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뤼와 함께 한 목요일
며칠 전에 올린 '빙판길 아장아장'을 보고 걱정이 되었던지 블뤼가 찾아왔다.
레옹의 작은 연인처럼 찾아온다더니 정말 베고니아를 닮은 카라를 들고 왔다.
우째 찍어야 블뤼에게 칭찬받을꼬? ㅋㅋ
밖에 햇볕도 좋고 오늘은 마침 내가 운동하러 산으로 가는 날이니 동행하자 했다.
늘 다니던 호암사 부근 잣나무숲 코스 말고 최근에 새로 개발한 코스가 있기에 그쪽으로 방향을 정한다.
삼성산 순교자 성지 지나 다산헬스 지나 보덕사 옆길로 빠져 돌산까지... 왕복 두 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길 대부분이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도 숨가쁠 일 없는 착한 산책코스다.
넉 달 동안 중국남부와 라오스, 태국 등지를 떠돌던 얘길 듣느라 언제 개울을 건넜는지 언제 바위를 붙들고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라싸에서 술취한 장족아줌마와 노상방뇨로 친구가 된 얘기에 깔깔대다 보니 어느새 돌산이다.
관악산의 유명한 연주대도 장군봉도 깃대봉도 오봉도 팔봉도 아니지만, 요 아담하면서도 나름대로 동네 정상다운 풍모를 갖춘 돌산은 내가 현재 오를 수 있는 최고봉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숲길이지만 이곳에 오르면 전망이 탁 트여 관악산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동네에 살았던 기념이 될 테니 한장 찍어본다.
제일 멀리 보이는 산이 관악산 옆집격인 삼성산.
저 산봉우리 뒤에 안양쪽 코스에서 만나게 되는 삼막사가 있다.
너무 멀리 보여서 카메라에 잡히기나 할까 했는데 열심히 땡긴 결과...
우리 아파트 옆동네인 국제산장아파트와 우리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름을 바꾼 삼성산 뜨란채.
막상 우리 아파트 단지는 뜨란채에 가려 보이지 않는군. ㅜ.ㅜ
관악산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연주대. 서울대도 한눈에 들어온다.
여잔가? 남잔가? 나이 들수록 남자 같아진다. ㅜ.ㅜ
남자 같으면 뭐 어떠냐. 그냥 씩씩하게 살면 된다.
변해가는 내 모습에 적응하려면 자꾸 찍고 들여다봐야혀. 이왕이면 쌩얼루다가.....
오가는 바람 거칠 게 없는 돌산 봉우리에 앉아 휘날리는 태극기와 함께 세찬 바람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햇살이 좋고 얘기가 맛나니 추운 줄도 모른다. 역시 혼자보다는 함께가 좋다.
세 시 전에 집에서 나왔는데 어느새 날이 저물 기미. 엉덩이에 붙은 흙먼지와 함께 아쉬움을 털어내고.... 귀로는 호암사 옆을 지나 아파트 뒷뜰로 이어지는 길을 택한다. 어느새 노을이 붉다.
냉장고에 있는 대로 청국장에 고등어 구워 밥상을 차리니 꼭 친정 동생이랑 밥 먹는 기분이다. 아무리 적게 하려고 해도 너무 적으면 밑에 깔려서 최소한 두 컵은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도 일주일 내내 혼자 먹으니 며칠씩 먹게 된다고 투정을 하니 압력밥솥은 들이가 허용하는 최대양의 절반은 해야 밥맛이 쫄깃쫄깃 제대로 난다고 한 번에 네 컵 정도 해서 식기 전에 일회분씩 나누어 냉동실에 넣었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으면 갓 해놓은 것 같은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오랜 독신생활의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의욕 없다고 엄살 떨지 말고 그럴수록 부지런히 챙겨라 이거지? 이럴 때 보면 블뤼가 언니 같다. ㅎㅎ
러시아워 피한다고 밤 아홉시까지 놀다 갔다. 참 오랜만에 이렇게 소녀 혹은 아줌마스럽게 놀아본다. 친구 만나도 주로 밖에서, 그것도 쇼핑이나 분위기 좋은 까페 찾는 데 정신팔려 오히려 허물없는 얘기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더 많은 요즈음 한 이불에 발 꽂고 자지러지게 울고 웃던 그시절이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