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8개월 동안 전두환정권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탄압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도 못지 않게 격렬해졌다.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은 독재정권에 맞서 노동자정치투쟁이라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조직적으로도 서노련은 노동현장에 뛰어든 대학생출신과 의식화된 선진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활동가조직이었다. 이름하여 선진노동자 조직 또는 노동자대중 정치조직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학습과 투쟁활동을 병행하는 소모임 및 이들 소모임의 학습과 활동을 지도하는 활동가조직을 포괄하고 있었다. 인천지역에서도 인천노동운동연합이 결성되어 서노련과 공동활동을 전개하였다.
마침 야당과 재야세력이 결합하여 추진하는 직선제개헌투쟁의 공간 속에서 형성된 노동자 정치투쟁의 대열은 반독재정치투쟁 대열에서 대학생 세력과 더불어 가장 전투적인 반독재투쟁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서노련신문>이라는 기관지가 제작되었고 노동자 밀집 주거지역에 배포되었다. <서노련신문>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투쟁만이 아니라 반독재 정치투쟁을 넘어 노동해방, 민중해방이라는 사회주의 정치사상을 공공연히 선전하는 등 노동운동 세력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는 선진적인 노동자들뿐 아니라 대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정치노선, 조직노선을 가다듬어가면서 한편으로는 선전활동을 강화하였다.
한편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이 고양되어가는 반대 측면에서는 노동운동 내의 정치노선, 조직노선을 둘러싼 내부적 논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내가 첫 구속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을 때 심상정이 중심이 되어 서노련 핵심인물들과 석방자들이 참가한 서노련 내부 토론모임이 있었다. 수개월간의 서노련 활동을 평가하고 서노련의 정치노선, 조직노선, 활동방향을 재정립해보자는 취지로 조직된 이 13인 토론모임은 훗날 보안사 요원들의 습격을 받게 된 잠실아파트에서 수일간 진행되었다.
모임을 통해 특별히 결의된 내용은 없었지만 혁명적 노동자정치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전제로 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검토되었다. 토론과정에서는 심상정의 독선적인 조직운영에 대한 비판도 가차없이 제기되었다. 불과 8개월 동안 노동운동의 질적 수준이 달라져 있었고 노동운동의 장기적 목표와 당면과제도 달라져 있었다. 구로동맹파업으로 해고된 현장노동자들 중 일부는 어려운 경제환경 속에서도 서노련 활동을 통해 반독재정치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었고 그들은 급격히 변해가고 있었다. 이 모든 현상들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노동현장에 뛰어들었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개선을 추구한다는 나의 생각은 자유주의적 휴머니스트, 조합주의자, 경제주의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아내가 구해다준 비합법 유인물들을 읽으면서 나는 본격적인 이론학습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내가 첫 번째 석방에서 두 번째 구속 전까지를 ‘50일간의 화려한 외출’로 부르는 까닭도 바로 이때의 충격 때문이다.
5월 3일 인천에서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정치권의 직선제개헌투쟁과 연계하여 수도권의 학생, 노동운동 등의 재야세력들이 총결집한 이 시위는 주안성당을 근거지로 시가전이라고 할 만큼 격렬한 양상을 띄면서 종일 계속되었고 거리는 온통 돌, 화염병, 지랄탄으로 뒤덮였다. 기동경찰도 원거리에서 페퍼포그차로 최루가스만 뿜어대며 일진일퇴를 되풀이할 뿐 시위대에는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시위대열의 선봉에서 가장 전투적으로 투쟁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조직된 노동운동 세력이었다.
5.3 인천시위는 전두환 정권이 시위 주도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는 빌미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을 통해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가운데 노동운동, 학생운동, 재야세력의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진행하였다.
<서노련신문>은 국군보안사의 행태를 폭로하는 기사를 수회에 걸쳐 게재하면서 군사독재 타도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당시로는 국군보안사령부를 문제 삼는 것은 금기중의 금기여서 그랬는지 가장 먼저 <서노련신문>팀이 보안사 수사팀에게 연행되었다. 극히 은밀하게 활동하였지만 인쇄소에서 꼬리를 밟혔던 것이다.
