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일 패스를 이용하여 승차권을 끊은 다음에는 (항공권을 끊고 공항에서 보딩패스를 받는 것처럼) 유레일 패스 사용란에 사용하는 날짜를 적어야 하는데
나는 그걸 직원이 적어줘야 하는 줄 알고 적지 않고 있었다.
이럴 경우 기차 안에서 검표원에게 걸리면 (대개는 즉석에서 적으라고 하지만) 원칙적으로 벌금 50유로를 물어야 한다.
헌데 운 좋게도 검표하는 아저씨가 그 공란을 안 챙기고 지나갔다. 결과적으로 15일을 사용할 수 있는 패스로 16일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단 얘기지.
당시 유레일 패스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나는 검표하는 아저씨의 실수조차도 못알아치리고 있다가 이틀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그냥 썩힐 순 없고...... 뒀다 쓸까 궁리하다가 그냥 베네치아 당일치기를 하기로 했다.
사실 베네치아에 대해서는 영화와 사진으로 많이 봐왔던 터라 별로 환상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진행하려는 방향과 반대쪽에 있고 너무 관광지스러울 것 같아 계획에 넣지도 않았다.
아무리 공짜가 좋아도 시간도 없어서 당일치기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헐레벌떡 다녀올 필요가 있을까?
떠나기 직전까지 머리 굴리다가 그냥 기차역으로 갔더니 마침 8시에 출발하는 베네치아행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에라, 승차!
베니스에 도착하면 11시, 저녁에 숙소 애들과 밥 먹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면 4시 반에는 돌아가는 기차를 타야겠는데
그러면 주어진 시간은 딱 다섯 시간뿐이다. 나도 모르겠다, 바다 냄새나 맡고 가지 뭐.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역시 감흥도 따라주지 않는다. 정말 딱 바다냄새만 맡고 왔다. ^^
지도도 무용지물인 복잡한 길을 헷갈리는 화살표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가 다리 아프면 쉬고, 사진 찍고....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베네치아의 매력을 좀더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만
내게는 중국의 저우좡(周庄이나 쑤저우(蘇州) 수로변 마을이 더 운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도 변변찮으니 곤돌라 사공 아저씨랑 공예품이나 몇 개 올릴께요.)
세비야에 산다는 루이스와 노엘리아. 유럽여행 3주차란다.
연가 2주 내고 부활절 휴가까지 이어서 모로코까지 다녀왔다길래 잽싸게 모로코 정보 챙기고....
한 달쯤 후에 나도 세비야 간다니까 세비야 오면 자기네 집에 머물어도 좋다고, 세비야 외곽에 살지만 연락하면 데리러 나와주겠다고 한다.
한 달 후의 일이니 약속할 수는 없어도 말만으로도 고마워 전화번호 일단 챙겨놓고, 친구 생기면 주려고 갖고다니던 한복인형 자석 한 쌍을 줬더니 너무 좋아한다.
한국 드라마도 뭔가 보았다고 하고,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질문이 많다.
여행하기 좋으냐, 대졸 초임이 어느 정도 되냐, 부모를 모시고 사는 집이 많으냐, 북한과 왕래할 수 있느냐 등등
맞은편 옆자리에 앉은 눈썹 짙고 눈이 부엉이처럼 깊은 아저씨가 나를 유심히 쳐다보길래 동양여자 처음 보나 했는데
역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내 옆으로 오더니, '통일을 하려면 미국과 손을 끊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한 마디 던지고 간다.
내가 스페인 부부에게 '통일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하는 얘길 들은 것 같다.
118개의 섬들을 400여 개의 다리로 이어놓은 이 도시는 수로를 교통로로, 수상버스, 수상택시를 주요한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567년에 이민족에 쫓긴 피난민들이 마을을 만들었다고 하니 오래되긴 진짜 오래된 도시다.
수상택시가 관광용만은 아닌 모양이다.
물가를 벗어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광장에 장이 섰다.
물에서 자라는 식물인 듯....
식품들과 함께 있길래 먹는 거냐고 물어보니 주인도 아닌 아저씨가 나서서 매우 적극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설명을 해주시는데....
미안하지만 한 마디도 못알아먹겠다. 영어를 한 게 맞는지도 모르겠공... (어쨌든 고마워유.. ^^)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니 이상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기가 작성한 듯한 벽보 앞에서 토끼머리띠를 한 아가씨가 뭐라뭐라 연설을 하는 것도 궁금해죽겠는데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이 갑자기 아가씨에게 마요네즈와 케첩, 밀가루 등등을 마구 뿌려주신다.
구경꾼들에게 물어보니 오늘이 대학 졸업식 날이라네. (졸업식 후 밀가루 세례는 만국공통?)
웬지 가면들은 헛된 욕망, 데카당, 치정, 음모,... 등과 연결되는 소품 같다.
17, 8 세기 타락한 유럽 귀족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보다. ^^
가끔은 현대 사회의 패션풍속도 가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화장, 거동을 불편하게 만드는 킬힐, 미니스커트, 치렁치렁한 악세서리, 심지어 입에 발린 매너까지.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드러내기 어렵게 된 요즘 세상도 타락한 사교장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나, 하는.... 가면 하나 익숙하게 챙기지 못하는 삐딱이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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