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텔에서 제공하는 버스는 란킨까지 간다. 편도 16달러, 6시간 걸린단다.
버스에 오르니 눈에 익은 애들이 두 명 있다. 어제 내가 띠깔 투어 간 사이에 리셉션의 착오로 우리 방에 배낭을 부려놨다가 침대 임자들의 항의를 받고 철수했던 애들인 것 같다. 로스 아미고스에 방이 없어서 다른 데로 갔구나 했더니 자기네들은 거기 간 적이 없다면서 실실 웃는다. 이상하다, 어디선가 본 애들인데....
한참 뒤에야 생각났다. 걔들은 과테말라 국경을 넘을 때 함께 보트에 탔던 애들이었다(사진에도 찍혔더군). 눈썰미 하나는 신기명기에 가까운 내가 어째 서양애들은 그렇게 구별을 못할까. 동양인이 드문 그 동네라서 그런지 다른 애들은 나를 한번 보고도 기억을 하는데.... 너무 불리한 시추에이션이다. ^^
어쨌든 버스에 탄 사람들은 나까지 열 명이다. 캐나다 총각 마크, 어디선가 본 것 같았던 애들과 그들과 동행인 영국 여자애들 2명 스웨덴에서 왔다는 커플 두 쌍.... 25인승 승합차가 텅텅 비었다. 목적지가 손바닥 만한 동네이니 얘들과는 동행이거나 최소한 자주 부딪히게 될 것이다.
여행자들에게 과테말라는 구름 구경 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심심찮게 눈에 띄는 총 든 군인들.... 이 나라 정치상황이 도대체 어떻길래.
어제 띠깔에서도 총 든 군인들이 투어팀 뒤를 따라다니며 지켜주길래 과테말라 치안 상황이 좋지 않냐고 물어보니 며칠 전에 이곳에서 강도사건이 발생해서 그렇다던데.... 알고 보니 마크가 그 강도사건의 현장에 있었다는군. 강도 두 명이 총을 들고 투어가이드와 앞줄의 관광객들을 털 동안 뒷쪽에 서 있던 마크는 도망쳤는데(마크와 함께 달아났던 두 여자는 겁나서 더 이상 여행 못하겠다고 짐을 쌌단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강도가 사용한 총은 장난감 총이었다나.
버스가 빠이손 강가에 도착하니 배 앞에 철판이 드리워진다.
이게 뭐야? 할 새도 없이 배는 철판에 올라앉아 편안히 강을 건넜다. 폭 20미터 정도의 작은 강이다
바람을 만져보았나요.
부드러운 옥색 바람을 만져보았나요.
시시각각 연초록으로도 변하는 바람을 만져보았나요.
느릿느릿 그 바람 속을 기어가 보았나요.
바람은 그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온 몸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주고
햇살은 마사지 오일처럼 내 몸에 흘러넘쳐요.
풍성한 구름에 휩싸인 기분이 이럴까요?
바람과 한 몸이 되어 뒹굴던 나는 내 몸의 무게조차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어느새 구름을 향해 날아가요.
(흔들리는 차 안에서 삐뚤빼뚤 적어놓은 메모. 지금 보니 좀 웃기네. 동시 같군. ㅎㅎㅎ)
바람과 햇살과 구름만으로도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The happiness is everywhere. I hope you also could feel it wherever you are....
(이건 또 누구에게 쓴 건지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왕창 up되어 있었나보다)
차창 밖으로 아이들이 보인다.
동네 처녀들도...
이건 어느 정당 포스터 같다. 담벼락마다 도배를 했다.
세 시간 정도 달렸나? 오지마을 란킨으로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도시인 꼬반에 도착했다. 플로레스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고 현지인들 냄새가 물씬 풍긴다.
30분 후에 떠난다고 점심 먹고 오라는데 화장실 찾아 삼만리 하다 돌아와보니 다들 어디론가 가버렸다. 할 수 없이 혼자 작은 식당에 들어가 쇼쇼쇼를 하고 (스페인어가 쫌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이 동네에선 잘 안 통하더군) 샌드위치 하나 간신히 얻어먹었다.
이상하게도 한 차에 탄 애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끼리끼리 온 팀들이라 그런가?
한 팀은 차가울 정도로 조용하고(스웨덴 사람들이 좀 그렇다) 다른 한 팀은 내게 익숙지 않은 강한 영국 액센트로 엄청 빠르게 저희끼리 떠들어대고.... 마크는 걔들하고만 논다. 영국에 친척이 있어 몇 번 영국에 다녀온 적 있기 때문에 걔들과는 공통화제가 많더군. 어느 백화점, 어느 동네 등등...
난 자연히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다. 아, 어찌 수습해야 좋단 말인가, 이 왕따 기분을...
코반을 벗어나 1시간 정도 달리니 발 아래로 대단한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녹색 카펫을 깔아놓은 것같은 부드러운 봉우리가 줄지어 달리고 더 멀리는 검은 산들이 병풍을 치고 있다. 그 뒤로는 옥색 하늘과 파란 구름... 그 산봉우리 사이를 하얀 길이 구비구비 휘감아 돌고 있다.