<서노련신문>팀의 연행소식은 먼저 나에게 알려졌고 나는 이 사실을 바로 김문수 선배에게 전했다. 김문수 선배는 이봉우 사무국장도 연락이 안 된다며 사무국장의 자취방으로 가서 방안에 있는 문건들을 정리하였다. 이어서 우리는 서노련의 사무실로 쓰고 있던 잠실아파트로 향했다.
잠실아파트에 들어선 지 몇 분도 안 되어 초인종이 울렸다. 수사기관원임을 직감하자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혜경과 내가 나서서 막기로 하고 문을 잠근 뒤 집안의 서류를 태우기 시작했고 김문수 선배는 베란다를 통해 5층 옥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옥상에서 격투 끝에 붙잡혔으며 우리도 베란다 창문을 깨고 들어온 기관원에 붙잡혔다. 우리는 질질 끌려나가면서도 이 불법연행을 알리기 위해 군사독재타도의 구호를 외치고 저항함으로써 최대한 시간을 지연시켰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강제로 차에 실린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한참을 실려갔다.
그곳은 송파 보안사 부대였다. 차에서 끌려내리자마자 몽둥이와 구둣발이 빗발처럼 쏟아져들어왔다. 연행과정에서의 저항에 대한 분풀이를 하며 먼저 기를 꺾으려는 듯했다. 30분도 넘게 지속된 몰매 후 우리는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각각 다른 방에 감금되었다.
제일 먼저 지하실로 끌려간 것은 김문수 선배였다. 동지들의 비명소리는 실제로 가해지는 고문 이상으로 고통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김문수 선배의 비명소리는 몇날 며칠 계속되었다. 이들은 간첩을 고문수사하는 전문가들 아닌가.
때리고 매다는 고문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가장 고약한 것이 물 먹이는 고문이다. 드디어 나도 한밤중에 지하실로 끌려가 고춧가루물을 먹게 되었다. 상대방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지하실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져 의자에 묶이면 물수건이 얼굴을 덮는다. 이어 머리가 뒤로 제껴지고 입으로 코로 고춧가루 탄 물이 쉴 새 없이 들이부어진다. 처음엔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아보지만 고춧가루 물이 폐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고통은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자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말았다. 그러면 잠시 그쳤다가 다시 반복하기를 몇 차례. 결국 내가 완전히 항복하였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들은 나를 물고문실에서 꺼내주었다.
나는 정말로 항복하였다. 석방된 지 50일 밖에 되지 않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별로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박노해, 심상정의 은신처를 알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김문수 선배는 끝까지 고문에 버티면서 그들의 은신처를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지옥 같던 10여 일이 지난 어느날, 우리는 갑자기 온수목욕에 바셀린 마사지까지 받은 뒤 차에 실려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행방불명된 가족을 찾아 수소문하던 가족들이 송파의 보안사 분실 정문에 매달려 자식과 남편을 살려내라며 난리법석을 쳤다는 얘기를 훗날 아내로부터 전해들었다. 군 수사기관인 보안사가 민간인을 연행하고 고문수사한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의 급습을 받자 우리를 서둘러 경찰 쪽으로 넘긴 것이었다.
우리가 옮겨진 곳은 장안동 대공분실이었다. 장안동에서 고문은 없었지만 역시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추가적인 조사는 없었고 다만 보안사에서 넘겨받은 자료를 근거로 다시 조서를 작성할 뿐이었다. 고문으로 심신이 피폐해졌던 나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순순히 조사에 응했다. 그리고 다시 각 경찰서로 분산 수용된 후 며칠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가족 면회가 허락되었다.
아내를 보자 눈물부터 터졌다. 아내에게 운동을 포기하고 조용히 살겠다고 했다. 고문에 굴복한 인간이 어떻게 운동의 대의를 끝까지 지켜나갈지 자신이 없다고... 맞아서 피멍이 들고 퉁퉁 부은 얼굴에도 놀랐지만 나의 그런 나약한 말에 아내는 더 놀란 듯했다. 그러나 아내는 살아서 만났으니 이제 됐다고, 마음 굳게 먹고 건강이나 잘 돌보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검찰로 송치되면서 대기 유치장에서 김문수 선배와 서노련 관련 구속자들의 얼굴을 잠깐 볼 수 있었다. 그 잠깐의 순간에도 가장 극심하게 고문을 당한 김문수 선배는 ‘동지들, 용기 잃지 맙시다!’ 하고 외치며 우리들을 격려하였다.
