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레이디경향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우리에게로 와서
된장녀가 되었다
……
---김춘수의 <꽃> 패러디
2006년 여름 된장녀들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돌체&가바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한 손에는 스타벅스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나머지 한 손에는 최신형 DMB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 자신의 늘씬한 다리를 엉큼하게 쳐다보는 남자를 혐오스럽게 째려본다. 그녀들의 귀에는 헤드셋이 꼽혀 있고 어깨에는 프라다 백이 걸려 있으며, 노란색 폴햄 모자를 쓰고 있다. 그녀들에게서는 은은한 향기가 난다.
물론 이전에도 그녀들은 그렇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그녀들은 그저 하나의 '그녀'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2006년 여름 이후, 그녀들은 '된장녀'들이 되었다. 그녀들은 강남과 홍대 앞 카페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산 서면 4거리에도 광주 충장로에도 출몰한다. 대구 동성로에도 있고 제주도 서귀포에도(서귀포 그녀는 아직 스타벅스가 서귀포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투덜거렸다) 있다.
된장녀는 비난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어떤 남자는 "전통적인 가치 중에 여성에게 유리한 것은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여성에게 불리한 부분에서는 '연약한 여자'를 주장하며 슬그머니 발을 빼는, 극단적으로 남자를 혐오하면서 남자를 뜯어먹는 여자들"이라며 울분을 토한다. 어떤 여자는 "스타벅스, 베니건스, 그게 뭐 대단하다고 빵 쪼가리 몇 개에 커피 호르륵 마시고 나오면서 그 비싼 값을 지불하는지. 같은 여자지만 이해할 수 없다. 골 빈 문화사대주의자 같다" 라고 비난한다.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남녀불문하고 "요즘 애들이 너무 겉멋에만 매달린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가려고…" 하며 혀를 찬다.
된장녀는 이 시대의 죄인이 되었고, 모두가 잡아 인민재판을 하고 싶어하는 공공의 적이 되었지만, 아무도 자신이 된장녀라고 자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엔 여전히 된장녀들이 흘러넘치고 있다. 무엇이 그녀들을 2006년 현재 대한민국 도시 거리에 그런 모습으로 존재케 하고, 된장녀라는 비난을 받게 하는 걸까.
된장녀들의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이다. 이건 뭔가 의심스럽다. 성(gender) 대결로 보기에는 세대가 국한되어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된장남이란 말까지 있다.
최초는 성대결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싸움이 커지면서 어느새 소비의 문제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된장녀 논쟁의 본질은 계층간 충돌? 하지만 '귀족녀'라는 말이 따로 있는 걸 보면 그렇게 볼 수만도 없는 것 같다. 소비의 문제라면 귀족녀만 잡으면 된다. 그러나 아무도 귀족녀를 잡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능력이 안 되면서 겉만 귀족을 꿈꾸는 여자(혹은 남자)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경제개념이 전혀 없는 허영에 찬 속 빈 소비풍조'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에 관한 기존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의 충돌, 세대간 충돌의 측면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남녀 성대결을 지나, 계층간 충돌을 지나, 가치관의 충돌(혹은 세대간 충돌)까지 왔다. 된장녀 논란에는 남녀 성대결이나 계층간 충돌 부분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큰 사회적 이슈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마당, 된장녀 논쟁의 핵심은 가치관의 충돌(혹은 세대간 충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늘 기성세대는 새로운 젊은세대의 생활양식에 깜짝 놀랐다. 2천년 전에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큰일이다" 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이 깜짝 놀라는 현상은 대략 10년을 주기로 벌어진다. 우리에게는 10년 단위의 청년세대 명칭이 있었다.
1960년 4월 19일 무소불위의 자유당 정권이 무너졌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중에 의한 정권전복이었다.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4 19세대는 한국사에 최초의 청년세대로 등재된다. 사실 그 이전에는 세대에 대한 특별한 지칭이 없었다. '해방세대', '6 25세대'라는 말이 있고 1945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해방둥이'라고 지칭하긴 했지만 크게 회자되지는 못했다. 4·19세대는 정규교육기관에서 한글을 배워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표현하는 최초의 세대가 되었다. 그들은 5천년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중국문화와 일본문화로부터 자유로운, 최초의 오롯한 한국인들이었다.