곧 이어 버스는 날 감동시켰던 그 그림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산봉우리을 휘감아 돌며 아래로 아래로....드디어 첩첩산중 마을 란킨에 도착한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 깊은 산중까지 들어와 살게 됐을까. 외부 사람들은 또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오게 됐으며 이 구절양장의 길은 또 어떻게 냈을까.... 너무나 뻔한 질문들인 줄 알면서도 이 외딴 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새삼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을 금할 길이 없다.
버스가 우리를 내려준 곳은 로스 아미고스에서 추천한 숙소 El Retiro 앞. 푸른 초원에 넓게 자리잡은 멋진 이곳을 보고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지만(도미토리 35께쌀)..... 아쉽게도 침대가 다 찼다.
할 수 없이 마을로 10분 정도 걸어올라와서 호텔 레세로에 체크인(하늘색 건물). 길 떠나고 처음 묵어보는 '호텔'이지만 별 하나 반짝이지 않고 공용욕실을 사용하는....호스텔급 호텔이다.
버스 같이 타고 온 영국애들 네 명과 마크가 함께 투숙했다.
호텔뿐 아니라 방까지 8인실에 함께 들었다(침대당 40께쌀). 그때부터 이 애들로부터 느끼고 있던 거리감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애들은 나에게 무관심했던 게 아니라 조심스러워 했던 거였다.
어쨌든 얘들하고는 별로 잘 어울려지지도 않을 것 같고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다. 20대 초반과 공유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나의 한계를 확인하고 씁쓸하게 웃으면 그뿐이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교통편도 드문 탓에 도시와 격리되어 그런지 인디헤나 100%인 이 마을 사람들은 매우 순박하고 친절하다. 세묵 참페이에 가기 위한 숙소였을 뿐인 이 마을이 지금도 그리운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Hola!" 인사를 하고 꼬마들은 졸졸 뒤따라다닌다. 멕시코에서는 휘파람 소리가 '히야까시'로 들렸지만 이곳에서 듣는 휘파람 소리는 그냥 즐거운 새 소리 같다. 멕시코에서 날 짜증나게 만들던 'China!' 소리도 호기심과 호감의 표시로 느껴져 씨익 웃으며 "No, Coreana!"로 응수하게 되고....
가게도 식당도 별로 없는 마을
검은 이끼가 켜켜로 쌓여 있는 마을 꼭대기의 성당.
깜찍한 소녀가 따라오며 자꾸 사진 찍어달라고 한다. 제가 예쁜 줄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름 가지가지 폼 다 잡는다.
아침에만 서는 장인지 날이 저물지도 않았는데 파장이다.
부활절을 앞두고 온 동네의 성당, 교회가 행사 준비에 한창이다.
곡도 연주솜씨도 단조롭지만 천진(!)하게 연습에 열중하는 중년 남성들의 모습... 너무 보기 좋았다.
이튿날 6시에 일어나 동네 한바퀴.
시장에서 만난 중학생. 중국 신쟝의 위구르족 같다.
과테말라 여인들은 레이스로 짠 넓은 망토형 웃도리에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펑퍼짐한 치마를 입는다.
좀 뚱뚱해 보이지만 무지 편하겠다.
마을 정육점
마분지를 오려 세운 듯한 교회
과테말라 아이들은 얼굴이 동그랗고 눈이 예쁘고 키가 작고 몹시 수줍어한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란킨에서의 이튿날 새벽녘.
새벽 4시부터 개와 닭들이 몹시 짖어대 아침잠을 깨우는 건 그렇다 쳐도.... 이 소음은 그 정도가 아니다. 무슨 일이 났는지 온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떠들어대는 것 같다. 견디다 못해 베란다로 나가 보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트럭에 올라타고 있다. 사방을 나무판자로 둘러친 뒷칸에 40명쯤 촘촘히 들어서 있고 그것도 모자라 아직도 올라타고 있다. 마을에 정규 버스라고는 아침 한 차례뿐이니 일찍 일 나가야 하는 사람들을 날라다주는 트럭이 따로 있나보다. 그 이른 시간에 일하러 나가면서도 떠들고 웃고 휘파람 불고... 즐거운가보다.
트럭을 보내고 난 뒤 베란다에 내놓은 의자에 걸터앉아 캄캄한 하늘에 아직도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다리를 흔들흔들 하다가 그만 슬리퍼 한 짝을 길로 빠치고 말았다. 저걸 주으러 나가려면 호텔 리셉션을 깨워야 하는데..... 누가 지나가면 좀 던져 달라고 해야지.
한참을 기다리니 아줌마 하나가 지나간다. 불러세워놓고 쓸리퍼를 가리키며 던지는 시늉을 했더니 깔깔 웃으며 던져주는데 도무지 2층까지 못미친다. 세 번, 네 번.... 다섯번째 시도에 겨우 성공시킨 아줌마는 너무나 기뻐하며 밤하늘이 울리게 깔깔깔... 만족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미소도 잘 짓고 작은 일에도 재밌어 죽는 이 동네 사람들... 대도시 사람들은 할일 없으니까, 혹은 뭘 모르니까 그런 거라고 할지도 모른다. 허나 알면 뭐하나, 이 오지마을에서 빈손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 이 마을에 사는 한 알아도 모른 척 즐겁게 살아가는 게 훨씬 현명한지도 모르지.
이 대목에서 화두처럼 문득 떠오르는 한 마디....
'가난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고 부유는 사람을 오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난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고, 그래서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 못하게 된다. 인간성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다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스스로 경계하는 데, 그리고 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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