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萬玉 2007. 3. 8. 10:24

오후만 해도 말짱했는데 저녁 무렵 집을 나서보니 예상치 않은 눈바람이 천지를 휩쓸고 있다. 

윗쪽 버스정류장으로 올라가는데 진행하는 방향을 거슬러 휘몰아쳐오는 눈발이 제법 굵다. 가로등 불빛을 무대조명 삼아 음악에 온몸을 실은 무희들처럼 강풍에 몸을 맡긴 눈꽃송이들... 문자 그대로 白雪芬芬이다. 덩달아 feel 받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깊은 밤 깊은 산자락에 쏟아지는 별빛 세례만큼이나 황홀한 백설부대의 습격.

 

멋진 것은 멋진 것이고.... 나는 갈길이 바쁘다. 헌데 산복터널길에서 미림여고 쪽으로 내려가는 악명높은 비탈길을 지나야 하는 버스는 난감하기만 하다. 가는지 서는지 모르게 쩔쩔 매면서, 가끔은 오른쪽 뒷바퀴를 인도에 턱 턱 부딛기도 하면서.....

그래도 가기는 간다. 마치 걸음마를 갓 배운 아기처럼 조심조심 미끄러운 바닥을 확인하면서 한바퀴 한바퀴 균형을 지탱할 수 있는 만큼만... 어쨌든 진행을 하고 있다. 

 

갑자기 어떤 대사가 떠오른다. 너무 오래 전에 봐서 제목조차 기억이 안 나지만, 빌 머레이가 강박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길에 그려진 선이나 벽돌 같은 것을 건너뛰지 못하는 주인공이 용기를 낼 때 하는 말이다. "baby step... baby step...."

남들이 너무나 당연하고 천연덕스럽게 가는 그 길을 왜 그렇게 의심하고 불안해 하느냐고, 야단쳐봐도 소용없고 달래고 설득해봐도 어쩔 수 없다. 자기가 힘들다는데 어떡해.

아기걸음을 떼에놓으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아장아장... 아장아장...

 

빙판에선 천천히.

어쨌든 가긴 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