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리지앙으로 떠나는 날이다. 리지앙에 도착한다는 사실이 마치 할 일을 해치운 듯한 시원섭섭한 기분을 들게 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모르겠다. 비교할 바는 전혀 못되지만, 사와키 고타로가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원제 : Midnight Express, 재인출판사 刊... 배낭여행의 의미를 되씹어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책)에서 토로한 심정이 일종의 이런 심리 아니었을까?
오늘은 (겨우) 다섯시간을 달려 리지앙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 풀고 동네를 어슬렁거릴 일밖에 없으니 좀 늦장을 부려도 좋겠지만 매일 아침 서두르던 습관 때문에 아직 (이 동네에) 동도 트기 전에 우리는 짐을 꾸린다. 그래도 이틀이나 잤으니 한번쯤은 이 호텔에 딸린 식당에서 먹어줄까 하고 호텔에 딸린 식당으로 가보니 9시가 넘었는데도 문을 안 열었다. 아침식사를 하면 커피는 공짜로 준다고 커다랗게 써붙인 광고는 다 뭐란 말인가... 돌아나와
체크아웃을 하려니 이건 또 프런트에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또 여기저기 소리쳐 부른다. 헝클어진 머리로 눈 비비며 나오는 아가씨...(부지런 떨어서 미안하오. ㅎㅎ).
호텔 맞은편에 있는 까페로 가 아침식사를 주문해놓고 보니 이건 또 웬일인가... 아들넘이 방에 (다른 것도 아닌) 배낭을 놓고왔다네... 대강 넘어가는 동네에 있다 보니 멀쩡한 사람도 좀 이상해지는 모양이다.
리지앙은 99년도에도 가본 곳이니 이 동네 구경이나 좀더 하고 가자고 리지앙 가는 시각을 오후로 미룰 생각이지만 인적이 드문 아침 열 시부터(ㅋㅋ) 갈곳이 그리 마땅치 않다. 지도를 더듬다 터미널 가는 길에 州박물관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어째 입구부터 개미 한 마리 얼씬 안 하는 게 심상찮다. 일단 문은 열려 있어 들어갔는데 역시 아무도 없다. 전시실 문은 모두 잠겨 있고 사방은 먼지투성이...
폐업한 곳인가부다... 하고 그냥 돌아나오려다가 그래도 대문을 열어놓고 왜들 이래... 하고 오기가 발동하여 끈질기게 사람을 찾았다. 이방 저방 뒷방까지 뒤져 한 사람 찾아냈는데 이 아줌마 대답이 걸작이다. 전시실 관리인이 출장을 갔는데 열쇠를 다 가져갔다네. 말이 되나?
그래도 너무나 당연한 듯 (당신들은 뭐 이런데까지 다 오나? 하는 투로) 그런 얘길 하길래 '우리는 박물관 보려고 일부러 먼길을 왔는데 이럴수가 있냐'고 항의하자 아줌마는 미안한 기색은커녕 쯧쯧, 여기 뭐 볼게 있다고 그러냐,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꺼져주시지 하는 눈초리로 묵묵부답이다. 슬슬 열이 나길래 ‘내가 보기에 띠칭주에는 박물관이 필요없는 것 같다. 중국정부가 예산낭비만 한 것 같은데’하고 한방 쏘아붙였다.
박물관을 나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소수민족들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딴동네 사람들의 헛소리일지도 모르는 말들을 계속 중얼거리며 걷는데 샹그릴라현의 명문 第5中 학생들이 쉬는 시간인지 운동장에 나와 와글와글 떠드는 게 보인다. 무우청처럼 싱싱한 모습들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제발 그러지 마라(뭘?)
박물관 관람이 불발되는 바람에 리지앙 가는 1시 40분 출발 버스를 타려면 아직 한시간 넘게 어디선가 개겨야 했다. 아들은 잡지를 하나 사들고 오더니 거기 꽂혀 터미널에 자리를 깐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시내 사진도 좀 찍을 겸, 화선생이 말한 대로 송이버섯이나 좀 사볼까 싶어 시내로 들어갔더니.....
이게 웬 횡재냐... 장날이다!
알록달록한 소수민족 복장이 꽃처럼 피었다. 드디어 관광지가 아닌 이곳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보게 되었구나. 도착하던 날 이래 계속 도시가 빈 것처럼 느껴졌던 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평소에는 관공서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 호텔,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밖에 없으니 이 도시의 인구밀도가 낮지만 장날이 되면 인근 농민들이 장을 보러 몰려나오기 때문에 인구가 불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야 신이 난 장여사....답사기 8에 올린 사진들을 비롯,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어댔던 것이다.
덕분에 개운치 않은 마지막을 맞을 뻔한 샹그릴라에서의 오전일정을 상쾌하게 마무리하고 버스에 올랐는데.... 과연 이제 리지앙에 순조롭게 도착할 일만 남은 것인가?
