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陽光燦爛的日子

블러그 속으로 들어가다

張萬玉 2005. 8. 15. 10:59

아직 가을바람이 불기에는 이른 철이지만 '가을바람'을 맞기로 했다.

세상에 깔린 그 많은 여자 중에서 이미 내 여자가 되어버린 '어떤여자'와 함께....

 

온라인 친구를 오프에서 만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일종의 모험이다.

그러나 모험이란, 결과가 어떻든 간에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결국 내 삶을 돌아보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이미 익숙한 오프세계 사람들에서 잠시 벗어나보는 거... 이것도 일종의 여행이다. 사람여행....

 

아들넘도 귀대하고 잠시 맡았던 일꺼리도 손을 털었고...

잠깐 어디 가서 바람이나 쐬었으면 하던 차에 항상 들꽃과 차 향기로 유혹하시는 가을바람님 생각이 났다. 한국 들어올 때마다 신세지는 시누이집 가까이 사는 연고로 이미 '쓰레빠' 끌고 만나는 사이가 되어버린 어떤여자님도 늘 가을바람님 집에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라 했겠다...

 

번개는 번개처럼 이뤄져야 제맛...

갑작스런 내 호출을 받은 어떤여자님, 알바 구해놓고 날아온 솜씨가 진짜 번갯불에 콩구워먹겠더군. 리본까지 달린 예쁜 치마 떨쳐입고 나타난 어떤여자님... 오늘의 외출은 붙박이 신세인 그녀에게 아마도 특별한 휴가가 될 모양이었다. 

 

영등포에서 버스를 타고 하성까지 가는 1시간 동안 우리는 창밖에 고질라가 지나갔어도 모를 정도로 얘기에 열중해 있었다.

어떤여자님의 여러가지 매력 중 하나가 대화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도 맛갈지게 잘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폭 빠져 들어오기 때문에 이야기 하는 사람을 신명나게 한다. 어쩌면 그 대상이 '나'라서 그 매력이 100% 발휘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으쓱! ㅋㅋ)

 

버스가 종점에 도착하자 고운 꽃무늬 끈달이 원피스를 펄럭이며(하하... 물론 볼레로를 걸치셨다) 뛰어오는 가을바람 언니... 40세면 학력불문, 50세면 미모불문, 60세면 남녀불문이라는 농담은 다 헛소리다. 66세라는 나이를 누가 믿을까. 첫인상도 그러하였지만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길 하면 할수록 언니는 점점 젊어진다.

 

언니 단골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문터골로 들어가는데 택시기사가 다 알아본다. 이 지역 유명인사임이 틀림없다. 왕년에 문터골 화랑은 매스컴에도 여러 번 소개되고 문화계 인사들도 자주 찾던 명소였단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은 처분을 기다리고 있지만 '문터골 화랑까페'의 명성은 여전한 모양이다.

 

박꽃, 도라지꽃, 상사화, 담쟁이... 그리고 이름모를 들꽃들로 둘러싸인 '럭셔리'한 언니네 집 구경은, 어떤여자님이 사진을 걸어놓으셨으니 그 방에 가서 하시도록...

내가 그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절묘한 위치에 뚫려 마치 액자처럼 바깥풍경을 보여주는 창문들이었다. 서재 겸 침실로 쓰는 방 침대머리맡의 창문, 대청 뒤쪽에 뚫린 창문, 까페에 뚫린 창문들.... 그리고 늘 열려있는 작은대문은 잘 그린 풍경화 족자, 바로 그것이다.

 

젊은시절 주재원이었던 남편 따라 세계 이곳저곳 다니시는 기회에 모으셨다는 곰살맞은 소품들하나하나마다 그곳의 추억이 담겨 있다. 참, 언니는 별걸 다 모아두셨다. 따님 어릴 때 신겼던 애기 꽃버선, 추억의 LP에다 타자기, 막사발, 풍금... 처음 집에 들어설 때는 얘기보따리 풀어놓기 바빠 무심히 지나쳤던 흥미로운 골동품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마침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은 러시아 음악과 묘하게 어울리기 시작한다.

아줌마들 마실 풍속에 따라 권해주시는 목침 하나씩 베고 대청에 누우니 참으로 여기가 인간인지 仙界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술 잘 못하는 나는 포도주 두 잔에 졸음 속으로 빨려들고 눈이 큰 어떤여자는 눈물 속으로 빨려들고.... 허허, 이거 참! 풍경과 사람이 이렇게 잘 어우러지다니...

 

사람 사는 일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참 다르다.

재주 있는 소설가가 우리 얘길 들으면 아마 책 한권 뚝딱 나올 거인디.....

그런데 한참 얘기가 물이 오를라치면 언니는 또 밖으로 나간다. 어떤여자와 나는 합창을 한다.

"언니, 마르다 그만 하세요... 우리 같이 마리아 해요."

그러나 언니는 타고난 마르다... 손님을 많이 치르며 살아온 분 답게 남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었다. 직접 담근 거니 맛이나 좀 보라고 된장도 한종재기씩 퍼서 싸놓으시고, 얘기하다 보면 어느새 사라지셨는지 부엌에서 벅벅 보리쌀 대끼는 소리를 내신다. (아이고, 너무 죄송했어요.. 언니)

 

숙달된 솜씨로 뚝딱 차려내시는 시골식 밥상... 무늬만 주부 출신인 두 여인네는 언니 손맛이 폭 밴 된장찌게와 간만에 맛보는 구수한 깡보리밥, 원조 좁쌀막걸리에 탄성 연발...ㅎㅎ

마당에 펼쳐진 넉넉한 평상 주위로 어둠이 내리고 고즈녁한 귀뚜라미 소리 요란한데...

사실 전원일기는 지금부터 써야 하는데 우리는 이제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 큰 집에 혼자 남겨지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그게 제일 걱정인데 막상 언니는 그런 감정에 이미 초연하신 것 같다.

어떤여자는 이런 데서 혼자 살면 원이 없겠다는데, 솔직이 나는 자신 없다.

게으름뱅이 집 건사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이 집에 혼자 있다보면... 족자처럼 뚫린 저 작은대문으로 녹음이 눈부시면.... 대청마루에 앉아있을 때 소나기라도 장하게 내려꽂히면...

정말 쓸쓸해서 미쳐버릴 것이다. 아마 한 달을 못 버틸껄...

 

하지만 문터골 화랑까페는 이 모습 그대로 이 자리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언니가 계속 간수하실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 누구라도 이 모습 그대로 간직해주실 수 있는 분이 이곳을 지켜주셨으면... 마음이 휴식을 원할 때 불쑥 찾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로 오래오래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언니, 감사했어요.

어떤여자야, 즐거웠어...

 

P.S.

끄나 켜나 같은 세상.... 그것은 신비감과 바꿔도 좋을 만한 따뜻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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