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가는 길(~2014)/재미·취미(쓴 글)

책 먹기

張萬玉 2008. 1. 22. 21:55

식전수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코 고는 양반이 간밤엔 날이 하얗게 밝도록 뒤척이다 들락거리다 말 걸다 하는 통에

나까지 제대로 잠을 설쳤다. 식구들 나간 뒤 한숨 자보려고 하던 어설픈 시도도 맘같이 되지 않아 결국 수영만 빼먹고 말았다. 창밖엔 무심한 눈이 소리도 끝도 없이 내려앉는데 꿀꿀한 기분은 영 수습 안 되고...

밖에 나가 산책이나 해볼까 싶어도 눈 반 얼음 반 질척대는 길은 종종종 걷다가 나동그라지는 장면만 떠오르게 한다. 아, 7층 高城에 갇힌 라푼첼 공주(폐인모드의 겨울을 지나며 머리칼이 대책없이 자랐다)의 이 울적한 심사를 어찌 개선해볼꺼나.

밥알도 깔깔하여 우유 한 잔으로 외로운 점심을 때우고 앉아 있는데 JM으로부터 호출이다. 

약속시간이 세 시간이나 남았지만 서둘러 집을 나선다. 사당역 안에 있는 서점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듯 책 구경이나 하면 이 꾀죄죄한 기분이 덜어질까.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도넛 집 간판에 붙은 로고에 반짝 하며 빨간 불이 들어온다. 로고에 빨간 불 들어올 때 들어가면 갓 구워낸 맛뵈기 도넛을 주는 그 집이다. 내 머리 속에도 반짝 하며 광고 카피 한 구절이 지나간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뭐?'

평소 같으면 도넛이야말로 금지품목 5위 안에 드는 위험식품이지만 지금 그게 어느나라 법이더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쑥 들어가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니 설탕이 반들반들하게 발린 글레이즈드 도넛 하나가 따라나온다. 창쪽으로 붙은 긴 의자에 앉아 새가 모이를 쪼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육질을 음미하니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거리가 너무나 친근하게 다가온다. 향긋한 원두커피까지 합세하여 확실히 기분을 up시켜주니... 된장녀 정서라는 게 이런 식으로 조성되는 건가? ㅋㅋ 확실히 나도 정신이 물질에 의존하는 세상에 길들여져 가고 있구나.               

 

책 핥기         

기분이 그저그럴 땐 매대에 멀쩡히 진열된 책들도 미처 못보고 돌아서기 일쑤인데 도넛 하나 커피 한 잔에 말끔이 씻긴 기분이라 그랬는지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눈이 활짝 열렸다. 신간도 아닌데 새삼 눈에 띄는 책들도 적지 않은 데다 '구경'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기분이 나를 '쇼핑'모드로까지 전환시킨다.

 

일단 요즘 내 관심사인 기행문 코너에서 시선에 걸린 책들이다.

 

일하면서 떠나는 짬짬이 세계여행 - 조은정(팜파스)

장기 배낭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랴. 휴가기간이 짧기 때문에 똘똘한 계획이 필요한 대다수 직장인들에게 아주 유용한 책. 정보서임에 틀림없지만 '영리하고 부지런한 그녀'가 느껴졌다.      

 

라틴 문화여행 -  정지은(일빛)

전에도 내 시선을 끌었던 책이었는데 오늘은 시간을 좀 들여서 관심지역을 읽어보았다.

여행안내서로서 (남미에 관한 한) 이 정도로 정리가 잘 된 책도 드문 실정을 감안할 때 수준급이나

'여행안내서'가 되기에는 너무 묵었다(2004년刊, 아마도 여행했던 시기는 2001~2년경?)는 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허나 뼈만 추린 정보서와는 달리 여행루트의 속살을 느끼게 해주는 매력적인 책이다.

 

1만시간 동안의 남미 - 박민우(plumb books) 

사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멕시코쪽 가이드북은 따로 챙기질 않았길래 혹시 싶은 마음에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선 자리에서 거의 절반을 다 읽어버렸다. 애쓰고 알바해서 벌어가지고 박 터지는(아니, 박 터질 기회조차 안 주는) 이 나라를 탈출한 청년 백수들의 모습(꼭 저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여 한편으로 가슴도 좀 아팠다. 다음에 서점 가면 마저 다 읽어야지. ^^     

 

미애와 루이의 버스여행 1. 2

미애와 루이 가족, 45일간의 아프리카 여행

미애의 몽골여행

세상 끝에서 우회하기(오토바이 전국일주)

TV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모델 출신 미애와 사진작가 루이 커플의 여행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이렇게 책을 많이 냈는지 처음 알았다. 상식을 뛰어넘는 과감한 삶의 방식(특히 아이까지 함께 하는), 그 삶에 따르는 고생까지 차근차근 겪어내는 용감함과 부지런함, 그렇게 살아도 생업이 되는 두 사람의 타고난 재능(이 대목이 가장 부럽다)..... 네 식구의 캐릭터가 진하게 묻어나는 사진들을 한없이 한없이 바라봤다. 이 책들 중 한 권 정도는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참았다.   

