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국내

남도 한바퀴 2 - 거제

張萬玉 2012. 4. 10. 12:26

거제는 통영에서 100킬로도 채 안 되는 바로 옆동네였다.

통계를 안 봐서 모르겠지만 나그네의 눈으로 보기에는 통영보다는 경제적으로 훨씬 윤기가 도는 듯하다. 

80년대 후반에 주변사람들이 이 동네에 심심찮게 들락거렸기 때문일까. 통영보다는 조금 친숙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비바람이 몰아쳐서 그런지 마음은 여전히 썰렁하다. 게다가 처음 찾아간 곳이 하필 살벌한 반공교육장이라니.

앞으로 주로 시간을 보낼 예정인 해안가와는 거리가 좀 있기도 하고, 비바람 칠 동안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싶어서 선택한 곳인데...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춥고 무섭고 고달프고 필사적인 인간 군상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ㅜ.ㅜ

 

(몇 개 마을에 걸쳐) 수용했던 포로가 17만 3천명에 이르렀다니.... 도무지 상상도 안 되는구나.

대단한 화약고! 북한에서도 이 수용소를 조직하기 위해 김일성 반열에 드는 박사현이라는 거물을 잠입시킬 정도로 중요시했던......

이곳에 '사상'에 목숨을 건 청춘들이 있었다.

'호랑이' 같은 여전사들도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부터 걸어온 중국 젊은이들도 있었다.

'봉기' 시도도 있었고 탈출 시도도 있었고 갈등 속에서 감당해내야 할 협박과 회유도 있었다. 사상투쟁이 불을 뿜었다.

어떤 이는 대한반공청년단이 되었고 어떤 이는 제3국을 선택해 뼈를 묻었다.  

악의적인 왜곡으로 재탄생된 '캠프'를 돌아보는 동안 내 머리 속에는 서너 가지 소설의 플롯이 스쳐지나갔다. 

이곳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면, (그리고 출판시기가 1980년말~1990년대초라면)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당신들의 공급부대가 그대들에게 담배 말아피울 종이조차 주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대들이 삐라로 담배를 말아피우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종이는 유엔군이 특히 제군이 담배를 말아피울 수 있도록 마련한 종이인 것이다.

물론 유엔수용소에서는 유엔군이 말아놓은 담배만 주니까 말아피우거나 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제군은 어서 유엔 편으로 넘어와 전쟁 없는 데서 맘 편히 즐겁게 말아놓은 그 좋은 담배를 피워라." (왼쪽 사진 한글 선동문)

 

 

"(너희) 간부들은 말한다.

“우리가 이를 없애지 않으면 이가 우리를 없앨 것이다.” (중국인민군들이 이 때문에 고생이 많았나보다. 역시 선동의 소재는 친숙한 것으로.. ^^)

간부들 말은 옳다. 그러나 누가 이를 조선땅에 가져왔는가.

바로 공산당인 것이다!

공산당은 인민의 고혈을 빨고 있으며 그들이 곧 이다.

이를 잡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공산당을 모조리 잡아 없애는 것이다.

이를 박멸하자!!" (왼쪽 사진 중국어 선동문... 당시엔 繁字體를 썼구나.)

 

* 왼쪽 삐라는 신선대 부근 해금강 테마박물관에서 본 것임

 

 

인민을 살리고자 하는 '사상'이 인민을 죽인다. 그 사정은 좌파든 우파든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인간이 '사상'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스스로 그렇게 살아간다고 여기는 사람 역시 자신의 삶으로 어떤 '사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사상'이 자신의 존재기반을 침해해올 때 공격적으로 변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예외는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동체험'까지 제공하는 천박스러움에는 침을 뱉고 싶어진다.

과거 전쟁의 상처는 평화와 공존을 위한 사색의 기회로 제시되어야 하지, 시대착오적인 멸공교육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도에 온 김에 특산요리라고 이름 붙은 것은 다 맛보고 가리라 맘먹었던 터에, 멍게비빔밥으로 소문 짜한 '백만석' 식당으로 갔다. 

