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기 전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 소리.
깜짝 놀라 베란다 문을 열어보니 바람소리가 아니고 차들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소리다.
경사 40도 정도는 족히 될 만한 우리 집 앞 언덕길....내려오는 차들은 눈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노인 발걸음처럼 삐뚤빼뚤이고 올라가는 차들은 변비 걸린 사람들처럼 용을 쓴다. 새벽부터 염화칼슘을 뿌리긴 했나본데 물기 많은 눈이 그치질 않고 찬바람이 불어대니 아마 내리는 족족 얼어붙나 보다.
남편이랑 아들넘 나가고 나서도 여전히 밝아오지 않는.... 엔진 용쓰는 소리 심란한 바깥세상..
그 어둠과 소란에 한참 비껴서 있는 주제에 뭐가 어떻다고...끝도없이 내려앉는 처연한 눈발을 따라 내 마음도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려고 한다. (다시 갱년기 우울증 시작이냐?)
오늘이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날인 거 몰라? 어서 일어나 어서!
이런 날은 음악 같은 거 들으면 안 된다. 그저 손발 움직이는 게 마음 수습하는 데 최고지.
하지만 청소는 하기 싫고... 여행놀이나 해볼까?
필요한 게 있으면 미리 장만해야 하니 체크해둘 겸 달포 전에 싸두었던 배낭을 풀어본다.
배낭 용적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 최소한으로 싼다고 쌌지만 그래도 10킬로그램....가방 무게만 1.6킬로.
메어 보니 멜 만은 하지만.... 계속 메고다닐 생각을 하니 답답하다. 내가 무쇠관절의 이십대냐 말이다.
뭐 더 뺄 게 없나 뒤적거려보지만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
(별로 넣은 것도 없는데 왜 아직도 쌀 한말 무게가 넘냐고.... 이제 뭘 더 빼냐고...)
미친척 그냥 추리닝 한 벌에 칫솔 하나만 들고 가볼까? 필요한 거 그때그때 사고?
(그래도 산 건 들고 다녀야 하잖아. 양치 세수 한 번 하고 내버릴 것도 아니잖아)
요기까지가 지난 목요일에 쓰다가 한심해서 닫아둔 얘기고...
이하는 어제 얘기
사진을 암만 안 찍는다 해도 석 달이나 돌아다니니 최소 2천 장은 안 나오겠나.
친구가 자기 웹하드에 올려놓으면 갈무리해주겠다고는 했지만, 열일 제쳐놓고 피씨방 찾아다니는 것도
느려터진 인터넷 속도에 마음 졸이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 결국 이미지 저장장치를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 먹고 용산에 나갔다.
헌데 이넘이 생각보다 가격이 나간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로는 20기가 정도 간단히 쓸만한 것이 십만원 안짝이길래 그런가보다 하고 갔는데
ㅎㅎ 그건 메모리카드 슬롯과 내려받는 기능을 갖춘 외장케이스 가격이었다. 게다가 눈에 차는 건 최소한 11만원, 거기에 하드를 장착하면 (요즘 나오는 것은 최소 단위가 80기가) 14만원이 조금 넘네.
그 정도면 조금 더 돈을 보태서 무게나 부피가 비슷한 PMP를 살까보다....안 그래도 위험해서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기나긴 밤을 어찌 보낼지 걱정이었는데 음악과 영화를 잔뜩 넣어가면 덜 외롭지 않을까?
헌데 PMP도 쓸만한 건 가격이 제법 나간다.
(아쒸, 내 차에 붙은 네비게이션을 떼어갖고 갈까보다. 입력장치도 없는 주제에 뭘 그리 비싼고.)
그러다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Kohjinshia 노트북...(노트북이라기보다는 장난감이라고 해야 할..)
80기가이니 원래 나의 목적이었던 이미지 저장뿐 아니라 놀꺼리 가져가기... 문제 없고,
오피스와 한글이 깔려 있으니 짬짬이 여행기록을 남겨둘 수 있고,
유무선 인터넷이 되니 필요할 때 얼마든지 정보 검색도 할 수 있고 가족들과 메신저도 할 수 있고...
최고의 장점... 딱 업무용 다이어리 크기에다 1킬로그램이 채 안 된다는 점...(거부할 수 없는 매력)
가격은 신형 아니면 57만원까지 가능하단다. (이 사양의 제품이 처음 출시된 게 작년 하반기라니 앞으로 얼마나 빨리 진화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필요에 대해 이 정도면 황송이다.)
아쒸, 어떻게 해... 10만원 쓰러 왔다가 60만원 쓰겠네...(지름신 강림중.)
