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陽光燦爛的日子

잠시 쉬어가죠-- 여자의 술주정은 유죄?

張萬玉 2006. 3. 29. 00:53

지난 토요일 저녁, 친한 후배가 볼일로 안양까지 와 있으니 얼른 나오라고 성화를 대는데, 이런 기회 아니면 얼굴 한번 보기 어려운 친구라 늦은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나갔다. 저녁 먹고 일곱시 반에 시작하는 영화 한편 보고(오만과 편견... 썩 재미있게 보았음. 강추!) 워낙 오랜만이라 쉽게 헤어지지 못해 까페에서 뒷풀이를 하다 보니 시계바늘이 어느새 10시 반을 넘었다. 안산에서도 대여섯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머나먼 시화행 열차를 타려고 한다면 퍽 늦은 시간.

서둘러 1호선을 타고 다시 4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금정역 플랫폼에 서 있는데...

 

두 개 줄 쯤 떨어진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뭐라고 계속 반복해서 외치는 소리인데 한국말 같지가 않다. 자세히 보니 나보다 조금 젊은 여자 하나가 핸드백으로 여기저기 후려치기도 하고 몸을 앞뒤로 심하게 흔들기도 하면서 욕과 영어를 섞어 웃는지 우는지 모를 소리를 지르고 있다. '에구, 정신나간 여자로군...'하는 눈빛으로 사람들은 이리저리 피하기 바쁘고... 그 와중에 열차가 들어왔다.

 

열차와 열차가 이어진 곳 가까이에 서 있던 내 눈에 옆칸에 탄 그 여자가 들어왔다. 여전히 이 사람 저사람에게 말을 걸면서 열차의 흔들림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어째 이 늦은밤에 혼자 돌아다니게 두었을까.... 하며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나 있는 칸으로 건너오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전철 안은 제법 붐볐지만 전철을 기다릴 때부터 그 여자의 행동을 봤던 사람들은 "이크! 도망가자" 약속이나 한 듯 그 여자로부터 떨어졌고 덕분에 그 여자 주변에는 길게 누워도 좋을 만한 공간이 생겼다.

     

사람들 눈총은 아랑곳없이 "여기 오니 앉을 자리가 있네. 살았다~" 며 바닥에 눕다시피 하는 여자의 하얀 바지가 보기 민망해서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내어주었더니 멍하니 나를 한번 쳐다보다가 그냥 곯아떨어진다. 놀란 듯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

 

얼마나 지났을까? 

저러다 목적지를 놓치고 종점까지 가게 되면 저 여자는 어디서 밤을 지내게 될까...나이는 들었어도 그래도 여잔데 요즘 횡행하는 성범죄의 표적이 되진 않을까...공연한 걱정이 들기 시작하니 내가 안절부절이다. 내가 참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아까 신문지를 건네줬을 때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까지 따갑게 꽂혔던 생각을 하니 거북하기는 하지만 용기를 내어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어디까지 가세요""

"어, 한대 앞이요...아유, 속 아파... 너무 마셨어..."

 

헉... 술을 마신 것이었다. 광녀 같던 그 행동이 술주정이었단 말인가?

 

"다음 정거장이 한대앞이에요. 그만 일어나세요."

"어, 그러네요... 고맙습니다..." 

 

비틀비틀 일어난 그 여인, 정신이 좀 드는지 옷매무새도 고치고 깔고 있던 신문지도 얌전하게 걷어 돌려주고는 멀쩡하게 전철에서 내렸다. 츠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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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밤 열두 시가 넘어가네.... 남편이 여적 퇴근을 안 하고 나는 말똥말똥 잠이 안 오고...

얘기 나온 김에 있으니 술 취한 여자 얘기 하나 더 할까?  

 

 

나도 십몇년 전에 딱 한번... 혼자 술에 취해 전철을 탄 적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일할 텐데... 매출이 퍽 괜찮았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회 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내 주량의 한계는 무조건 '두 잔'이다. 소주는 소줏잔으로 두 잔, 맥주는 맥줏잔으로 두 잔.... 그날은 막걸리라서 일단 두 대접을 마셨다. 원체 술이 잘 안 받는 체질이라 이 '두 잔'에서 단 한 잔이라도 더 하면 취하기도 전에 속에서 먼저 반란을 일으키는데.... 막판에 사장님이 권하는 술을 마지 못하여 반 대접도 못되게 추가한 막걸리가 문제였다.

 

한 잔만 마시면 벌개지는 얼굴 때문에 회사 사람들과 술을 먹게 되면 우선 나와 같이 1호선을 타는 후배녀석부터 챙기곤 했다(얼굴이 버얼겋게 되어...밤늦게, 그것도 여자 혼자 전철을 타면 그림이 너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이날도 같이 가기로 철썩같이 약속을 했던 이녀석, 전철 끊어질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도대체 어딜 갔는지...(나중에 알고 보니 창고 구석에 쳐박혀 잤단다..ㅜ.ㅜ) 찾다 찾다 할 수 없이 혼자 전철을 탔는데....

 

숨도 가쁘고 울렁울렁...속에 있는 내용물들이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사람도 많은데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면??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고 알게 모르게 몸을 뒤틀며 이를 앙다물고 토사물의 탈출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내 모습이... 소리만 안 질렀지 아마도 지난 토요일에 내가 본 그 여인의 행색이나 비슷했으리라.

 

종로3가에서 영등포까지 버티다 못견디고 결국 신도림역에서 내려 속을 편하게 할 곳을 찾아 제일 후미진 쪽으로 갔더니.... 맙소사, 위로 아래로 내용물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모여 진저리들을 치고 있네 그려... 어쩔 도리 있나...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혐오스럽지만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어 눈물 콧물 흘리면서... (으~~~)     

 

이튿날 그 후배에게...도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하면서 잊을 수 없는 그날 그 장소 얘길 했더니 "선배, 거기 나 알아요. 술꾼들  공식 화장실이거든요." 하고 깔깔 웃더군.

 

술주정... 확실히 흉한 몰골이긴 하다.

그런데....여자의 술주정이 남자의 술주정보다 더 흉한가? 그런가?

술 취한 남자는 몰라도 술 취한 여자는 적어도 위험하지 않다. 술김에 주먹을 휘두르거나 손 하나 잘못 놀려 사고 치는 건 대부분 남자들이니까. 그런데 세상은 술취한 남자들은 이해해주는 편이면서 술취한 여자들은 광녀 취급을 한다.

 

에궁, 내가 지금 무슨 주장을 하려는 게야? 술주정 차별 말라구? ㅋㅋ

술도 안 마셨는데 나도 취했나? 

아니 잠에 취했나보다. 씰데없는 소린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