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의 재발견
부부간에 '다르다'는 문제는 대개 기싸움과 더불어 신혼초에 격렬하게 다뤄지는 주제일 거다. 어떻게 이제까지 나는 이 문제에 걸려넘어지지 않고 무사하게 왔는지 참 신기하기도 하다.
아들넘이 장성하니 그애를 통해 남편의 '개성'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남자의 세계가 여자의 세계와 그렇게 멀리 있었나... 하는 새삼스러운 신기함도 포함하여...ㅎㅎ)
아, 물론 익히 알고 있던 성격들이다. 그러나 그의 '개성'이란 것들이 나의 '개성'과 어울리는 게 그리 녹녹한 일만은 아니며, 그것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이미 사반세기 가까이 살아놓고 새삼스레 깨닫는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다.
아들넘을 통해 재발견하는 남편의 성격은.... 아마 그 시절에 시시콜콜 다 꺼내놓고 서로 맞춰살자 했다간 아마 마이클 더글라스가 나왔던 영화 '장미의 전쟁' 못지 않은 심각한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닮은 점도 많지만 다른 점이 훨씬 더 많고,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우리 두 사람 모두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는 독선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에겐 남편의 성격을 그리 강하게 인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0년도 넘게 산 어느날 집안이 모였을 때 밥상머리에서 시누이들이 '오빠는 집안의 독재자였다, 찍히면 무지하게 고달팠다'고 흉보는 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으니... 시누이들 얘기로는 '오빠가 결혼 후에 아주 딴사람이 되었단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낌새도 못채고 살았으니 그동안 남편이 소리없이 무지하게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년 반 가량 떨어져 있던 아들넘과 살기 시작한 요즈음 그 당나귀 고집과 완벽주의적인 성격, 사나운 자존심, 게다가 그 나이다운 혈기를 느끼며, 맞아... 저게 그 냥반 성격인데.... 완전히 풀어져서 푼수깨나 떨었던 마누라를 어떻게 참아줬을까 싶은 생각이 새삼스럽다. (물론 나도 많이 참았을 테지... 허나 힘들지 않았기에 기억도 별로 남아있지 않다)
남편도 나에게 감사해야 하고 나도 남편에게 감사해야 한다. 신기한 것은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무탈하고 만족하며 살아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며 살았나보다.
그런데 왜 아빠의 '개성'을 판박이하다시피 한 아들넘과는 왜 이리 불편한지....
견디다 못해 한번 분석을 해본다.
# 사랑이 덜해서인가?
남편의 '개성'에 대해서는 '존중' 내지 '포기'였겠지만 이조차도 의식적으로 노력한 기억은 없다.
아마 함께 바라보는 목표에 대한 합심 때문에, 그것을 향한 열정 때문에... 사소한 점들은 모두 묶어서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둔 것 같다. 그렇게 10년을 넘기고 나니 그것들을 찾아내 고주알 미주알 털어보는 일은 굳이 그럴 필요도 느낄 수 없이 둥글둥글 모가 닳아버렸다.
요즘 젊은세대들이 흘러넘칠 정도로 구가하는 '서로에 대한 열중'이 덜했기 때문인 건 맞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성공적인 결혼생활'이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아쉬움이 있다면-- 무심한 그이야 별로 없을 테지만 곰살맞은 나로서는-- 향수하고 싶었던 그 '사소한 열중'에 대한 열정'을 바람결에 흘려보냈구나....싶은 미련이랄까. 그렇다 해도 '관계'에 경도되는 경향이 다분한 나같은 사람에겐 오히려 내가 취한 노선이 옳았다 싶기도 하다.
뒤집어서
아들의 경우는 어떤가. '존중' 내지 '포기(좋은 말로 하면 이해)'가 안 되는 이유 역시 사랑(열중?)이 지나쳐서인가? 자아가 완고히 확립된 뒤에 만난 노총각 남편과는 달리, 아들에게는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직도 '개간의 여지가 많은 경작지처럼 여겨지는' 집착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가?
사랑 과잉인가? 아니면 기다려주고 포용하는 '큰사랑'을 아직 내가 배우지 못한 탓인가?
# '개성'이라고?.... '쳇!!'
다른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세대차까지 겹쳐 하마트면 '틀린 게'라고 말할 뻔한다)
일일이 읊어봐야 자칫 흉보는 쪽으로 흐를 위험이 있고... 블러그에서 벗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니.. ㅎㅎ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누구에게나 외향적인 면과 내성적인 면이 공존한다. 어떤 경향이 더 많은가에 따라 어떤 성격이라고 표현이 되는 것일 텐데, 나는 외향적인 경향을 많이 가졌지만 남편과 아들은 내성적인 경향이 상당히 많다.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동력을 얻는 데 반해 내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동력을 얻는다. 따라서 외향적인 성격은 사람들을 쉽게 사귀고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편이라 사회생활이 쉽고 관심의 폭이 넓을 가능성이 많은 데 비해 내성적인 성격은 생각이 깊으나 고집이 세고 폐쇄적으로 흐를 수 있다. (이것은 외향적인 관점이 익숙한 내가 하는 평가이니 그 반대의 장점이나 단점도 성립한다.)
