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유럽

이탈리아 5 - 카프리, 나폴리

張萬玉 2009. 3. 3. 10:15

# 카프리

 

이탈리아 남부 해안이 워낙 아름답다 보니 항구마다 해변마다 음악과 영화가 깃들어 있다.

지금 가고 있는 카프리는 어릴 때 부르던 노래('그리운 추억의 섬 카프리'로 시작해서 '내 꿈을 부르네 카프리'로 끝나는) 때문에 상상 속 푸른 섬으로 남아 있는 곳.

게다가 포시타노가 배경인 줄 알았던 영화 '일 포스티노'의 배경이 사실은 카프리 섬이었다는 것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어 카프리에 대한 기대는 더 커졌다.

본 지 오래 돼어 줄거리는 거의 잊었지만 그 이미지만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한다. 햇살에 반짝이던 에머랄드 빛 바다와 시인이 살던 절벽 위의 별장....

 

버스는 '돌아오라 소렌토'의 그 소렌토로 돌아간다. 

사실 '돌아오라'고 부르지 않아도 남부 해안지역을 여행하려는 사람들은 소렌토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남부 해안지역의 교통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선으로 보면 최적의 숙박지는 소렌토가 될 터.... 그러다 보니 로맨스도 많지 않겠나? ^^ 

소렌토에서 내려 항구로 가는 길을 물어보니 기차역 등지고 왼쪽편에 있는 성당 광장을 찾아가 성당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내려가라는데....

길이 상당히 요상하다. 막다른 길을 만나 남의 집 정원을 통해 빠져나가기도 하고....(나를 이끈 길은 아마 공식적인 루트가 아니었을 것이다) 

잠깐 방향을 잃긴 했지만 무조건 바다쪽을 보고 내려가다 보니 항구가 나왔다.

 

나폴리 역시 가파른 암벽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는 걸 해변으로 갈팡질팡 내려와서야 알게 됐다.

 

 

이탈리아의 항구 어디에서나 바다와 햇살과 이별을 읊조리는 노래가 얼마든지 만들어질 것 같다.

안 그럴 수 있을까? 배 기다리며 잠시 서 있는 동안 이 아마추어의 가슴에도 詩興이 樂興이 마구 흘러넘치는데....^^

 

 

시간은 이미 오후 2시가 다 되어간다. 바로 배를 탄다 해도 카프리에 도착하면 세 시 가까이 될 텐데 과연 푸른동굴 가는 배가 있을까?

카프리에서 소렌토로 돌아오는 막배가 6시 45분이고 항해시간이 1시간이라는데, 소렌토항에서도 버스터미널까지 20분 가량 걸어야 하니 

밤 8시 반 막차라는 포시타노행 버스 놓쳐버리면 어쩌나?

푸른동굴에 못 간다면 굳이 이 비싼 배까지 타고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소렌토 해안도 충분히 아름답잖아.

 

그러다 깨달았다. 숙소 예약하고 다니는 여행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소심해졌음을..... 

아말피에서 두 시간 넘게 소렌토까지 달려와놓고 웬 생각이 그리 많노? 못돌아가면 소렌토에서 자면 되잖아, 바보 아냐? 

그래, 푸른동굴 못 가면 이나카프리 산 꼭대기에라도 올라가지 뭐.

 

'잔잔한 바다 위로 저 배는 떠나가며 노래를 부르니 나폴리(아니 소렌토..^^)라네~'

 

카프리 항에 닿자마자 푸른동굴 가는 보트 티켓 매표소로 뛰었지만 이미 배는 떠났다. (오후 2시가 막배란다. 현재 시각 2시 40분).

실망하고 돌아서는데 한국사람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개인영업 보트꾼들과 네고하는 게 보인다. 얼른 뛰어가서 꼬리에 붙었다.

셋이서 100유로 하자는 데까지는 좋았는데 푸른동굴은 안 가고 다른 view point 네 군데를 돈다네.

어떻게 할까 의논중인데, 갑자기 한 사람이 좀 떨어진 곳에서 승선 준비를 하고 있는 서양노인 관광단에게 뛰어가 쏼라쏼라... 그러더니 돌아와  

어차피 저 팀과 같은 코스니 저 팀에 낑겨 가잔다. 가이드를 꼬여 1인당 16유로 내는 걸로 합의 봐놨다고.....

