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인테리어 2
남편도 잠든 야심한 밤.
일단 액셀을 켜놓고 시작한다.
드자이너 선상님의 예술혼을 짓밟는 한이 있어도 이건 빼고 이건 자재만 좀 싼 걸로 바꾸고...
총액이 이렇게 하면 얼마, 저렇게 하면 얼마....
숫자라면 넌덜머리부터 내는 내가... 참 별일이군.
가능하면 손을 많이 안 대면서도 마음에 들었던 컨셉을 살리는 방향으로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보지만
미적인 상상력이 빈곤하기 짝이 없는 나로서는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멀쩡한 자재를 뜯어낸다는 데 대한 가책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막히면 돌아가랬다고 우선 그럼 가구 껀을 검토해보지.
문제는 아들넘이랑 자취 비스름한 생활을 하던 작년 여름에 구입한 5단서랍장이다.
멤브레인 코팅을 한 사제이긴 하지만 꽤 단단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무엇보다도 푸근한 수납능력 때문에 나의 사랑을 듬뿍 받던 놈이다. 문제는 이놈이 화이트라는 거다.
옹색한 거 감수하고 안방에 들여밀 순 있는데 그럼 암만해도 오늘 봐둔 쌈빡한 붙박이장, 침대와 싸울 것 같다. 세련된 인테리어가 요구하는 어느정도 일관된 칼라감각을 비웃고 있는 요넘...
그렇다고 서랍장에 맞춰 다른 가구들을 화이트로 바꿔가지고 이 나이에 신혼컨셉으로 가랴?
암만해도 안방은 안 되겠고...그럼 이놈을 어디 놓는다?
막상 자리를 잡아주려니 그 넓직하게 느껴졌던 공간들이 갑자기 좁아진다. 이 방도 마땅찮고 저 방도 거부하고... 시트지를 붙여볼까?(왜 리폼 사이트나 블러그가 그렇게 많은지 이제 알겠군)
더 심각한 건 중국에서 쓰던 장식장이다. 내 인형들을 잔뜩 품고 있는 불그스레한 홍목 진열장...
두고 오려다가 중국 살았던 기념으로 모셔온 이넘이 깔끔하고 모던할 예정인 거실 미관을 망칠 것 같다. 그것도 한 넘도 아니고 두 넘이 쌍지팡이 짚고 나서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디.... ㅡ.ㅡ
한 놈씩 각방에 어거지로 밀어넣을 순 있지만 다른 방조차도 나름대로 자기 컨셉이 있고(ㅋㅋ)
장식장들도 본연의 임무를 상실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다고 창고에 집어넣으랴?
그뿐이냐, 이뻐라 안고온 옥돌장도 이 중국의 반란에 합세한다. 아예 중국 컨셉으로 가?
그건 절대 안 되지. 그러면 우리집은 완전히 실버타운으로 변한다.
집에 어디 시니어 가구만 있나? 주니어 가구도 만만치 않다.
아들넘이랑 둘이 살 때 '잠깐 쓰는 거 뭘.....' 하면서 여기저기서 주워온 살림으로 충당이 안 되자 새로 장만한 몇 가지는 인터넷쇼핑에서 주문한 깜찍한 화이트 컨셉이다. 그래서 현재 살림살이는 한마디로 얼룩덜룩 모자이크 살림인데, 이사가면 안 쓰는 거 대강 정리하고 컴팩트하게 살아보려고 벼르고는 있지만 도무지 정리가 안 된다. 남들은 잘도 내놓더만....
사촌형이 10년 넘게 쓰던 주니어장은 이제 그만 내놓아도 덜 민망할 것 같은데, 레인지 다이에 한쪽다릴 걸치고 식탁 흉낼 내던 상판과 TV 올려놓던 장식서랍은 모두 작년산인데...어쩌란 말이냐.
머리를 짜서 적재적소에 잘 두지 않으면 순결한 새 집도 곧 모자이크 살림으로 오염될 꺼다.
그렇다고 정든 시계도 내쳐? 5단 서랍장도 내쳐? 내친김에 눈엣가시 같은 장식장도 내쳐?
(나 지금 제정신이냐?)
이게이게 도대체 무신놈의 고민이란 말이냐. 언제부터 모양 보며 살았다고....
감각 없는 아줌마 소리 듣기 싫어서 그러는 거냐?
그노무 '컨셉'이란 컨셉이 언제부터 생겨가지고 사람 골아프게 만드냐.
암만해도 뭐에 홀렸지...날 사로잡고 놔주지 않는 이 강박관념....
(집 바꾸면 가구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구나)
씰데없지만 피해갈 수도 없는 이 고약한 궁리와 씨름을 하다 잠든 어젯밤...
밤새 꿈속에서 인테리어를 한 결과..
아침햇살과 함께 드디어 영감을 얻었다. 순간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올라 칸칸이 다 정리를 해버렸다.
내일 드자이너 선상님과 만나 의논을 해보면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결론이 나겠지.
결론이 안 나면 싱크 상판만 바꾸고(이건 정말 싫다) 모자이크 살림살이 주무르며 모자이크처럼 세상의 안목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살겠다.
어떻게 할 거냐믄....
ㅎㅎ 비밀이다.
나중에 이사가면 보여드릴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