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길(~2014)/재미·취미(쓴 글)

Godot를 기다리며 잘들 놀더군

張萬玉 2007. 7. 2. 13:25

벌써 일주일 전 얘기다. 간만에 주부 노릇 하는 데 정신 팔려 블러그질이 뒷전으로 밀리다 보니...

 

국립극장에서 하는 연극표가 몇 장 있는데 같이 보자는 블뤼양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게 '고도를 기다리며'의 경극버전이란 얘길 듣고는 고맙지만 사양했다. 경극버전이라는 건 조금 솔깃하지만, 원작이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그 유명한 부조리극 아니던가. 영문학 전공자도 아니고 아니고 연극배우 지망생도 아닌 나로서 그 기다림에 동참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헌데 옆에 있던 아들넘이 대만극단이란 얘길 듣고는 자기가 가면 안되냐고 한다.

 

다녀온 아들넘이 나 주려고 남겨놓은 표 두 장을 가지고 왔다. 내일이 마지막 공연이니 웬만하면 한번 가보라고 한다. 너무 재밌어서 혼자 보기 아까웠다나. (그~래?) 마침 일요일 오후로 예정하고 있었던 다른 일의 진행이 흐지부지되길래 지루한 연극에 초대해도 불평하지 않을 J를 불러냈다. 비가 몹시 내리는 오후에 남산길을 걷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즉 연극에는 큰 기대가 없었단 얘기지)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난 후에도 한동안 캄캄하던 무대는 얼후(?)의 청승맞은 연주에 맞춰 서서히 밝아지고 그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두 사나이가 걸어나온다. 너덜너덜한 거지 복색이다. 무대장치라고는 거꾸로 매달린 나무 달랑 하나 뿐. 흠, 이것이 인간들이 처한 부조리한 실존상황이라 이거지....

줄거리는 뭐 달리 얘기할 필요가 없겠다. 누군지도 모르는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면서 찧고 까불고 주리를 트는 얘기니까. 안 그래도 외면하고 싶은 삶의 부조리함을 더 감상해봐야....^^

딱 하나 맘에 든 것은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름다운 중국어....

 

'고도를 기다리며' 우싱구어 버전

살짝 졸기 직전에 1막이 끝나고 우리는 자리가 비어 있는 맨 앞줄로 이동하기로 했다. '리어왕'에서 1인10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는 우싱구어(吳興國) 연기의 진면목이 가까이에선 더 잘 보일까 싶어서였다(이 연극에서 이 양반은 각색, 음악, 감독, 연출, 연기까지 1인5역을 했다고 한다).

 

 

 

과연.... 이 연극은 소극장에서 봐야 하는 거였다.

손짓 몸짓뿐 아니라 섬세한 표정연기까지 읽히는 앞자리에서 우리는 1막과 똑같은 포맷으로 진행되는 2막 속으로 완벽하게 빠져들어갔다. 여전히 뒷자리를 고수했더라면 1막의 복습처럼 느낄 뻔했을껄.

현대경극이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동작, 춤사위, 대사의 어조 등이 바로 경극의 그것이었고.... 특히 음악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원작의 원칙 때문에 경극에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악기 연주를 모두 口音으로 처리했다. 중국어의 멋과 맛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대목이다. 

극단 '當代傳奇劇場'은 주로 서양의 고전들을 번안하거나 고대 중국 전설 혹은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중국 전통극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한다더니.... 과연 독특하고도 창의적이다. 훌륭하다!  

우리네 각설이 못지않게 신명나게 놀아제끼는 그들의 흥겨운 놀이판에 휩쓸려 지루하고 답답한 삶의 부조리는 어디로 다 날아가버렸다. ^^

 

 

 

 

돌아가는 길

여흥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택시버전...을 감상하게 됐다. ^^

저녁 먹으러 이동하던 택시 안에서였다.

일단 창문 아래 부착된, 마치 장애인을 위한 손잡이처럼 크고 화려한 대형 손잡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 이거 아저씨가 일부러 붙이신 거예요? 특이하네요."

"그것뿐이 아닌데요. 보실래요?"

그러더니 의자 아래쪽과 천장에서 화려한 파란불이 번쩍번쩍, 계기판 쪽에서 오색 무지개가 번쩍번쩍...

 

"혹시 40대신가요? 음악 좋아하세요? 팝송? 가요?" 

바로 음악 나온다. 'Please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바닥을 쿵쿵 울려대는 게 내 우퍼 스피커가 울고갈 지경이다.

우리가 기본요금 거리에서 내린다니까 이 아저씨 초조한지 절반도 안 돌아간 음악을 바꾼다.

이번엔 'Indian Reservation'이다. 안 그래도 신나 죽을 판인데.... 즐거워 미치겠군. 

"Cheroky People~ Cheroky child~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신나게 합창을 하는데 벌써 다 왔다. 내리고 나서 보니 회사택시다. 띠용~

머리도 희끗희끗한 분이 꽤 특이하시군.

인테리어에 들어간 돈이 적잖아 보이는데.... 마누라가 속좀 썩겠다. ㅎㅎㅎ

인간은 참 독특한 동물이다. 신명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올지 안올지 확실치 않은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맥 놓고 앉아있지 말고 부지런히 놀아줄 일이다. ^^

 

뒷얘기

창신동 뒷골목의 티벳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흔치않은 외국음식은 삐까뻔쩍한 레스토랑에서 적잖은 거금을 내야 맛볼 수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 동네 식당들은 허름하고 가격도 싸다. 그 나라 현지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고 손님들도 대개 고국의 음식이 그리워서 찾아오는 외국인 노동자나 보따리 상인들이다.

비가 몹시 내리는 일요일 저녁인데도 식당은 손님들로 꽉 차 있고 한국말이 유창한 쥔장 아저씨를 비롯하여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서빙 아줌마, 한국말이 전혀 안 되는지 깊은 눈에 미소만 가득 담은 서빙 총각.. 낯선 땅에서 돈 버느라고 모두모두 분주하다. 이들도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