구치소로 이송된 뒤 고문으로 망가졌던 심신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검찰에서 다시 조서가 작성되었는데, 첫날 검찰조사실에 들어가니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면회라고 했다.
세 살박이 아들은 내 손에 채운 수갑이 이상했던지 계속 두리번거리다가 면회가 끝날 때쯤 아빠하고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며 울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검사는 왜 검찰조사실에서 가족과의 특별면회를 허락했을까? 아마도 보안사의 고문수사가 문제가 되고 있으니 그 불똥이 검찰까지 튀지 않도록 배려한 듯하다.
5.3 인천사태 이후 서울구치소는 노동운동가, 대학생, 재야인사로 완전히 만원상태였다. 수감된 운동권 인사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옥중투쟁은 힘을 얻었고 여기에 일반 재소자까지 가세하여 자주 교도소당국을 궁지에 몰아넣곤 했다. 재소자의 생활조건개선 투쟁과 반독재정치투쟁을 결합하니 일반재소자들이 반쯤은 재미삼아 철창 두드리는 투쟁에 참여했다. 그 정도로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은 국민들 사이에 일반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되자 교도소당국은 급히 강경정책으로 전환, 교도소 내 폭동진압의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미리 점찍어 두었던 옥중투쟁 주동자들을 끌어내 손과 발을 꽁꽁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지하 독방에 감금한 뒤 운동도 면회도 중지시켰다. 단식자들에겐 강제급식을 시켰고 철창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방에서 끌어내 지하 특별방에 감금시켰다. 밖에서 가족들이 항의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동안의 파동 이후 강경조치는 다시 단계적으로 완화된다. 교도소 당국도 오랜 경험을 통해 지나친 강경조치의 지속은 더 큰 사고의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옥중투쟁과 더불어 법정에서는 보안사의 고문만행을 폭로하는 또하나의 반독재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고문에 굴복했던 자신을 비하하며 운동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던 마음의 상처는 완전히 씻겨나갔고 운동에 대한 의지에 오히려 더 단단한 새 살이 돋아오르는 듯했다.
첫 번째 구속에서 석방된 뒤 다시 구속되기까지의 ‘화려한 외출’기간 중 받았던 정치적 자극은 감방에서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안양, 부산, 대전, 청주교도소를 전전하는 동안 나는 마음을 다잡고 독서에 더욱 몰두하는 한편 후배들과의 토론을 통해 당시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운동권의 다양한 이론논쟁에도 귀를 귀울이면서 기존에 나름대로 가져왔던 나의 생각들을 수정해나갔다.
감옥은 바로 학교였다.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는 소설책 읽을 시간 내기도 힘든데 감옥에선 운동시간 외에는 대부분을 독서로 소일할 수 있으니 공부하기에 이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 있을까. 일본어로 된 경제학사전과 철학사전을 끼고 앉아서 역사서를 포함한 각종의 사회과학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휴머니스트로서의 노동조합주의자 내지 기껏해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해왔던 나는 어느새 유물론자이자 혁명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가로서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가능한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으니 낭만적 휴머니스트를 크게 벗어나진 못한 듯하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객관적 현실과 실천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유물론자로서의 기본적인 사고틀은 확고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였다. 하루에 두 차례 좁은 운동장을 수십 바퀴씩 뛰어서 돌았고 벽치기 테니스와 평행봉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며 밤에는 반 평도 안 되는 방에서 요가와 체조를 했다. 밖에서보다 훨씬 규칙적으로 생활한 덕분에 출감할 때는 훨씬 건강한 모습이 되어 교도소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원래의 불규칙하고 자유분방하던 생활습관이 이후 규칙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이때의 단련 덕분이다.
1986년초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폭로되면서 반독재투쟁은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고 넥타이부대와 택시 운전사들을 필두로 한 일반시민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는 6·10 항쟁으로 발전해나가기에 이르렀다. 상당수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것은 6·29 선언이 있은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나는 청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는데, 석방과 동시에 우리 청주교도소 출감자 일행은 단체로 버스에 올라 연세대 이한열 학생 장례식장으로 직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