 험하여 등반은 포기, 다시 차머리를 돌려 시문도 짓고 후학들을 양성했다는 낙서재(樂書齋)로... 그런데 네 채 있었다는 초가는 간 데 없고 아마도 문학기행 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 듯 베어낸 나무 그루터기들만 둥그런 야외강의실을 이루고 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곡수당(曲水堂)도 수풀만 우북하여 약간 허탈.
정치 하던 양반이 이 외진 섬에서 12년을 보냈다니 외롭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마을(부용동) 하나를 통째로 별장지 삼았던 사람이니 객관적으로 보면 신세가 그리 곤고한 사람은 아니었지 싶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호는 孤山보다 海翁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데....
선조 20년, 종3품 관리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윤선도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본관은 해남으로, 해남 종가의 대를 잇기 위해 입양되어 여덟살 때부터 해남에서 자랐다고 한다. 18세부터 26세까지는 요즘 아이들처럼 시험공부를 했고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있던 중, 임금(광해군)의 총애를 입고 세도 부리던 자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하고 부친도 관찰사 직에서 파면되는 현실정치의 쓴맛을 경험하게 된다.
7년 뒤 인조반정으로 복권된 뒤 다시 관직에 올랐지만 유배 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해남에 돌아와 최초의 은둔생활을 시작한 이래 18년의 유배생활과 20여년의 은거생활을 했다고 하니 그의 정치역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던 것 같다.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남인 출신인 데다가 강직한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어찌보면 (내 짐작으로는) 기질상 정치가보다는 문인이 더 어울렸던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보길도에서 보낸 세월은 7차례에 걸쳐 통산 12년이 좀 넘으며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갔지만 결국은 85세에 부용동 낙서재에서 생을 마쳤다. 1635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직의 위급함을 보고 의병을 모집하여 불철주야 배를 타고 강화도로 갔지만 강화도 앞 바다에서 강도(江都)가 침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낙담한 나머지 은둔생활을 결심, 배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는데 항해 중 심한 풍랑으로 보길도에 상륙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야 불운했지만 다행히도 조상이 물려준 재산이 많아 십이정각, 세연정, 낙서재, 동천석실 등을 짓고 온 마을을 온전히 별장지로 삼아 산수자연을 즐기며 75首나 되는 주옥같은 시를 써서 후세에 그 이름을 빛내었으니 문인으로서 그의 신세는 그리 나쁘지 않은 듯.
(요즘으로 치면 누구 같은 양반이었을까 한번 상상해본다. 예술가이면서 정치가로도 입신했고 그러면서도 의협심이 많아 매스컴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하고 돈도 많은 양반이...? ㅎㅎ)
간단히 점심을 먹고 땅끝마을로 가는 배에 오른 시간이 오후 2시 20분...
원래는 땅끝마을의 미황사를 보고 갈 참이었지만 네비게이션 세팅을 대흥사로 맞춰놓았던지라 어영부영하다가 그만 다른 방향으로 들고 말았다. 왼쪽으로는 염전과 바다가 끝없이 이어지고 오른쪽은 붉은 황토언덕.... 푸른 하늘 붉은 땅에 노란유채까지 흐드러지면 참말로 '징'할 것 같다. 77번 국도를 탔으니 꽤 돈 셈이지만 드라이브를 즐기려면 역시 이 길이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30분 정도 달려 대둔사(원래 이름이 대둔사인데 일제 때 대흥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1993년에 절 이름을 원래대로 회복했으나 사람들에게는 대흥사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으며 일주문이나 천왕문에도 대흥사라고 적혀 있다) 입구로 들어서니 벌써 산세가 다르고 공기가 다르다.
신라말에 창건된 이 고찰은 서산대사가 입적할 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함으로써 서산대사의 법맥을 잇는 큰 절이 되었다고 한다.