백만석이라는 이름도 어디서 유래한 거라는 얘길 들은 것 같은데.... 암튼 흡족한 오찬이었다.

멍게가 네모꼴이라 냉동인가? 실망했는데, 살아있는 멍게를 다듬어 양념을 하고 네모꼴로 만들어서 숙성시킨 거라고 한다.

비리기는커녕 향긋한 멍게의 향이 고스란히 살아 입맛을 돋궈준다. 함께 나온 우럭 지리도 시원담백하고.... 

 

바람은 좀 사그라들었지만 빗발은 여전하다.

주말이면 빈 방이 없을지도 몰라 미리 예약해둔 민박을 찾아가느라고 14번 국도 끝까지 달렸다. 여차해수욕장  부근, 거제의 최남단이다.

이바구할 만한 친구와 함께라면 호젓한 숙소가 좋지만, 홀로일 때는 너무 호젓해도 주체하기 어렵다.    

 

음... 너무 호젓해.

 

비바람은 몰아치고 민박 주인장마저 집을 비워 현관에 걸어놓은 열쇠 꺼내어 알아서 입실하니 보일러도 안 넣어놓은 방이 썰렁해 죽을 지경이다.

이부자리 있는 대로 다 꺼내어 펴놓고 일단 커피물을 올려놓은 다음 부산 사는 블러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일면식도 없지만 오래된 글친구라 그런지 옆집 사는 개똥이 엄마 불러대는 것처럼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신기한 블러그 세계!

나처럼 식구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몸 가벼운 친구라 당장 내일 달려오겠다고 한다.

마음도 따땃해지고 민박 쥔장이 돌아왔는지 바닥도 천천히 따뜻해져 오고....

커피 한 잔 마시고 바로 코앞으로 달려드는 해변으로 나가볼까 했지만 비바람은 갈수록 거칠어져 도무지 현관조차 열 엄두가 안 난다.

 

하릴없이 베란다 쪽으로 카메라를 겨누고 똑같은 사진만 찍어댄다.

  

미친 바람에 무너지는 파도소리가 밤새 귓전을 때리고.... 베란다에 걸린 빨래집게도 나도 그 포말에 흠뻑 젖어버렸다. 

내일은 즐거우려나?

혹시 바람이 잦아들어 해금강 가는 배가 뜬다고 해도 도무지 즐거울 것 같지 않으니 이를 어째.

 

 

오, 다행이다. 쾌청하지는 않지만 일단 바람이 잦아들었다.

도장선착장에 전화를 해보니 배가 뜰 거란다. 자, 그럼 힘 내서! 시동 거시고오~~  ==3 ==3 ==3

 

 

멀리 있는 나폴리 미항이나 소렌토를 그릴 필요 있을까.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저 빛난 햇빛...'  

밝고 따사로운 햇님은 골방에 갇혀 우중충했던 내 마음을 단번에 찬란한 코발트색 바다로 이끌어주었다.

 

내가 본 (외관이)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  전망대까지 갖춘 화장실은 처음 봤다. ^^

게다가 흰 건물에 아침햇살이 음영을 드리우니 이보다 더 신선할 수 없다. 

 

저기가 소문 짜한 '바람의 언덕'

풍차 하나 올렸을 뿐인데.... 

 

풍차를 만나러 가는 즐거운 발걸음.

 

나도 풍차를 만났노라! (근데 풍차가 없어~! 쌍칼아저씨 버전..^^)

 

이제 풍차를 뒤로 하고 해금강을 경유하여 외도로 가는 길.

 

갈매기들이 바짝 따라온다. 새를 싫어하는 나지만 덩달아 즐겁다.

 

재작년 이맘 때 카프리섬을 돌고 있었지.

바로 그 섬들, 바로 그 물빛이다.  

