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가을바람언니 집에 놀러가는 길에 들렀던 어떤여자님의 책방에서
그 소문 자자한 '아내가 결혼했다'와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를 집어왔다.
연애소설 읽어본 지가 언제던가? (멜로영화는 좋아해도 이상하게 연애소설은 잘 안 읽는다)
오랜만에 맛보는 말랑말랑 달콤한 맛에 홀려 어제와 오늘에 걸쳐 몽땅 읽어치웠다.
두 소설의 공통점이 상당히 많아 연속으로 읽다 보니 두 소설이 오버랩될 지경이다. ㅎㅎ
두 소설 모두
1. 화장실에 갈 때조차 책을 놓지 못할 정도로 흡인력이 있다. 특히 심리묘사에 탁월하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꼼꼼하게 짜여진 구조에 맞아떨어지도록 설계한 스토리 전개가 돋보이고
(축구매니아라면 더 재밌게 봤겠다)
'난 유리로 만든 배....'는 감각적인 문장이 돋보인다.(전경린 책은 처음 봤다)
2. 연애소설 같지만 핵심은 연애 얘기가 아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역사적인' 제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나는 유리로 만든...'은 결혼(제도)에서 이탈한 '여행하는 여자'를 통해 '생의 관습적 고리를 끊기 위한 필사의 탈출'('난 유리로 만든....' 뒷표지 백지연의 서평을 인용)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잠깐!
* 파란글씨는 박현욱, 혹은 전경린, 혹은 서평을 쓴 분들의 표현임
* 진한 글씨는 키워드라서, 빨간 글씨는 개념적인 문장이라서... 눈에 띄게 하느라고... ^^
* 작은 따옴표는 그냥 내 맘대로 붙인 것임.
3. 결혼제도라는 빙산에 바늘을 꽂고 망치로 톡톡 조심스레 두드리고 있다. 작은 加擊이지만 얼음은 완강하게 얼어 있지 않다. 늘어나는 이혼율과 넘쳐나는 러브호텔은 드디어 대중매체로 하여금 일부일처제의 虛名을 공격하도록 부추기기에 이르렀다.(이 문제 안 다루는 연속극 몇 개나 될까) 그러니 실눈 같은 균열을 타고 머지 않아 빙산이 쪼개져내릴 꺼라는 생각에 대해 '역사적 시각을 갖춘 미래예측'이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해도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헌데 -- 재미삼아 유물론적 용어를 사용하여 뱀발 하나 붙여본다 --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지난한 과정 아닐까? 미성숙한 물적 토대 위에서 인위적으로 조직한 공산혁명은 역사에 혹독한 상흔을 남기고 쓰러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인류의 역사에 성숙한 가치들을 적잖이 배양한 것도 사실이지만.)
4. '도덕에 길항하는 정열'의 대가는 혹독하나 저마다의 운명의 완성이라는 비범한 덕목과 연관되어 있다. ('난 유리로 만든....' 뒷표지 황종연의 서평을 인용)
'아내가 결혼했다'는 마치 공상과학소설처럼 이상적인 해피엔딩을 준비함으로써, '난 유리로 만든...'에서는 '혈연공동체의 한계'를 뛰어넘게 함으로써...... 주인공들의 고독한 몸부림을 의미있는 몸짓으로 만든다.
나처럼 '내 시대의 윤리' 궤도에 이미 편승해 있는 사람들로서는 얼음이 녹아내리는지 의심할 필요도(사회학자라면 모를까), 스스로 균열이 생긴 얼음에 꽂히는 바늘이 될 일도 없지만.... '일상의 균열을 파고드는 불가해한 환상'에 홀릴 수는 있을지 모른다. 작가들은 '초현실성의 통로'를 통해(전경린의 모두글 인용) 나의 내면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 들으며 글을 쓴다거나 전화 받으면서 요리하다가 다 태워먹기 일쑤인 나로서는 두 집 살림하는 수고는 고사하고 동시에 두 남자를 사랑할 능력이 없는 단세포이기 때문에 이왕 '열정적 사랑'이 오려면 순차적으로 왔으면 한다. ㅎㅎㅎ )
이하는 '아내가 결혼했다' 178~181페이지까지 발췌인용한 내용.
'난 유리로 만든...'의 주제에서는 좀 벗어났지만 '결혼에서 벗어나 떠도는' 여자 역시 '또다른 養父'(결혼은 아니지만 경제적인 필요를 위한 결합이라는 점에서)를 거부하고 내면의 요구를 따랐다는 점에서 두 남자와의 결혼을 주도한 아내의 생각과 일치하는 듯하고.... 그런 의미에서 안그래도 오버랩되는 두 소설을 정리하는 글로서 적합하지 않나 싶다.
또한 '합류적 사랑'이란 개념은 일부일처제의 치명적인 단점을 이해하고 잘 다루기 위해서도 유용한 개념이 아닌가 싶어서... 정리해둘 겸 굳이 책을 보고 타자를 치는 수고를 감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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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적이고 극단적인 요소를 지닌 열정적 사랑은 오랫동안 반사회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사랑과 무관하게 결혼이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열정적 사랑이란 결혼의 위험요소였다. 서구의 경우 18세기 전까지 귀족계층에게 결혼이란 지위와 재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고 평민층에서도 경제적인 목적을 실현하려는 도구였다. 사랑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결혼의 바깥 상대, 곧 불륜 상대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이 변치않는 사랑을 나누며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 낭만적 사랑이다. 열정적 사랑이 성적 매혹과 불가분의 관계인 반면 낭만적 사랑은 정신적인 것, 영혼의 만남을 우위에 둔다.
왜 하필 그사람이어야 하는가.. 낭만적 사랑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이니까.
18세기에 시작된 자본주의의 발전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랑은 결혼과 결합되어 가족과 친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개인이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불륜으로 치부된 사랑은 낭만적 사랑이 부상되면서 결혼제도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사랑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 경우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이 실제로 영원했던 시기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결과 종종 오랜 불행의 나날이 초래되었다. 결국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속성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에서는 서로의 차이점이나 갈등의 요인들이 간과되고 축소된다.
갈등이 커질수록 상대방이 진정한 영혼의 짝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며 결국 관계는 깨지게 된다.
합류적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열어보이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의 속성인 유일과 영원의 허구성 때문에 합류적 사랑이라는 사랑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 낭만적 사랑에서는 바로 그 특별한 사람이 중요하지만 합류적 사랑에서는 그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가 더 중요하다. 낭만적인 사랑과는 달리 합류적 사랑은 이성애여야 할 필요도 없고 반드시 일부일처제여야 할 필요도 없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고 사랑의 유대를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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