 

 

원래 단체팀은 배타적이기 마련인데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는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자기네 팀에 불쑥 끼어든 동양인 3인조를 열렬히 환영해준다.

특히 가운데 버티고 앉은 할아버지....말도 안 통하는데 계속 장난을 걸면서 이 배에서 유일하게 영어가 되는 자기 부인에게 일일이 통역하라고 수선을 떤다.

박씨가 좀 나이 들어뵈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내 남편이냐고 묻길래 어이가 없어서 내 아들이라니까 박장대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부터 내 딸이란다.

그러고는 줄곧 '딸아, 딸아~' 불러대며 열심히 챙기니, 이거야 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유럽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도도하고 동양인을 실어할 거라는) 오스트리아 사람에 대한 편견에 약간 수정을 가해얄까보다. ^^     

 

 

 

청하지도 않았는데 기꺼이 가이드의 독일어 설명을 통역해주는 할머니 덕분에 잠수함 닮은 바위, 코끼리 닮은 바위... 해가면서

사진을 엄청 찍긴 했는데 배가 너무 흔들리는 통에 몇 장 못 건졌다.ㅜ.ㅜ 

지구 곳곳의 석회암 노년지형을 하나님은 참 다양하게도 주물러놓으셨더군. 계림에 장가계에 하롱베이에,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 해안에...... 

 

 

이 별장이었던가? 아니면 다른 곳이었던가?(산꼭대기 외진 봉우리에 지어진 별장이 워낙 많아서....)

'스킨'(아마도 '양들의 침묵?')의 작가가 사는 별장이라고 했다.

저 별장에 사는 사람은 생필품을 어떻게 공급받느냐고 물었더니 직접 발로 나른다고. (하긴 거기 사는 사람이 직접 나르겠나?)

그 불편을 감수하고 왜 거기서 살까? 했더니 그게 다 부동산 투자란다. 엄청나게 비싸다네. 

 

넘치는 태양, 넘치는 코발트빛....

눈으로는 호강했지만 볼만한 사진 몇장 남기지 못했던 아쉬운 뱃길...   

 

 

아직 해 떨어지기 전이라 버스 타고 이나카프리로 가볼까 했는데....

잠깐 까페에 들어가 통성명이나 하자는 것이 그만 막배 시간까지 이어져버렸다. 

럼에 적신 케익에 아말피에서 사온 리몬첼로를 곁들이니 알큰하게 취해오는 게 분위기 좋드만.

박씨와는 띠동갑, 김씨와는 거의 띠띠동갑이지만 동갑내기들처럼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는 게.... 여행길 아니면 가능한 일인가 말이지.     

 

 

유럽여행 까페인 '유랑'의 '동행구함' 게시판을 통해 만난 사이인 김씨와 박씨는 정말 환상의 콤비였다. 컨셉은 중위와 일병. ^^

연장자이자 사회경험 많은 박씨가 노선을 정하면 영어가 되고 부지런한 김씨가 실무를 담당한다.

한달 일정이며 현재 석 주째라고 했다. 훈훈한 얘기는 여행길의 모험담을 넘어 어느새 개인사까지 넘나들고 있었다.

박씨는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던 터라 모처럼 나선 기회에 원없이 돈좀 써볼 생각이라고 큰소리를 땅땅 친다.(컨셉은 마초.. ㅋㅋ)

얌전해 보이는 김씨는 자기 속의 또다른 모습을 찾는 중인지 면도도 안 하고 나름 터프한 액션을 구사해 마지 않는데(컨셉은 나쁜 남자 ㅋㅋ)

길들여진 사회 속에서는 분명 밉상일 캐릭터들이 여행길에서는 귀엽게만 느껴지니 이 역시 여행길에서나 가능한 마술이 아닐까.

 

일탈은 확실히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에너지의 원천인 모양이다. 

짜여진 틀을 벗어나 한발을 내딛는 순간 솟구치는 엔돌핀! 그 힘으로 연애도 하고 예술도 하고 감히 싸움질도 하고 인생진로도 바꾼다.    

두 사람 모두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던지고 창업을 준비하는 입장이다.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겠지만 패기와 열정이 그 불안보다 분명히 더 커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이 여행을 통해 큰 에너지와 자신감을 충전하고 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김씨는 남편 회사의 주거래처인 삼성 계열사 출신이다. 남편을 직접 본 적은 없다는데 이름은 알고 있더군. 세상 참 좁아..   

