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陽光燦爛的日子

숨어있기 좋은 방

張萬玉 2004. 7. 26. 06:45

나의 한국행은 대부분 입국목적이 뚜렷하고 임무수행 후 서둘러 돌아가는 비즈니스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공항을 밟을 때부터 내 마음은 여행지에 온 나그네의 마음이 되어버린다.

일상에서 벗어남으로써 익숙해진 나의 모든 것을 낯설게 느껴보는 것, 발디딘 땅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익명의 자유를 맛보는 것.... 이것이 여행의 특권일진대....한국땅을 밟는 순간부터 나는 이 특권을 조금이나마 누려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언제부턴가 한국이 나의 여행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낯설어진 나의 조국에서 나는 무디어진 감각을 깨우고 갇혀버린 생각의 벽을 허물어줄 새로운 자극을 얻고 싶은 것일까... 굳이 스스로를 위한 이벤트를 도모하지 못한다 해도 하다못해 직장과 남편과 나의 손때묻은 물건들로부터 한걸음 물러날 수 있는 이 시간과 공간에 짱박혀 그동안 접어두었던...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나의 일상들을 뒤집어보기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한국땅을 밟는 순간부터 그런 나의 소망과는 거리가 먼 스케줄이 시작된다. 일단 나의 입국을 알고 있는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고 하루 와서 자고 가라는, 밥 한끼 먹자는 반갑고도 번거로운 성화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시작한다.

서울 지하철은 길기도 하다. 서울 사람들의 동선은 어쩌면 그리도 길고 활동량은 그리도 많은지... 너무나 좁은 공간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팽팽 돌고 있다. 한가한 중국사이클에 길들여진 나는 그 현란한 색채와 사이클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동가숙 서가식하다가 귀국일을 맞는다. 허무하다!!

귀국 하루 전날은 중국에 들고갈 것들을 구입하고 나르는 일에 고스란히 바쳐야 한다. (주부라는 직업... 으~ ) 용무완료 후 하루이틀 정도 여유를 잡아보기도 하지만 내가 갈망하는 휴가를 구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나에게 명분없이 체류할 수 있는 일주일이 있다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작은 공간이 있다면....

그렇다면 새 안경으로 갈아쓰고 이 동네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일 것이다. 지칠 때까지 세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걷는 것이다. 다리가 아프면 낯선 커피숍에 앉아 벌떼같이 달려드는 새로운 자극들을 메모지에 끄적거리거나 커피서비스가 되는 피시방에서 자판을 두드리겠지...

 

적어도 하루는 서점 바닥에 퍼질러 앉아야 한다. 그래야 매대에 놓인 책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가출한 여인네처럼 심야영화도 두어편 때리는 맛도 괜찮을 것 같고... 예전에 살던 불광동 뒷산에 기어올라 비봉에서 푸른하늘 흰 구름을 한나절 즐기다 구기동으로 내려와 두부집에 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건달처럼 며칠 빈들거리다보면 우연히 10년 전에 소식 끊어진 친구와 마주칠지도... 사는 형편이 달라도 예전처럼 꽥꽥 반가운 비명을 지르며 마음을 열 수 있다면 그것은 여행지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 되겠지..

빨리 볼 일 보고 하루라도 땡겨 일상으로 복귀할 생각은 저만치 밀어두고 혼자 지내는 마지막 밤이 못내 아쉬워 잠못이루는 이 철딱서니 없는 아줌마... 언제나 이 유치한 소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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