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반에 알람 소리 듣고 일어나 칫솔을 물었는데 물이 안 나온다. 마시던 생수로 헹궈내고 세수는 포기.
짐을 챙기고 있는데 버스 운전사가 방까지 와서 부른다. 아직 6시 안 됐는데... 하면서도 뛰어가보니 이미 자리는 다 찼고.. 차다 못해 미어터지려고 한다. 보조의자까지 펴서 25인승 승합차에 45명이 탔으니....
호텔에서 제공하는 투어버스인 줄 알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이네? (지금 생각해보니 그 투어버스는 꼬반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꼬반까지는 동네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나 보다).
마지막에 올라탄 우리 자리는 물론 없다. 서는 것도 꼭꼭 끼어 서 있으니 차가 코너를 돌아도 쓰러질 염려는 없지만 한덩치 하는 마크는 금세 땀 범벅으로 변했다. 불쌍해라...
어제 세묵 참페이에서 잔 영국애들도 이 버스를 탔다. 자기네는 일찍 못 일어나니 세묵 참페이에서 새벽 5시에 떠난다는 버스(그게 바로 이 버스였군)는 포기하겠다더니, 용하군.
플로레스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스웨덴 커플들도 보인다. 쟤들은 어디서 묵고 어디서 놀았을까?
엊저녁 밥 먹으러 갔다가 식당에서 본 이스라엘 애들 일곱 명도 엊저녁처럼 여전히 떠들고 있다.
안개에 젖은 골짜기를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자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내리기 시작... 서 있는 자세가 좀 편하게 나오니 살 것 같다. 그래도 두 시간쯤 서 있자니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자리가 난다 했더니 바로 꼬반이다.
모두 내려 아침 먹으면서 조금 기다리란다. 9시에 안띠구아로 데려다줄 버스가 온다나? 뭐야~ 안 갈아타고 직접 간다더니...
(당시엔 속았다고 생각했던 이 상황도 지금 글을 쓰면서 이해가 됐다. 외지에서 오는 투어버스가 오지마을 란킨까지 들어오는 경우보다는 꼬반-란킨 간을 왕복하는 로컬버스로 연결하는 경우가 더 많은 거다.)
밖엔 비가 몹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동네에선 우산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우비라고 부르기엔 너무 얇아 보이는 비닐우비 아니면 검은 쓰레기봉투나 비료봉투 같은 것에 구멍을 뚫어 목 내고 팔 내고 다닌다. 웬만하면 맞고 다니고... (저 가게는 보나마나 정육점이다. ^^)
꾀죄죄한 거라지만 란킨에 비하면 대단한 번화가다.
덜덜 떨며 버스를 기다리는 우리도 꽤나 꾀죄죄하군.
란초 휴게소. 여전히 시끄러운 이스라엘 애들...ㅋㅋ
뭉쳐다니고 시끄럽고 흥이 나면 버스 안에서 합창까지 하는 애들.... 알고 보면 백발백중 이스라엘 애들이다. 주로 군 복무를 갓 마친..... 그 기분 이해해주고 싶지만 안하무인 떠들어대는 히브리어가 참을 수 없는 소음으로 느껴질 때는 미운 생각까지 든다.(제발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 뭉쳐다닐 때 - 그렇게 안 비쳐지길 바란다.)
웃고 즐기는 것까지는 좋은데 적어도 자기들 갈 길은 챙기면서 즐거워야지?
이스라엘 애들의 목적지는 리오 둘쎄. 그리로 가려면 꼬반에서 우리와 다른 버스를 타야 했는데 얘들이 노는 데 정신 파느라고 그 사실을 란초에서야 안 모양이다. 과테말라 시티와는 거의 반대 방향에 가깝기 때문에 미리 지도를 봐뒀다면, 그리고 가는 길의 표지판을 한 번이라도 눈여겨봤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기사는 얘들이 잘못 탄 걸 알면서도 자기 버스에 그냥 태우고 달렸던 거다. 이제 안띠구아까지 거의 다 왔으니 그냥 앉아 있으면 안띠구아 먼저 내려주고 리오 둘쎄까지 가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하는데 란초에서 안띠구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반, 안띠구아에서 다시 리오 둘쎄까지 서너 시간.... 장난하나?
란초에서 돌아가는 낫겠다고 이스라엘 애들이 다른 버스로 옮겨타고 나니 버스 안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말수도 표정도 없던 스웨덴 애들이 이제 좀 살겠다는 듯 미소를 감추지 않는다.
해발 2천미터급 산봉우리들을 줄줄이 옆에 끼고 조금 더 달리니 과테말라 시티. 하루에 최소 8명이 권총강도에 의해 죽어나간다는 살벌한 도시지만 지나가며 흘낏 봐서는 아기자기 재밌어 보이기만 한다.
