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쌀쌀맞은 날씨였으니 아마 작년 11월쯤이었을까?
산책길에 데려가려고 목줄을 풀었다 하면 번개같이 아랫집 복실이에게로 달려가던 반달이놈이 드디어 사고를 쳤다.
복실이로 말하자면 여덟 살, 사람 나이로 치면 50대 중반의 노파인데
이제 이팔청춘에 들어선 피끓는 반달이놈, 눈에 뵈는 게 없는지 기회만 되면 그저 한번 올라타보려고 설레발이었다.
하지만 만사가 귀찮다는 듯 평소에도 거의 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허약한 복실이는 반달이놈만 나타나면 더욱 더 깊이 제 집에 쳐박혀 으르렁대니
나이를 초월한 상열지사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날은 웬일인지 제 집을 향해 돌진해온 반달이를 피하기는커녕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복실이, 갑자기 엉덩이를 반달이 쪽으로 홱 돌려댄다.
'웬일이래?' 신기해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복실이 등에 올라탄 반달이..... 목줄을 잡고 있긴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장면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나의 미필적 고의가 약간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순간 당황해서 목줄을 당기니 두 놈 다 죽는 소리를 낸다.
깨갱대는 소리에 복실이의 쥔 아줌마가 뛰어나와 원망 섞인 소리를 한다.
작년초에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 안 그래도 몸 약한 할매개가 고생깨나 했던 모양이다.
몸 둘 바를 몰라 사과에 사과를 거듭했지만 아줌마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는 듯했다.
에휴, 그럼 내가 어째야 하나.. 복실이가 몸을 풀면 미역국이라도 대령해바칠까, 아들놈이 친 사고 수습하는 심정으로 복실이와 그 새끼들까지 책임져야 하는걸까.
고개를 푹 꺾은 채 아무말도 못하고 자리를 뜬 뒤, 이후로는 그 집앞을 지날 때마다 반달이녀석 목줄 꼭 틀어쥐고 줄달음을 치곤 했다.
그리고는 한 달 만에 반달이와 이별을 했다.
이별의 발단은 어느날부터인가 산길로 들어섰다 하면 자취를 감추어 우리로 하여금 온 산을 찾아헤매게 만드는 녀석의 바람끼 때문이었지만
(환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산길을 내려가 차가 쉭쉭 달리는 큰길을 이리저리 건너다니기까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가는 남편의 몸상태 때문에 머지 않아 병원 입원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지방에 사는 오빠에게 데려다주려다가 원래 제가 살던 집에 가서 다시 키우겠느냐고 물으니 반색을 하기에 그 집으로 돌려주었다.
제가 살던 집, 제 냄새가 배어 있는 이부자리, 눈에 익은 밥그릇..... 게다가 제 애비까지 남아 기다리고 있는 곳이니 설마 TV동물농장에 가끔 나오는 개처럼 우리를 못잊어 괴로워하진 않겠지. 마침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집이라 그 후로도 가끔 뻐다귀 등속을 챙겨가보면, 정든 주인 왔다고 길길이 뛰기는 해도 나름 잘 지내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놓였다.
예감대로 머지 않아 (12월초에) 남편이 보름간 입원을 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와보니 복실이가 살던 집 지붕이 제껴져 있고 복실이는 보이지 않는다.
저세상으로 가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지만 평소에 워낙 꼼짝도 안 하고 밥도 잘 안 먹던 녀석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아팠다. 혹시 주인아주머니의 걱정처럼 반달이녀석의 새끼를 가졌다가 잘못된 건 아닌지.....
차마 물어보지도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던 중에 남편이 다시 응급실로 실려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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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되어 다시 돌아온 수동집은 예상했던 만큼 썰렁하진 않았다.
남편이 입던 수면바지를 입고 함께 앉았던 소파에 앉아 함께 걷던 축령산의 낮은 능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져왔다.
햇볕이 따스한 어느날 오후, 집 앞을 거닐고 있는데 새까만 꼬물이 두 녀석이 마구 꼬리를 흔들며 날 따라온다.
빗물 빠지라고 깔아놓은 하수구망조차 무서워서 바로 못 건너고 멀리 돌아서 내게로 온 녀석들, 손톱만한 혀로 내 손을 핥으며 좋아라 하는구나.
어느집에서 요런 이쁜 녀석들을 입양했나? 싶어 뒤를 따라가보니.... 바로 복실이를 키우던 그 집이다.
마침 그집 아이가 나와 놀길래, 강아지들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보니, 세상에나! 복실이 새끼들이란다.
복실이는 죽은 게 아니었다. 그 늙은 몸으로 네 마리나 낳고 집 안에서 요양중이란다.
순간 울컥 터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어찌나 고마운지, 어찌나 고마운지!
복실아, 고맙구나. 살아줘서 고맙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새 생명들, 말썽꾸러기 반달이의 새끼들은 겨울을 딛고 일어서야 할 내게 잊지 못할 힘을 보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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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 모레 수동에서 이사 나옵니다.
집은 아직 안 빠졌지만 하루라도 빨리 식물(같은) 상태를 벗어나 나만의 routine을 확립하기 위해서요.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블러그에도 복귀하렵니다.
모두들 안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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