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군식구 2- 노할머니 VS 친정어머니

張萬玉 2007. 2. 5. 14:03

살다 보면 가족들에게 싫증이 날 때도 있는 법... 하물며 말도 안 통하는 데다 당나귀고집인 양반에게 365일 좋은 낯만 보일 수 있었다면..... 아마 내 등에 날개가 돋았겠지?

웬만한 일은 상대 안하고 넘기는 것으로 술렁술렁 넘어가던 할머니와 나 사이의 '원만한' 관계는 구로동맹파업 사건으로 구속된 남편의 자리를 이러저러한 과객들이 채우면서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와는 잘 지내던 할머니가 '군식구'들과는 잘 지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군식구지만 나는 어엿한 이집 주인'이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한 은근한 텃세였다고나 할까.

 

우선 우리 친정 부모님...

아들넘이 어릴 때는 동네에 노동자복지협의회에서 설립한 탁아소가 있어서 거기에 아이를 맡겼는데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니 친정부모님을 모셔올 수밖에 없었다. 헌데... 사위도 없이 힘들게 사는 막내딸네미 도와준다고 당신들 살림 접어두고 오신 분들이 딸네미 대신 사돈양반 시집살이를 하게 될 줄이야.

 

처음엔 적적한 데 잘 오셨다고 반색을 하시던 양반이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니 '언제꺼정 있을꺼냐'고 하루에도 몇번씩 물어보시고, 그러면 난 민망해 하는 엄마를 달래야 한다. "엄마, 애들이 좋아하는 사람 오면 몇 밤 자고 갈꺼냐 그거부터 묻잖아, 그게 가라는 얘기겠어? 오래오래 있다 가라는 얘기지. 엄마가 그런 소리 듣고 노여워하면 엄마도 노인 다 된거야."  

 

뿐만 아니다. 절묘한 타이밍에 씰데없이 툭툭 한마디씩 던지시는데... 밥상 들어오면 '아들 밥은 앉아서 받아먹고 사위밥은 서서 받아먹는다'고 하시질 않나, 엄마가 할머니 별식이라고 팥죽을 쑤어 드리면 맛난 것만 좋아하면 패가망신한다고 설교를 하시질 않나... 할아바이(우리 친정아버지)는 늘 산에 다니니 저렇게 빨래가 많다고 흉보질 않나(그 뒤에는 세탁기 돌리면 전기세랑 수도세 많이 나온다는 얘길 잊지 않고 덧붙이신다).....도와주러 오신 양반들을 완전 식객 취급을 하시니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

 

이렇게 앞뒤없이 하시는 말씀이야 분별없는 노인이려니.. 하고 귓등으로 들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엄마를 못견디게 한 것은 할머니의 집요한 참견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옛날이야기.  

사실 할머니는 적적하게 지내시다가 말벗이 생기니 너무 좋으셨을 꺼다. 게다가 쌀쌀맞은 손주메누리보다는 싹싹하게 말대접 잘해주는 사돈양반이 더 맘에 드셨겠지. 

좋기도 하고 만만하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친정엄마가 부엌으로 가면 부엌문 앞에 앉아서, 베란다로 가면 베란다로 따라와서 일거수 일투족 참견... 엄마가 좀 쉬려고 누우면 아예 머리맡에 자리잡고 앉아 지난세월의 이바구가 한도 없다. 1890년대에 태어난 이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은 90 고령이 무색할 정도로 기억력도 비상하여 컨디션이 괜찮을 때 들어보면 퍽 재미있는 대목도 있긴 하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그 이야기 폭탄을 맞는 엄마는 눈을 감아도 귓가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쟁쟁 울린다고 괴로워하신다. 노할머니하고만 살았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어른을 모시는 것의 어려움'이 오히려 친정엄마를 통해 무시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결국 나는 할머니를 압박하기로 했다. 엄마가 가시면 대책이 없으니 어쩌겠나.

할머니가 말을 많이 하면 엄마가 아프니까 엄마에게 절대 말 걸지 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벽력같이 내지르니 할머니는 한풀 꺾이면서도 '사람이 어떻게 말을 안 하고 사냐'고 궁시렁대시는 것이 도대체 치사빵꾸라는 낯빛이다.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어쨌든 나는 이 정책을 밀고나가야 했다.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상황을 포착할 때마다 개그夜의 한장면처럼 "할머니, 진짜.... 할머니, 얘기좀... 할머니, 진짜.... 할머니!" 를 집요하게 외친 끝에 이 못된 며느리, 할머니의 말문을 어느정도 막는 데 성공했고 이후 할머니의 수다는 벽과 하는 대화로 바뀌었다.(이 대목은 당시 이 장면을 목도했을 아들넘 생각만 하면 소름이 오르르 돋고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깔끄럽기만 하다.)    

 

허나 이 사건 이후 할머니도 엄마에게 함부로 들이대지 않게 되었고 미안해진 엄마는 팥죽이니 인절미니 더 자주 챙기셨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노할머니와 친정엄마는 영락없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처럼 되어갔다. (내 대신...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