 

소렌토로 돌아오는 배에서 만난 집시풍의 독일커플. 입고 있는 옷이 그 어디라던가, 자기네 고향의 전통 복장이라고  한다.

 

포시타노로 돌아가는 막차를 놓칠까봐 걱정인데 굵은 소낙비까지 퍼부어주신다.

아저씨들과 헤어지자마자 우중질주....  좀 젖긴 했지만 무사히 포지타노행 버스에 올라타는 데 성공.

 

숙소로 돌아가보니 오! 방에 누가 들어왔다.

사람은 없지만 트렁크에 붙은 꼬리표가 말해준다. 오늘밤 네 룸메이트는 한국인 여성이라고...

귀곡산장에서 홀로 하룻밤을 지낸 후라 반가움과 궁금함이 몰려왔다. 

학생일까 직장인일까. 나처럼 혼자 다니는 걸 보니 개성이 쪼매 강한 여자겠군.

 

자정 가까운 시간에 드디어 룸메이트가 들어왔는데..... 수수하고 단정해보이는 이 아가씨, 눈인사만 하고는 조용히 침대로 들어가더니 노트북을 펼친다.

20대말? 30대초? 딱 우리 아들뻘이다. 하지만 내겐 이런 청춘들이 60대나 70대의 연장자보다 더 조심스럽다. 

'아유, 한국분이셨네요' 하는 나의 간단한 알은체조차도 호들갑스럽게 느껴질 만큼 조용한 아가씨.

머쓱해진 나도 그냥 말을 삼킨다.

어젯밤에 이 큰 호텔에서 혼자 보냈다는 둥 새벽에 폭우가 몹시 쏟아지는 양이 혼자 보기 아까운 장관이었다는 둥....내게는 꽤 특별했던 경험들도

이 쿨한 아가씨 앞에서는 시든 꽃처럼 져버릴 것 같더군. 하지만 이 아가씨도 혼자만의 시공간을 즐기고 싶어서 떠난 길일 테지. 이해할께.

노트북에 이어폰 꽂고 밤 새울 채비에 들어가는 룸메이트로부터 등을 돌리고 잠을 청하는 마음이 오히려 혼자인 것보다 더 외롭다. 

 

# 나폴리

 

어제와는 달리 넘치는 햇살로 열린 아침. 한밤중인 룸메이트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배낭을 꾸려 호스텔을 나온다.

네번째 지나기는 이 길도 이제 마지막이로군. 

 

나폴리행 국철에 올라앉아 본격적으로 풍악을 울리려고 MP3 메뉴를 뒤지고 있는데 누군가 본지오르노! 하고 인사를 던진다.

엇, 김씨와 박씨다. 인연은 인연인가베. 헤어졌던 누님을 만난 양 반가워하면서 피렌체행 기차시간을 묻는다. 웬만하면 나폴리에서 같이 놀다 가라고.... 

마침 나도 오후 2시 50분표를 끊어놓고 엘모성에 올라갈 참이었는데 잘됐네.

나폴리 역에 배낭을 맡겨놓고 메트로로 바꿔탔는데 (탈 때는 몰랐는데) 내릴 때 보니 무임승차를 했더군. 

표를 사긴 했는데 개찰구가 따로 없으니 승차시간을 안 찍고 그냥 들어간 거다. 

이 '선진적'인 시스템이 몸에 배지 않은 탓에 본의 아닌 무임승차를 여러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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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나온 김에 자백하자면 사실 고의적인 무임승차도 있었다. 

엘모성으로 올라갈 때는 푸니쿨라로 올라갔지만 내려올 때는 버스를 탔는데...

이탈리아에서 버스를 타려면 타바키(담배가게) 등 버스정류장 근처 매점에서 티켓을 사서 승차한 뒤 버스에 설치된 인식기에 찍어야 한다.

헌데 버스는 왔고 버스티켓 파는 곳은 한참 위쪽에 있고... 해서 일단 빈손으로 올라탔던 것이다.

티켓인식기는 버스 중간쯤에 있는 데다 자발적으로 찍게 되어 있으니 안 찍는다고 뭐랄 사람도 없는 이 유혹적인 상황에서

김씨와 박씨가 나폴리 3일권 티켓을 일부러 보이게끔 꺼내들고 빨리 들어가라고 내 등을 미는 거다. 상황 끝!