1970년대는 통기타(유신) 세대가 기성세대들을 놀라게 했다. 1970년대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박정희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통기타 세대는 군사혁명으로 등장한 박정희 권위주의 정권의 획일화에 저항하기 위해 통기타와 청바지, 장발, 포크송,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를 만들어냈다. 기성세대들은 이들을 퇴폐적이라고 비난했다. 어느덧 50대가 되어버린 이들은 자신들을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식한테 버림받는 최초의 세대'라고 자조하고 있다.
1980년대는 광주세대(5.18세대)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5 18세대는 사실 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불행한 청년세대였다. 80년대 청년세대들을 모두 5 18세대로 규정지을 수 없지만 다른 청년들은 대부분 운동권 청년들에게 알게 모르게 도덕적 열등감을 느꼈다. 이들은 감옥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때로는 목숨도 걸었다. 분신자살도 많았다.
1990년대에는 신세대들이 또 기성세대를 놀라게 했다. 이들은 정말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왔다. 그래서 이들은 규정할 수 없는 세대라는 뜻으로 X세대라는 타이틀을 덤으로 갖기도 했다. 전자오락기와 컬러텔레비전으로 소년기를 보낸 최초의 영상세대. 이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을, 무거운 것보다는 가벼움을, 질서보다는 무질서를, 정신문화보다는 육체문화를 즐기며 기성세대들 앞에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애들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공동체 의식은 없었다. 이들은 참을 수 없이 가벼웠고, '우리'보다는 '나'를 내세웠다. 이들로 인해 정신보다 몸이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기존문화에 대한 저항은 있었지만 정치색은 탈색되었다. 이전 청년세대들은 호칭에부터 꼬리표처럼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 붙어 있었고, 그 정치적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어떤 역사적 어둠도 없었다.
1990년대란 무엇인가. 더 이상 먹고살기 바쁜 동물적 생존의 시대는 넘어선 시대였고, 예전처럼 인신의 자유가 위태로울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은 민주화 시대였다. 이들은 더 이상 '빈티'를 내지 않고 인생을 즐기기 시작한 최초의 청년세대였다. 이들은 압구정동과 홍대 앞을 자신들의 성지로 삼았다. 이들은 '기호의 차별화'를 주장하며 좀더 고급한 공간을 찾아 순례했다. 이들이 가는 길목마다 록까페 로바다야끼가 생겨나며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이들은 남들과 다른 자신들의 기호라면서 당시 3∼4천 원씩 하는 비싼 커피값을 기꺼이 지불했다. 왕자웨이, 쿠엔틴 타란티노, 짐 자무시, 타르코프스키, 서태지 등은 이들의 우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2000년대의 청년세대가 인터넷 세대답게 된장녀(남)라는 기발한 이름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기성세대는 새롭게 출현한 이 된장녀(남)들에 놀라고 있다. 이것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족 같다. 간신히 1990년대의 신세대들의 발칙함을 이해하고 인정해줬는데, 이것들은 한술 더 뜨는 것이다.
이 새로운 미래의 아이들은 보릿고개를 완전히 넘어선, 이른바 풍요의 80년대에 태어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맨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보도블록과 아스팔트만 밟으며 살아온 아스팔트킨트들이다. 이들에게 광주항쟁은 태어나기 전의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이들은 저 6월 항쟁도 모르고, 88올림픽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거나,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YH 노동자사건 같은 건 전혀 모른다. 그런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이젠 한국에서는 그 씨가 거의 말라버렸다. 3D업종은 사라지고 전문직 서비스직만 남았다. 당연히 아무리 말해줘도 못 알아듣는다. 밤 12시만 되면 전국을 뚜우 하는 사이렌 소리로 정지시키던 야간 통행금지도 모른다. 설령 이해한다 해도 오랜 옛날의 '역사'로 이해될 뿐이다.