 

  

 

 

 

외도는 곳곳에 정성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그 조경 때문에 특별한 감흥을 받은 건 아니다.

감동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왔다.

 

"외도 개발 40년을 기념하며....

1969년, 낚시를 좋아했던 남편이 태풍으로 하룻밤을 머문 것이 이 섬과의 첫 인연이 되었습니다.

외도는 면적 43,861평, 해발 80미터 높이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척박한 섬이었습니다. 남편은 갈 수 없는 고향(평안남도 순천)을 그리며 제2의 고향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작은 선착장 만드는 데도 6번의 실패와 좌절, 해마다 태풍과의 싸움에서 절망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지만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꿈과 희망을 키워왔던 나날들이 오늘날 역사가 되고 정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밀감농장 조성을 위해 심은 밀감 3천 그루와 방풍림 8천그루는 한파로 실패했지만

그때의 빈 울타리가 남아 현재의 아름다운 천국의 계단이 되었고, 돼지 80마리를 키우던 운동장이 비너스 가든으로, 고구마밭이 선인장 동산으로 변모하여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이루었습니다.(후략) "

 

 

꿈을 꾸는 사람이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보는 것만한 (거기에 간난과 싸워가는 과정까지 있다면) 감동이 있을까.

나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되새겨보게 만드는, 아울러 작은 결심이라도 하게 만드는 내 인생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인간극장이 좋다. ^^)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비문에 잠깐 울컥.

당시엔 몰랐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남편 글을 인쇄물로 남긴 건 확실히 잘한 일 같다.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고 한 일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나를 위한 한 일이기도 했다.  

 

 

여기는 도장선착장 건너편 쪽에 있는 신선대 (가는 길).

 

염소 한 마리가 한가롭게 길목을 지키고 있다.

 

 

 

여기가 신선대.

全景을 담으려면 뒤로 좀 떨어져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가는 길목 난간이 시야를 가리고, 그렇다고 바다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공....

멋진 사진은 전문가에게 넘기고 나는 내 여정을 기록하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신선대 위쪽에 있는 해금강테마박물관이다. 부산에서 올 친구 맞으러나갈 시간 때우려고 들어갔다.

 

이 박물관에서 내 시선을 끈 것은 표어와 삐라들뿐이었다.

 

그녀가 왔다.

동갑이라고 알고 있는데 나보다 훨씬 감각이 젊은 멋쟁이다.

그녀도 내가 생각보다 작고 귀엽다고 한다. 내 글에서 뭔가 덩치 좋고 기운찬 느낌이 넘쳐나는가? ㅎㅎㅎ 

나 역시 그녀를 쿨하고 도도한 캐릭터로 느껴왔는데,

내 또래의 아줌마들처럼 바리바리 싸들고온 간식보따리와 반가움을 감추지 않는 편안한 수다가 그 선입견을 단번에 깨버렸다.

 

솔직하고 위트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시간을 잊게 한다. 

게다가 우리에겐 동시대를 살아온 동류의식과 함께 '나름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공통 코드가 있었다.  

쓸쓸했던 숙소가 밤새 불을 지폈다.

 

그리고 다음날도 찬란한 아침.

여차에서 홍포 가는 비포장도로의 절경에 대해 들은 바 있기에, 울퉁불퉁 꼬불꼬불한 데다 곳곳에 고인 빗물웅덩이, 주상절리가 진행되고 있는 위태로운 절벽길을

구태여 기어올라가니 꿈같은 전망이 펼쳐졌다.

(진달래꽃 흐드러진 절벽길 사진을 찍었는데 용량이 왜 그리 크게 찍혔는지, 다음블러그의 사진올리기 기능이 감당을 못한다)

 

멀리 소매물도, 대매물도... 기타 등등의 섬이 한 눈에 들어오는 여차 - 홍포간 비포장 도로가 한려수도 관광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다음에 이곳에 (여럿이) 오게 된다면 소매물도에 머물면서 꼭 낚시맛을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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