사실 그때는 표를 끊지 못했을 경우 어떡해야 하는지 몰라 난감한 상황이었으니 그게 구차한 변명이 될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표를 미리 사지 못한 경우엔 버스 기사에게 직접 돈을 내면 된다. (타바키보다 약간 비싸게 받는다)      

 

무임승차라고 해봐야 겨우 1~3유로 사이의 푼돈이지만 사실 굵직한 무임승차도 한번 했다.

이것도 처음엔 몰라서 시작된 일인데 알게 된 다음에도 고치지 않았으니 고의적인 무임승차... 맞다.

유레일 패스를 이용하여 승차권을 끊은 다음에는 (항공권을 끊고 공항에서 보딩패스를 받는 것처럼) 유레일 패스 사용란에 사용하는 날짜를 적어야 하는데

나는 그걸 직원이 적어줘야 하는 줄 알고 적지 않고 있었다. 

이럴 경우 기차 안에서 검표원에게 걸리면 (대개는 즉석에서 적으라고 하지만) 원칙적으로 벌금 50유로를 물어야 한다. 

헌데 나는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는지 검표하는 아저씨가 그 공란을 못 챙기고 지나갔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15일을 사용할 수 있는 패스로 16일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단 얘기지. 

당시 유레일 패스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나는 검표하는 아저씨의 실수조차도 못알아치리고 있었으니 애초에 무임승차를 의도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헌데 이틀 후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그럼 어디로 하루 더 뛸까 즐거운 궁리를 하다가... 오직 공짜로 얻게 된 표가 아깝다는 이유로 계획에 없던 베니스 당일치기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결국 적극적인 무임승차를 하고 만 거지. (아이구, 자랑이다~)   

 

요즘은 개찰구에서 일일이 표 검사 안 하는 것이 선진국들의 대세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KTX 경우처럼.

듣기론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액보다 개찰구의 검표 인원 인건비가 훨씬 많다는 한 직원의 조사결과가 채택되었다나.  

김씨도 언젠가 기차여행중에 지갑을 잃어버려 역무원에게 사정을 했더니 '이 양반이 사정이 이러이러하게 됐으니 무임승차를 할 때 불편이 없도록 도와주시오.' 라는 내용의 증명서를 발급해주어 무사히 서울로 돌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됐다는 얘긴데....간만에 듣는 신선한 얘기다. 

 

 

메트로에서 푸니쿨라로 갈아탔는데 '얌모, 얌모!' 몇번 외치기도 전에 벌써 엘모 성이란다.

1392년대에 지어진 이 요새는 이미 수차례의 개축으로 원래의 모습도 아닌 데다 그 자체로는 덩치만 컸지 별로 볼 건 없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퍼온 세인트 엘모 요새의 전경.

이런 전경을 잡을 수 있는 데가 도대체 어디지?

원경을 찍자니 카메라가 후져, 요새 안을 찍은 사진은 재미없어....

할 수 없이 서로서로 찍어주다 보니 이런 사진도 찍혔다.(박씨를 찍고 있는 나를 김씨가 찍었다. ㅎㅎ) 

 

 

발 붙일 데가 그렇게 없었단 말이냐?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말 걸기 놀이에 푹 빠진 김씨. ^^

카프리 보트에서 내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걸 보고 감명받았다고, 자기도 지금부터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보겠단다. 

내가 남미 갔을 때 딱 저랬지. 사실 이번 여행에선 거의 입 닫고 다닌 편인데.....(푼수는 면했지만 좀 심심하긴 하다. ^^ )    

 

 

엘모 성은 심심하지만 사람 구경은 안 심심하다. (카메라를 의식하자 더 열렬해지는 커플 ^^)  

 

 

나폴리 시내로 들어와 작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김씨와 내가 시킨 피자는 그저그랬지만 박씨가 시킨 봉골레 스파게티는 최고였다.

감질나게 한 가닥 뺏어먹어보니 후회와 부러움 때문인지 정말 미칠듯이 맛있더군. ㅋㅋㅋ 

 

좀도둑으로 악명이 높다고 해서 살짝 긴장했는데 뭐 조심이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스쳐간 도시 나폴리.

그래도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아냈다. 나폴리에는 나폴리 피자가 있고 아름다운 항구가 있다.

소문대로 소매치기가 많은지 적은지는 잘 모르겠다. 당해보지 않아서. ^^  

언젠가 여기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건너가보면 좋겠다 싶지만.... 다시 그런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