인생은 그렇게 각본대로만 되는 게 아니다. 출발하고 500미터도 채 못가 버스는 가래 끓는 소리를 하며 서서히 속도를 낮추더니 그냥 서버리고 만다. 기사가 별일 아니라는 듯 엔진 뚜껑을 여는 걸 보고 곧 떠나겠지 했는데... 웬걸, 20분이 되고 30분이 되도록 뭘 주물럭거리는지 온갖 공구가 총동원되고 버스 밑바닥까지 들어가고... 문제가 심각해 보인다. 사람들은 다 내려서 바람을 쐬고....
기사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길래 이 버스는 못 가게 생겼으니 코앞에 있는 터미널에서 다시 다른 버스를 보내달라고 하나 싶었다. 그러나 나타난 것은 동료기사로 보이는 또 다른 아저씨.... 이미 한 시간이 경과했는데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두 아자씨는 온몸에 기름투성이를 해가지고 열심히 고친다.
됐나보다. 다시 시동 걸고 기세좋게 출발했는데 10분도 못 가 다시 그르릉 그르릉... 어째 불안하다. 설마? 하는데 다시 속도가 느려지더니 또 선다. @.@
이제야말로 다른 버스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겠지 했지만 굳센 우리 기사아저씨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공구를 찾는다. 이번에는 비전문가 여럿이 달려들어 힘과 지헤를 모은다. 엔진을 열어놓은 앞에서 담배까지 피워대며... 아무도 내가 알고 있는 해결방법을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오늘 밤에만 떨어지면 그뿐이다. 여기서 노나 거기서 노나 내겐 마찬가지 아닌가. 초조하게 기다릴 것 없다. 가게 가서 감자칩이나 하나 사들고 수다 떨 사람이나 찾아보자구.
번듯해도 갈 수 없는 버스는 빛좋은 개살구....
저렇게라도 앞으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ㅎㅎ
고쳤다고 믿고 다시 출발한 길은 다시 10분을 못 가 끝이 나고 결국 본부(!)에서 차량을 지원해주어 이제 진짜 리지앙을 향해 출발. 터미널을 떠난 지 두 시간 만의 일이다.
리지앙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여섯시 경.
그래도 한번 왔던 길이라고 호도협 부근부터는 풍경이 꽤나 친숙하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보니 시내는 많이 변했지만 우리가 왔을 때 이미 개발이 완료된 쓰팡지에(四方街)는 6년 전의 모습 그대로이고...
이번에 리지앙에서는 새로운 탐색이 아니라 옛친구를 찾아 하루 쉬고 가는 모드이기 때문에 주저없이 櫻花村(사쿠라 혹은 벚꽃마을)을 찾아가니 역시 듣던 대로 점포를 세 개로 확장, 쓰팡지에 최고의 까페로 변모해 있었다. 99년에 왔을 때 여고생 같던 김명애씨는(여행후기 카테고리에 있는 운남성 여행기를 보시면 처음 벚꽃마을을 찾았을 때 얘기가 있음) 그동안 아이를 둘 낳았고 가게에선 남편인 mu xin씨가 반갑게 손님을 맞고 있다. 메뉴판에 적힌 대로 '10년 전 음악에 미친 두 젊은이가 리지앙에 여행자들을 위한 만든 쉼터'가 이제는 쿤밍에, 주자이꺼우에, 따리에, 그리고 핑야오고성 앞에까지 체인점을 낼 정도의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싹싹하기 그지없는 종업원들, 업그레이드된 인테리어에 무엇보다도 훌륭한 음식.... 쉽지 않은 길이었겠지만 누가 뭐라건 일로매진, 고생을 마다 않은 결과겠지. 김명애씨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한국사람들이 많기도 했겠지만, (최소한 그날 저녁에 내가 본 바로는) 남편의 공로가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꼭 잘 나가는 친정동생 보는 것 마냥 흐뭇하고 자랑스러웠다. ^^
오랜만에 맛난 고국의 음식으로 포식을 하고 벚꽃마을에서 운영하는 객잔에 짐을 풀었다.(50원... 새로 꾸민 집이라 시설도 훌륭하고 특히 침대시트가 눈부심) 결정적인 흠이 하나 있는데... 그 얘긴 다음호에 계속...
오늘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리지앙고성의 화려한 야경이나 좀 구경하시게.
리지앙 고성의 중심인 쓰팡지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
(컴 바꾸느라 뽀샵이 없어져서 좀 밝게 못만들었슴다. 훗날....)
어둠 속이지만 집 많아 보이죠? 밝은날 되면 얼마나 많은가 다시 확인해봅시다.
복무원 아가씨들, 퇴근 안 하세요?
아직 초저녁이라구요?
(호객을 하기 위해 문밖까지 나와 있는 종업원 아가씨들... 유니폼은 나시족의 때때옷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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