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미쳤나봐
상해 한국학교 시절부터 꿈을 키워왔다. 아들넘 대학 들어가고 나면 세계 여행을 떠나리라....
그 꿈은 당시 친하게 지내던 로잘린 선생님 http://blog.daum.net/corrymagic/556647 동생이 호주 서부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데 원한다면 얼마든지 있어도 된다는 말로부터 시작됐다.
그림 나온다.
관광지 초입 시골마을의 소박한 게스트하우스....오전엔 동네 중학교에 가서 청강생이 되고 방과후에는 게스트하우스 일을 돕는다. 게스트하우스에 딸린 구멍가게를 봐주며 동네사람들과 놀기도 하고 저녁 장을 보기 위해 지프를 몰고 시속 150킬로를 달려도 무섭지 않은 허허벌판을 마구 내달리기도 한다.
그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6개월 정도 살다 익숙해지면 낯선 동네로 떠난다. 이번엔 남미로... 단기 스페인어 지도를 해주는 민박집이 있다는데 그리로 가서....
이 맹랑한 상상은 꼬리를 물수록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알짱대며 나를 유혹했다. 내 월급 손 안 대고 2년만 모으면 2만불은 넘을 테니 그 시점에서 떠나는 거야. 돈 떨어지고 지쳐 거지어멈처럼 될 때까지 한번 돌아다녀보자(아들넘은 독립하고 남편은 혼자서도 잘하고.... 20년 시중 들어줬으면 이제 휴가 좀 가도 돼잖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2년 정도? 돌아다니다 보면 새로운 지평이 열릴 테니 어쩌면 좋은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여행잡지 같은 데 글을 팔면서 기간을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제2 인생을 시작해봐? (한비야 따라하기?)
땅덩어리 큰 중국에 살다 보니 간뗑이만 커졌나보다.ㅡ.,ㅡㅋ
꿈은 자유지만 내 머리속의 검열관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어영부영 5년이 흘렀는데.....
얼마 전 인터넷을 뒤지다가 발견한 one world ticket이라는 놈이 다시 내 심장에 불을 질렀다.
이 티켓은 여러 항공사가 네트워크를 이루어 세계여행을 하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항공권인데, 이것을 끊으면 서쪽에서 동쪽으로든지 동쪽에서 서쪽으로(계속 한 방향으로만) 이동을 하면서 한 대륙에서 네 번씩(북미대륙에서는 여섯 번)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거다. 따라서 5대륙을 끊으면 20번 비행을 할 수 있다는 얘긴데 티켓값이 375만원이란다.
호기심에 한번 루트를 짜본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그 티켓은 유효기간이 1년이기 때문에 아무리 날짜 계산을 해봐도 5대륙은 무리.... 물가가 비싸거나 영감 은퇴 후 같이 다녀도 될 만한 미국, 서유럽, 호주 등 쉬운 코스는 제껴놓고 3대륙으로 짜자 하고는,
일단 호치민으로 날아가서 육로로 라오스, 태국 북부, 미얀마를 거쳐 인도 북부, 네팔....다시 델리로 돌아와 비행기를 타고(자기가 출발한 대륙은 두 번 이상 못 타게 되어 있다) 스톡홀름으로... 거기서 육로로 덴마크, 체코, 크로아티아, 그리스, 터키, 이란, 이집트... 등등을 육로로 이동, 이스탄불로 돌아와 리스본으로 날아갔다가 거기서 브라질로(마침 그 때는 2월이니 리오축제가 있다. ㅋㅋㅋ) 산티아고로 리마로... 기간이 허용된다면 현지 저가항공을 이용하여 멕시코를 통해 아바나에 들어갔다가 리마로 돌아와 서울로 돌아온다..... 음~ 환상이다!!
루트짜기에 꽂혀 이박삼일 식음을 전폐하며 완성시킨 스케줄 초안을 남편에게 내밀었더니...
"드디어 쌈지돈 푸는 거야?" 하면서도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과격하구만. 한 군데 가서 두어달 있다 들어오고 다시 나갔다가 한두달... 그러면 안돼?"
"그러면 돈도 많이 들고.... 재미도 없단 말야. 두어 번 하고 나면 뻗치던 기가 다 사그라들껄. 내가 맨날 주문 외우고 살았던 거 당신도 알지?"
"..........."
말문이 막힌 남편, 허허 웃더니 "그럼 더 늙기 전에 다녀오든지...." 한다.
에궁.. 이 대목에서 '이 여편네가 정신 나갔나?' 하면서 벌컥 화를 내든지 몹시 삐져야 내 戰意가 활활 타오를 텐데... 의외로 선선하게 나오니 김이 팍 새면서 내 머리속의 검열관이 활동을 시작한다.
너 관절도 안 좋다면서 일년치 살림 어떻게 지고 다닐래?
일년을 버티려면 싼 데 찾아다녀야 하는데.. 먹고 자는 문제 해결하려고 헤매다 아까운 세월 다 보낼껄?
아마 석 달이면 감각도 무뎌지고 체력 딸리다 보면 감정도 메마를 꺼고... 아마 매너리즘에 빠질껄?
너 스페인어 할 줄 알아? 이란 말 할 줄 알아? 현지 사람 못 사귀면 여행 뻔해지는 거 몰라?
근데... 너 왜 가려는 건데?(루트를 짜다 보면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다)
진짜, 난 왜 가려는 걸까?
유적지나 경승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겠다는 욕심은 분명 아닌 것 같다.
사진도 있고 인터넷도 있고... 정 직접 보고 싶으면 패키지를 이용하면 훨씬 싸고 효율적이다.
세계일주를 해냈다고 뽐내고 싶은 것도 아니다.
돈 있고 시간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세상인데 자랑거리도 안 될뿐더러 그거 자랑해서 뭐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 이유도 없지 않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럼 왜?
그건 나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건 길 찾아다니기 / 낯선 동네의 전모 파악하기 / 낯선 말 배우기 / 낯선 사람과 사귀기
우리 아버지가 백말띠셨다. 말년에 자리보존하고 누우실 때까지는 참 쉬지 않고 돌아다니셨다. 게다가 돈들여 힘들여 좋은 곳에 가셔도 정작 그곳에는 관심이 없고 오가는 과정을 더 즐기시는 듯하여 늘 우리를 어이없게 만드셨지. 근데 내가 아버지를 꼭 닮은 것 같다. 이 설레임은 驛馬煞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왜?'냐는 질문은 무의미할 뿐이다.
나이 오십에 세계여행?
일에 짓눌려 있는 남편과 진로 고민에 짓눌려 있는 아들은 뒤로 한 채?
한 친구는 그러더군. 남들이 들으면 십중팔구 남편이 외도를 했구나... 짐작할 꺼라고.. ㅎㅎ
그럴 꺼란 생각은 못해봤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가족을 유기하는 행동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그래도 내 심장의 불은 꺼질 줄을 모르는데....
일단 한 두 군데만 가볍게 시도해볼까?
내년까지만 미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