아마 울 아들넘이나 남편은 그 반대의 측면에서 나를 어이없게 느낄 때가 많을 것이지만 어쨌든 내 방식으로 살아온 나의 경험은 자꾸 낯설어 보이는 아들의 삶에 간섭을 하고 싶어한다. 나의 미욱함에 발등을 찧으면서도.....
답을 안다고 다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은가.
남편 때는 잘 넘겼구만.... 아들넘 때는 자꾸만 걸려넘어진다.
명심해라.
스물 세 살.... 그의 앞에는 자신만의 영지가 펼쳐져 있다.
부모 눈엔 그 밭에 무성한 잡초, 거친 돌밭이 뻔히 보인다 해도 그것을 갈아 옥토로 만드는 건 그의 몫이다. 경운기가 옆에 있는데 맨몸에 멍에를 메고 직접 밭을 가는 미련을 떨든, 모내기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뒤늦게 장마비 맞아가며 모판 만드는 게으름이 됐든... 그걸 어떻게 말리겠는가.
그냥 놓아버려라.
그래야 사나이 자신감이 산다고 했다.
# 싸우지 말라니까?
열 발짝 양보해서 '개성'이라고 해두자.
허나 '개성'이라고 해도 그것조차 맞춰내기가 쉽지 않다. 천성이 아들넘과 아주 비슷한 그 아비와 살 때는 혹 부딪힐 일이 있었어도 마음을 다칠 정도로 부딪쳐본 기억이 없다. 어른 대 어른으로 만나서 우리는 제법 매너가 있었던 것이다. 허나 이녀석이 내게 자신의 개성을 주장하는 방법은 참으로 모질기도 하다.
남편의 경우는 옆눈질하기에도 바쁜 세월이었으니 그저그렇게 지나쳐주었는데, 아들에게는 왜 그게 잘 안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잔소리쟁이 엄마에게 적어도 하루의 1/3을 노출해야 하는 아들네미로서는 나름대로 자신의 '개성'을 수호할 방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아들녀석이 내게 하는 거 보면 자신만의 '개성'을 인정받기 위해 '독립투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때론 위악적인 태도도 서슴치 않는다.
이렇게 개성이 강한 애였다는 걸 키울 때 어째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까.
울 아들 품엣자식일 땐 무척 유순했다. 지나치게 잘 통하는 모자간이었지.
그러나 이게 문제가 될 줄 몰랐다. 제 '개성'을 뻗칠 기회가 없었던 거다.
제대의 반가움도 잠시.... 요즘은 이틀에 한번꼴로 마음을 다친다. 대화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기싸움 같은 거랄까... 서로 상처를 주고, 상대방이 상처 주었다는 죄책감을 느낄까봐 그 상처를 숨기고, 왜 숨기느냐, 해결 보자고 덤비다가 또 상처 주고...
그러다 화해의 제스처를.... 그러면서도 좋은 결론이 아닌 것 같은 찝찝한 뒷맛을 씻어내기 위해 암암리에 2라운드를 준비하는 이 철부지 모자.... ㅎㅎㅎ
(요즘 일각에서 신봉하는 혈액형에 따르면 나는 AB형이고 아들넘은 A형이다. 복잡다단미묘하기가 그지없다.)
# 역경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
제일 바람직한 건 내 스케줄이 바빠 아들넘이 귀를 파든 코를 파든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는 걸 꺼다. 그래서 무조건 중국어 과외팀을 하나 꾸렸다. 중국출판물 기획 쪽으로도 레이다를 한가닥 뽑아놓고...일꺼리가 없나 친구들도 부지런히 만나러 다니는 중이다.
속상할 땐 아들넘 핑게로 한국에서의 내 생활을 찾겠다는 애당초의 결심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무조건 피해가는 것보다 나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사이좋게 살아가느냐를 훈련하는 게 더 유익한 인생경험이 될 거라 믿는다.
더 중요한 것.... 잊지 말자.
여긴 내 필요에 의해 내가 꾸린 집이다. 아들넘이 독립을 하고 싶다면 제 능력껏 나가라지, 흥!!
그리고 나도 노력할 꺼다. '의젓한'이라는 수식어와 '엄마' 라는 명사가 딱 들러붙을 수 있게...
이제까지는 유예기간이었다 치고.... 9월부터는 우리 모자의 본격적인 '관계연습'이 시작된다.
아들은 핵교 다니고 엄마는 일하고... 그렇게 자기 스케줄에 몰두하다 보면 쓸데없는 신경전은 피해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마치 우리 내외의 신혼시절이 그렇게 흘러갔듯이...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오늘 주고받은 상처들이 진한 사랑의 흔적이었음을 깨닫게 될 정도로
우리도 철이 들 수 있겠지.
헤헷, 속상한 김에 써놓고 보니 쫌 남세스럽다. 약간 오바한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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