이들은 1990년대 신세대들처럼 굳이 '나'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이미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집안의 소중한 공주님(혹은 왕자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자기 방에서 혼자 자고 사유를 키워온 태생적 개인주의자들인 이들은 굳이 '나'를 내세울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2000년대는 한국이 완전히 '밥'을 넘어선 시대다. 우리는 몸을 가리고 추위를 막는 '옷'을 넘어섰고, 눈비 피하고 밥 해먹고 잠자는 공간으로서의 '주택'을 넘어섰다. 이제 한국땅에서 굶어죽고 얼어죽을 일은 없다. 물론 그래도 굶어죽고 얼어죽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나 그건 기막힌 우연이 연달아 일어날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이제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은 사실 '인생을 즐기기 힘들다' 혹은 '남들처럼 여유롭게 살기 힘들다'는 말의 과장된 표현이고, '허리띠를 조른다'는 말은 예전처럼 글자그대로 배고픔을 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생활을 줄인다'는 말의 은유적 표현이다.
이제는 커피도 중요하고 옷도 중요하고 가방, 모자, 운동화, 휴대전화, 대화방 캐릭터, 모든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휴대전화 요금 때문에 밤잠 자지 않고 24시간 편의점 알바를 뛰고, 부모가 5만 원짜리 바지를 사준다고 해도 자기는 끝끝내 50만 원짜리 바지를 사 입어야 한다면서 방학동안 힘들게 주유소 알바를 뛰는 아이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심한 경우 유명메이커 옷을 사 입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는 어린 여학생도 있다. 밥이 중요했던 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의 눈에는 미친 짓들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머리 빡빡 밀고 방안에 가둬버리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튀어나온 아랫배와 고기반찬이 부의 상징이던 '밥'의 시대는 완전히 가버린 걸.
그렇다고 왜들 그렇게 골빈 애들처럼 겉멋에만 치중해야 하느냐고?
당신이 큰 점포를 냈다고 하자. 점원이 필요하다. 당신은 예쁘거나 선하게 생긴, 그리고 상냥한 사람을 쓸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능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예쁘거나 선하게 생긴 얼굴, 이것이 일단 어드밴티지를 먹고 들어가는 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남자 점원을 쓴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당신은 조폭 같은 얼굴을 한 청년을 점원으로 채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겉모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밥을 넘어서면 무엇이 보이는가. 이미지다. 세련된 인생을 즐기는 것이다. 이들의 주의(主義)는 "세련된 삶을 살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겠다"이다. 세련된 삶을 가장 쉽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겉멋이고 고급 브랜드다. 2천년대 들어 아무리 가난한 집 아이도 최소한 중저가 브랜드의 옷과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다. 시대는 변했고, 변해버린 이 시대에 구석기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이게 된장녀들만의 현상일까?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진지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 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솔직히 말해, 남녀노소 아무도 없다. 언제나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가장 빨리 캐치하는 것은 청년세대다. 기성세대들이 판단이 조금 늦을 뿐이다. 진지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당신은, 정말, 겉멋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건물은 더 이상 단순히 들어가 먹고 자거나 일하는 공간이 아니다. 휴식공간이고 놀이공간이고 문화공간이다. 창고 같은 밋밋한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은 이제 하나둘씩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예술작품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주거공간인 아파트는 어떤가. 더 이상 밥 해먹고 잠만 자는 공간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방은 널찍하고 안방에는 따로 욕실이 있고, 거실에는 극장을 집안으로 옮긴 홈시어터도 있다. 주방 역시 널찍하고 주방의 싱크대 위에도 모니터가 설치되어 음악감상 TV 시청을 할 수 있다.
된장녀들을 철없다고 비난하는 기성세대 역시 그런 아파트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초가집과 기와집은 민속촌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멀리 온 것이다. 다만 트렌드에 민감한 된장녀들이 몇 걸음 더 앞서고 있을 뿐이다.
청년들은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의 무질서 속에 내재한 규칙성 프랙탈(fractal)을 놀라울 정도의 본능적 감각으로 찾아내어 그것에 들러붙는다. 왜? 그것이 그들의 체질에 맞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관과 충돌하여 논쟁이 시작되고, 급기야는 사회이슈가 되고, 뒤늦게 문화학자들이 그들의 행동양식에서 불연속성에 기초하고 있는 고도의 자기유사성을 발견해낸다. 문화학자들의 해석으로 인해 청년들의 튀는 행동이 사실은 이미 준비된 새로운 흐름, 새로운 질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된장녀(남)들은 기성세대들은 도저히 감 잡을 수 없는 '제4의 물결'을 서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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