 

한비야 바람의 딸 시리즈 4권이 요즘 감각에 맞춰 산뜻하게 표지갈이를 했다.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손을 본 흔적이 눈에 띄어 고마웠다. 그 사이에 나도 견문이 넓어져 처음에 경이로운 눈으로 뒤쫓던 그녀의 여행루트가 사실 오늘날 배낭족들이 대부분 훑고다니는 평이한 루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낭여행족 사부로서의 그녀의 확고한 의미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두 발로 지구촌을 밟아가며 사람과 세상을 배우고 싶어했던 그녀의 열정을 능가하는 여행자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Passport - 김경수 산문집 (랜덤하우스)

이 책을 결국 사고 말았다.

from Gobi to siberia 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을 선택한 건 여행지가 내 관심사여서가 아니었다.

말이 산문집이지 내게는 시집처럼 느껴졌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먹기 아까운 사탕 감추듯 책을 덮었다. 가슴이 떨렸다.

 

내게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구매하는) 책이란 건 실용적인 '도구'에 가까웠지 '기호품' 쪽은 아니었다.

요즘은 책이 기호품처럼 느껴진다. '사용하는' 게 아니라 '먹는' 무엇이랄까.

 

약속시간이 가까웠다. 기행문 코너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외국소설 코너로 간다. Pia님을 만나기 위해서..

당연히 역자소개부터 먼저 본다. 기분 잘 통하고 말 잘 통하는 여동생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 손가락으로 역자소개 적힌 책 날개를 가만히 쓸어봤다.  

뭔가 한 권 사야지, 사실 비행기에서 읽을 책이 필요했다. 시차에 적응하려면 비행기에서도 자지 말고 도착한 뒤 바뀐시간으로 밤 9시까지 버티다가 술 한잔 하고 푹 자버리라는 얘길 들었기에 페이지 휙휙 넘어가면서 끝까지 안 보고는 못배길, 읽고 나서는 남 줘도 될 만한 그런 책(아마도 소설).

Pia님이 소개한 책들이 대부분 소설이기에 그 중에서 한 권 고를 작정이었다.      

'요한기사단의 황금상자'는 얼핏 보니 '다빈치 코드' 느낌이다. 내 취향이 아닌 듯하니 패스...

'피렌체의 연인'과 '아침으로 꽃다발 먹기'를 두고 저울질하다가 약속시간이 되어 일단 후퇴. 꽃다발 먹기... 가 더 끌리는데 하드카바다. 내일 와서 다시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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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나스

내가 최근에 읽은 남미 관련 책들

 

라틴앨범(후배가 빌려가서 저자와 출판사 이름 모름)

건축사가 10년을 별러 떠난 남미 여행기. 오랫동안 꿈꾸고 준비한 내공이 느껴진다. 전공분야인 건축에 대한 해설도 훌륭하고 사진들도 좋다.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이성형 저 - 이것도 빌려가서 출판사는 모름)

예전에 출판사 편집부에서 근무할 때 이 분의 글을 교정 본 적이 있었는데.... 이런 글도 쓰셨구나..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으셨네...ㅎㅎ

남미정치를 연구한 분의 책이라 깊이가 있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여전히 일독을 권할 만한 재미있는 책.

 

Curious series - 페루

이 시리즈 중 남미편은 칠레와 쿠바가 있는데 남미여행 관련 비즈니스로 일가를 이룬 비바라틴 사장님이 쓴 페루편이 제일 알찬 듯.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음식, 교통 등등이 망라된 페루 예습의 교과서

 

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사군자출판사)

도전 지구탐험대 피디가 쓴 책, 인류학적 시각이 돋보인다. 여행과는 상관없이 한번 읽어볼 만한 아주 재미있는 책. 한번 잡으면 끝까지 놓을 수 없다.

 

제목은 책 먹기라고 붙였지만 한 입도 제대로 안 베어물었네.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