웅장한 산세를 배경으로 넓직하게 자리잡은 사찰.... 암자를 11개나 거느리고 있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절이다(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놀러왔을 때 한번 데려와볼 만). 특히 계곡을 끼고 들어가는 일주문까지의 십리길....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서 가슴이 벅찰 지경이다(내 사주에 흙이 많다던데.... 역시 나는 '물'보다는 '산' 쪽인 모양이다. ^^)
사실 이 길에 대해서는 흉한 얘길 먼저 들었다.
1981년... 남영동에 붙들려갔다온 뒤에 뼁끼칠 하느라고 잠깐 다녔던 출판사에는 S출판사가 곁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문학동네에서 손꼽히는 출판사로 성장했지만 당시는 이름만 걸어놓은 거나 다름없이 J출판사에 편집 제작 영업을 다 맡기고 있는 처지였는데 그렇게 된 데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었으니...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던 사장님이 대흥사에 머물며 글을 쓰고 있을 때 옷가지를 챙겨가지고 찾아오던 사모님이 이 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 일로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져 날마다 술에 절어 살던 사장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지금이야 그때보다 이 명찰을 찾는 발길이 늘어 그런 흉한 일이야 없겠지만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들이 빡빡하게 들어선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웅장한 두륜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우아한 일주문
분명히 사찰인데 마치 성문처럼 해자와 성벽을 갖추고 있는 게 특이했다.
6년에 걸쳐 경주 옥돌로 만들었다는 천불상을 모신 천불전
이미 날이 어두워져 표충사까지는 못 들어가보고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청신암과 응진전 삼층석탑, 대광명전, 부도전만 대충 둘러본 우리는 해남읍으로 간다. 원래 인근 민박촌에서 머물 예정이었지만 어차피 내일 아침 일찍 목포IC로 들어갈 것이니 이왕이면 남도정식 코스로 여행의 마지막 저녁을 장식하고 그냥 해남읍에서 자는 게 좋을 듯해서....
해남읍은.... 더군다나 우리가 찾아간 천일식당 부근은 너무너무 복잡하고 비좁았다. 해가 졌으므로 핸들을 블뤼에게 넘겼기에 망정이지 내가 운전을 했다면 차 돌리기도 까다로운 막다른 골목에서 진짜 난감했을 것이다.
떡갈비의 원조라는 해남 천일식당... 역시 이 집도 30가지 푸짐한 반찬에 짝짝 붙는 손맛으로 승부하는 집이지만(가격은 강진 해태식당보다 저렴) 감동이 처음만 못한 건 이미 남도정식 패턴에 익숙해진 때문일까? '이렇게까지 안 줘도....' 중얼거리면서.. ㅎㅎ 아무튼 맛나게 먹어줬다.
그런데 블뤼가 일정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직 여덟 시밖에 안 됐는데 이 동네에서 맥없이 있느니 차라리 서울까지 가는 중간 지점의 좋은 곳까지 세 시간 정도 달려가놓으면 어떻겠냔다. 블뤼가 운전을 하겠다면야 나야 좋지.
일단 부안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가 탈 서해안고속도로와 가깝기도 하고, 우리 둘 다 가본 곳이지만 가본 지가 10년 가까이 되니 한번 들러도 좋을 것 같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럼 얼른 일어서자. 출바알!
서해안 고속도로까지 가는 길을 알려준 아저씨...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했지만 덕분에 우린 목포까지 국도를 타야 했다구요. 가로등도 변변히 없는 낯선 길... 난감하더군요.
그리고 고속도로로 한 시간쯤 달렸나? 우리는 부안 들어가는 길을 버리고 변산 쪽으로 직접 빠졌는데 이 길이 또 '대략 난감'이었다. 낮이라면 몰라도 밤에 가로등 하나 없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그것도 산봉우리를 두 개씩이나 넘어가면서.... 블뤼는 진땀을 흘렸나 어쨌나 모르지만 나는 내심 불안했다. 꼭 어둠의 바다 속을 헤쳐나가는 기분이랄까.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환한 네온사인의 꽃밭이 한꺼번에 펼쳐졌다. 격포해변 유원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