집에 노트북이 없는 게 아니잖아.. 또 산다고? (중국에서 산 2002년식, 3킬로 정도라 동행 포기)
이것도 짐이거든? (딴 거 더 빼면 되잖아.)
잃어버려..(다 運이야.)
여행길에설랑 눈과 귀와 머리를 좀 비워봐. (안 그래도 심심하게 사는 중인데 뭐 비울 게 있다고..)
애들도 아니고... 어른이 뭘 그렇게 장난감을 좋아하니? (장난감이 될지 작업도구가 될지 우째 알아?)
아쒸몰라....
하루만 더 생각해보자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는데, 다음 매장에 이넘이 또 떡하니 앉아 있네그려.
헌데 이넘이 달고 있는 가격표가 엄청 착하다. 45만원이래!
눈씻고 보니 1개월 사용한 중고란다. 아저씨, 아저씨... 이거 좀 깎아서 주실 수 있으세요?
오호홋, 이렇게 해서 993그램짜리 진짜 노트만한 노트북이 내 손에 들어왔다.
중곤데요.... 우기면서 삼십만원대로 깎았다. (아저씨, 화나신 거 아니죠? 주실 만하니까 주신 거죠? ^^ )
필요한 거 다 깔고 시운전 해보고... 무상 A/S 기간이 8개월이라니 중고라지만 그리 불안하지 않다.
--------------------------------------------------------------------
이 신입생이 들어갈 공간을 확보해주려고 오늘 아침 배낭을 다시 뒤집었다.
(무조건 빼는 거야, 안 되면 진짜 추리닝에 칫솔 하나 물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넘은 데려가야지.)
긴팔T 2(하나 빼자), 반팔 T 2, 반바지(빼고), 가디건(겹쳐입고), 스웨터(설마 얼어죽겠니? 빼자), 윈드스토퍼, 해변용 원피스(빼자), 바지 2,, 추리닝, 팬티5(3장만...부지런히 빨아입자), 브라2(하나 했으니 하나만), 두꺼운 양말 3, 얇은 양말 2,
마스크 겸용 스카프(빼자) 보조배낭, 보자기, 덮개 겸 깔개(빼자), 목베개, 와이어, 실과 바늘, 손톱깎이(빌려쓰지 뭐), 눈썹정리칼(빼자), 수첩, 볼펜, 선물용 볼펜(빼고), 스페인어사전, 생존매뉴얼(필요없다)
비상약(지사제, 두통약, 소화제, 일회용밴드, 후시딘, 물파스, 모기퇴치로션, 비타민 - 빼자)
선글래스, 선크림, 립글로즈(빼고), 때수건, 스포츠타월 2장, 치약, 칫솔, 비누, 샴푸, 로션(샘플 절반만),
스텐 대형컵(빼자), 수저나이프세트(나이프만), 손전등(머리끈 떼고), 수영복, 물안경, 슬리퍼(빼고), 챙모자, 카메라충전기, 카메라, 메모리3개, 충전지 3개, 멀티어댑터, 론리(페루와 콜롬비편만)
힙쌕 : 현금, 국제학생증, 직불카드, 카메라 메모리와 충전지
복대(옷 안에 착용) : 여권, 비상금, 항공권, 신용카드
서류팩(큰 배낭 안 깔아둘 것) : 여권 / 항공권 복사본, 황열병접종증명서, 증명사진 2장 여권사진 2장
아이고, 신기해라, 진짜 뺄 게 없어 보이던 짐인데 '이까이꺼 빼봐야...' 궁시렁거리며 정말 모기 눈물만큼씩 빼보니... 그래도 2킬로 가량 줄었다. 여기에 1킬로 남짓(윽! 충전어댑터가 복병이다) 추가하면....
휴~ 그래도 10킬로는 안 되네... 8.9킬로그램이다.
한 손으로 들어보니 번쩍 들린다. 비운 건 병아리 눈물만큼뿐이지만 마음은 훨씬 가볍다.
암만 생각해도 설명이 안 되는 이 역마살, 이 궁상...
석 달 동안에 빤쓰 세 개라니.... 이게 웬 거지행각이냐고요~
'여행일기 > 중남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준비 마무리 1 - 살림 매듭짓기 (0) | 2008.02.01 |
---|---|
<동행 구함> 에피소드 (0) | 2008.01.28 |
멕시코시티 지하철 노선도 (0) | 2008.01.09 |
남미여행 관련 싸이트 주소 (0) | 2007.11.24 |
[스크랩] Re:2월 11일 출발 3개월간 중남미.. 저도 동행 구해요. (0) | 2007.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