도심을 지나 산등성이의 빼곡한 집들을 바라보며 다리를 건너니 휴양지에 들어선 것 같은 조용하고 우아한 길이 나온다. 그리고 드디어 자갈 깐 좁은 길과 콜로니얼풍의 가옥들...
드디어 나도 스페인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예쁘기로 소문난 그 도시에 도착했군.
버스가 우리를 내려준 곳은 소깔로 광장. 스웨덴 커플들은 예약해놓았다는 Yellow Hotel인가로 가고 마크와 함께 론리를 뒤적거리며 숙소 물색에 나선다. 1번 후보 정글파티, 삑~ 너무 시끄럽고 비싸고(70께쌀)... 2번 후보, 다음 골목에 있는 포사다 루이스로 낙점(30께쌀).
시골 외갓집처럼 마당도 넓고, 좁긴 하지만 그래도 독방이고.... 다 좋은데 방 안에 플러그가 없다. 하지만 스페인어 연수를 시작하게 되면 바로 홈스테이로 옮길 꺼니까.
짐을 내려놓고 마당으로 나와 담배를 한대 빼어물었더니 햇빛 아래 한가롭게 기타를 치고 있던 녀석이 자기도 하나 달란다. 줬더니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바치는데.....
"그녀가 내게 담배를 주네... 그녀의 향기는 정말 좋아
그녀가 내게 불을 붙여주네... 그녀의 마음은 정말 따뜻해
오, 그녀는 나의 향기.. 오, 그녀는 나의 온기... "
ㅋㅋ 멀쩡한 녀석..
마당에서 해바라기 하던 사람이 둘 더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충전하기 위해 플러그를 애타게 찾아다니니까 여기는 몇 년 전만 해도 하루에 너덧시간 밖에 전기가 없던 동네다, 방마다 전기 있는 거 좋을 거 없다고 훈계하던 히피 아저씨....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엄마는 나를 콩고에서 만들었고 우리 아빠는 나를 벨기에에서 길렀고 여인은 스위스에서 나를 사랑했지만, 원래 나는 어디에도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고... 그냥 바람에 실려 떠도는 nowhere man이란다. 잘났어 정말... ^^
그리고 레베카.
선글래스로 저 상냥한 눈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꾹 다문 입과 등짝에 손바닥 만하게 새긴 체 게바라 문신만 보고 쫌 살벌(!)하겠구나 생각했다.(사진은 이튿날 함께 간 빠나하첼에서 찍었음)
스페인어 배울 학원부터 빨리 찾아 등록을 해야 월요일부터 바로 시작할 수 있다(오늘은 목요일). 오면서 스페인어 학원 간판은 수없이 봤지만 어디가 좋은지 알 수 있어야지. 우선 밥부터 먹어야겠다.
인터넷에서 본 누들코리아를 찾아 한 달 만에 만난 된장찌개를 마지막 국물까지 달게 긁어먹고 사장님 동생이라는 청년의 소개를 받아 소깔로에서 멀지 않은 학원에 가 상담을 한 후
한 군데 더 가보고 결정하자 싶어 찾아가던 중 레베카를 만났다. 내일 아띠뜰란 갈 건데 같이 가잔다.
수업 시작하면 어차피 평일엔 못 움직일 테니 황금같은 주말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다. 동행 있을 때 후다닥 올라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소문난 '베이글 반'
소깔로 모퉁이에 자리잡은 이 까페의 베이글, 정말 맛있다. 안띠구아를 바로 떠나는 바람에 별로 가본 데가 없는 탓에 안띠구아에서 잊지못할 곳을 꼽으라면 여기를 꼽을 수밖에 없겠다.
따근한 베이글을 반으로 갈라 크림치즈 듬뿍 발라서.... 츠읍!
15께쌀이니 2달러다. 과테말라의 아침식사 치고는 살짝 비싼 감이 있다만...
아침부터 쇼를 했다.
레베카랑 아띠뜰란에 가기로 한 날이라 일찍 일어나 세수를 마치고 나오는데 치렁치렁한 금발에 상냥한 미소를 날리며 한 여인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어디서 왔냐니까 프랑스란다. '어, 저 방에도 프랑스에서 온 여자가 있는데...' 했더니 '그래? 잘됐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 하며 쌩끗.
체크아웃 하기 위해 짐 싸놓고, 레베카 깨워서 같이 아침 먹어야지 했는데 새벽부터 어딜 나간 건지 방이 잠겨 있다. 혼자 나가 베이글 반에서 아침 먹고 소깔로 근처 한 바퀴 돌고 들어오니 어느새 갈 준비를 마친 그녀가 날 기다리고 있다.
