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길(~2014)/일상

해가 저문다

張萬玉 2014. 12. 24. 12:18

하루의 해가 저물고 한 해가 저물고 우리의 인생도 저물고......

 

나의 삼십대 초반을 함께 했던 경태가 갔다.

신해철이 가던 날 백산서당 이범 사장이 갔고, 그의 영안실에서 경태씨가 대장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얘길 들었다.

전화를 해봤지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대장암은 비교적 쉬운 암이고 수술까지 받았으니 어떻게든 쾌차할 수 있겠지,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겠지 했는데......

 

출판사를 그만둔 뒤 중국에서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인연들로부터 소원해졌고 백산서당 식구들과도 연락이 끊겼지만

그와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마주쳐 전화번호를 주고받기도 했고 이후 그가 어찌 찾았는지 내 블러그를 방문하기도 했다.

Purple Haze라는 아이디였다. (아, 이 아이디조차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전화번호와 함께 떠 있는 그의 상태메시지는 유럽의 어느 묘지였다.

YTN 부고 기사에 의하면 직장암 판정 받고 1년 가량 투병했다니, 그런 싸인들은 그의 암 선고와 상관이 없긴 하겠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이 그의 어떤 예감과 연관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친다. 그가 홍대 집필실로 놀러오라고 할 때 한번 건너갔어야 했다.

인간관계에서 호불호를 가차없이 표시하는 까칠한 인간으로부터의 초대는 열일 제쳐두고 응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새 세간으로부터 인정받는 저술가가 된 그를, 남편을 보낸 우울감에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시절처럼 허물없는 모습으로 언젠가 만날 수 있을꺼라고...... 막연히 믿거라 하다가 이렇게 보내고 말았네.  

 

돌아보면 나는 정말 백산서당의 민폐덩어리였지.

겨우 맞춤법이나 맞추는 주제에 구속자 가족이라는 배려로 나눠받은 일자리였건만 끝까지 편집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찾지 못했고

덜렁대는 성격 때문에 사고도 적잖이 쳤고...... 하지만 의리로 똘똘뭉친 편집부 식구들 덕분에 3년여 세월을 대학시절 써클 활동 하듯 보낼 수 있었고

그 한 가운데 당신이 있었네. 정말 당신은 속간으로 몰아치던 백산서당에는 과분했던 편집장이었지.

그 시절 정말 고마웠다는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하고 보내다니...... 인간의 인연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인지.

뻐드렁니 드러내며 파안대소하는 소탈한 모습......우리 아들의 기억 속에도 또렷이 남아 있는 재미있는 안경테(남경태) 아저씨.... 

이제 당신은 내 책꽂이에 꽂힌 네 권의 책으로 남아 있구나.

 

 

올 한 해 동안 과거의 인연들을 많이 잃었다.

손꼽아보니 문상 간 게 9번인데 그 가운데 누구의 부모님 경우 말고 나와 가까웠던 이들만 해도 다섯이다.

이제 우리 시대에는...... 영화 Boyhood에 나오는 대사처럼, 장례식만 남은 건가.

 

1월에 연숙언니를 보냈다.

중국에서 안식년을 마친 형부와 마무리 여행을 하던 중 샹그릴라에서 돌연 돌아가셨다(뇌혈관 질환으로 추정된다)

대학 때 '운동권' 대선배여서 나는 언니를 알고 있었지만 언니가 나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나는 학내에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헌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구로동맹투쟁 사건으로 구속되어 부산교도소에 있는 남편 면회 가는 길에 마산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을 때

내가 묵고 있던 집 안주인이 언니와 전화연결을 시켜주었다.

나는 그때 언니가 마산에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왕래가 드물었던 사이였건만 전화 속 언니는 두말도 없이 내일 새벽에 보자고 한다.

아이가 아파서 지금은 움직일 수가 없지만 나를 꼭 만나봐야겠다는 거다. 그리고 새벽에 부산행 터미널까지 달려와 내 손에 쥐어주던 영치금.

워낙 총명하고 품이 넓어 멀리서나마 흠모해 마지 않던 선배였지만 그때 받은 감동이 사실은 언니와 나의 관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 언제도 언니에게 진 신세(아니 신세라기보다 까맣게 먼 후배를 챙기던 그 찐한 의리)를 갚지 못했다. 이 무정한 인간....ㅠ.ㅠ

보고싶은 언니. 어느새 1주기가 돌아오고 있다.

 

이어 들려온 박목사의 돌연사 소식. 3월말 피지에 있을 때라 조문도 하지 못했다.

나의 유년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같은 교회를 다니며 중등부 고등부 시절 내내 회장 부회장을 나눠먹던 친구였다.

내가 교회를 떠남으로써 삼십 여 년 가까이 끊어졌던 인연이 그 시절 친구 정아의 추모식을 계기로 어찌어찌 이어졌고

다시 만난 그는 목사님이 되어 작은 개척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신중이 지나쳐 답답할 지경이던 그 성품 그대로... 사람 좋은 웃음도 여전했다.

그러고 6년쯤 흘렀나. 만나지는 못했어도 건투하는 소식은 전해듣고 있었는데......

매일 아침 하는 뒷산 등산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후송 중 사망했다고 한다.

사실 신앙적 아이덴티티가 사라져버린 나로서는 그와의 인연도 딱 그 정도일꺼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의외로 마음 한구석이 계속 아려오는 것은

어린 시절 그와 보냈던 시간이 꽤 길었고 그 시간은 바로 내가 소중히 여기는 나의 꿈 많던 유소년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착한 양식아, 네가 그리던 천국에 있는 거니? 부디 편안하길.

 

피지에서 돌아오니 문숙언니의 부고.

대학 선배이기도 하고 남편끼리도 동창이고 아이들도 같은 탁아소에서 자라 한때 근거리에서 왕래하던 선배다.

민주열사 김병곤씨의 미망인으로 더 널리 알려진 언니는 남편 사후에도 그 뒤를 이어 정치 사회 분야에서 꿋꿋하게 활동해왔지만

언제인가 유방암 선고를 받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오랜 세월 투병해왔다고 한다.

2012년 남양주로 남편 병문안을 왔을 때 나도 몰랐었다. 그때 언니는 약초 공부를 한다고만 했었다.

2014년에 재발한 뒤에도 두 딸 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 단짝 친구조차도 임종을 하지 못했다니......

언니의 갑작스런 소식을 들은 사람들 모두 망연자실했고 자책했고 비통하게 울었다.

남편 묘자리가 응달이 지고 물이 나와 늘 속상해 했다던 언니는 양지바른 묘자리를 봐두고 남편을 이장하여 그곳에 합장해달라는 유언만 남겼다.

언니가 가던 날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람이 오고 가는 일이 일상사인데 여러 사람 민폐 끼치지 말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겠다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좁은 생각.

뒷일은 어차피 나의 몫이 아닌 걸. 그들의 슬픔조차도......

 

왜 우리는 인생의 (허무한) 마지막을 보면서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걸까.

한낱 우주의 미물에 불과한 존재의 운명적 아이러니라고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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