"우리 호스텔에 프랑스 여자 하나 들어왔던데, 봤어?" 하니까 "5호실에?" 하더니 깔깔 웃는다.
5호실이라면 레베카 방인데.... 오머머, 나 정말 왜 이러니.
로컬버스. 미국 중고 스쿨버스를 들여온 것이란다.
짐도 많이 싣지만 사람도 짐처럼 쟁여넣는다.
아띠뜰란 호숫가에는 작은 마을들이 많이 있다. 산 뻬드로, 산티아고, 산 후안, 산 마르꼬, 산타 끌라라...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산 뻬드로. 관광객들은 대부분 여행사 버스를 많이 이용하지만(가격도 그리 높지 않고 갈아탈 필요가 없어 편하고..) 우리는 민심도 살필 겸 로컬버스 타고 가기로 했다. 로컬버스는 재래시장 뒷편 공터에 있는 종점에서 출발한다.
높은 산정에서 산정으로 이어지는 길. 뭉게구름과 검푸른 산봉우리가 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달린다. 아름다운 계단식 논 사이로 보따리를 이거나 짊어진 사람들이 오락가락 하고 아담한 황토빛 운동장에서는 꼬마들이 공을 차고 있다. 이 나라도 개발의 여지가 많을 것 같은데... 마른 펌프에 물만 조금 부어준다면 물이 철철 흘러넘칠 것 같은데... 열심히 펌프질을 할까? 물싸움이 먼저 날까?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린 치말떼낭고 정류장
아띠뜰란 호수를 건너는 배의 선착장은 빠나하첼에 있는데 여기까지 가려면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한다. 치말떼낭고에서 내려 로스 엔꾸엔뜨로스행 버스로 바꿔타고 거기서 솔롤라로....솔롤라에서 다시 빠나하첼 행으로 바꿔타야 한다. 다른 구간도 비슷했지만 로스 엔꾸엔뜨로스에서 솔롤라 가는 구간은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아띠뜰란 호수도 보기 전에 숨막혀 죽는 줄 알았다.
나야 놀러온 사람이니까 이런 고생도 재밌어 할 수 있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맨날 이런 버스를 참아내고 사는지....
땀을 바가지로 흘리고 드디어 빠나하첼 도착.
솔롤라에서 빠나하첼로 가는 마지막 구간은 장관이다.
정신없이 쏠려내려가는 비탈길 아래로 하늘 같은 호수와 호수 같은 하늘이 좌악 떨어진다.
호수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산 뻬드로 화산. 산이 멀어 앞에 있는 봉우리와 겹쳐 보인다.
아띠뜰란 호수 선착장 근처에는 (어느 마을이든) 늘 빨래하는 여인들이 있다.
뜻밖의 경치에 놀란 우리는 이곳에서도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우리가 찾아낸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이름의 호스텔. 좁은 골목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위치를 알려드리기 어려우니 이용하실 분은 저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를 사용하실 것. 가장 큰 장점은 3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믿을 수 없는 가격이다.
짐 내려놓고 어둡기 전에 동네 구경을 나갔다.
이날 이후 두 달 동안 이 선명한 인디언 칼라를 눈이 빠질 정도로 봤다.
길 떠날 때의 맹세에 따라 저 싸고 예쁜 것들을 하나도 안 집어들었으니.... 지독한 건지 미련한 건지.
사실 나는 이게 더 사고 싶었다. 이거 우리 나라에도 있는 거잖아?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 싸구려 식당인데 실내장식에 엄청 공을 들였더군.
아띠뜰란 주변마을 상세지도에 푹 빠져 있는 레베카.
남이 안 하는 일, 안 가는 곳도 판단만 서면 서슴없이 나서는 대담함의 바탕에는 치밀한 준비가 있다.
프랑스 북부 산간마을 스키장에서 일을 하며 스키장이 문을 닫는 철만 되면 여행을 다닌다는 그녀는 과테말라와 콜롬비아의 열렬한 팬이다. 벌써 네 번째 방문이라고 한다.
배낭여행자가 갖춰야 할 미덕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이 멋진 여인은 혀에 쇠구슬은 박았지만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주 잘하고, 같은 여행자들보다는 현지인에게서 주로 정보를 얻기 때문에 물 만난 고기처럼 유유히 낯선 동네를 헤엄쳐다닌다. 판단력도 빠르고 과감하지만 뭘 조심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피부를 보나 말하는 태도를 보나 사십 정도 되지 않았나 짐작했더니 올해 서른둘이란다. 피부야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니 그렇다 쳐도... 무엇이 그녀를 성숙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걸까. 어떤 때는 그녀가 내 언니처럼 느껴질 정도다. ^^
만난 지 하루 만에 완전히 레베카에게 빠져버린 만옥이.... 깊은 밤이 호수에 잠기는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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