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上海(상하이) 서남부의 신개발 지역인 龍柏(롱바이)에는 건물마다 한글 간판이 걸려 있다. 음식점, 한국인 전용 노래방, 실내포장마차, 중고생 보습학원, 액세서리 전문점, 찜질방 등 한국에 있는 업종이면 빠짐없이 들어와 있다. 롱바이뿐만이 아니다.
롱바이 인근 古北(구베이), 萬科(완커), 浦東(푸둥)의 世紀(스지)공원 부근 등 곳곳에서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上海의 교민 생활정보지에 전화번호를 올린 한국 부동산은 36곳, 한국 식품점이나 김치 배달업체, 떡집 등은 40곳이 넘는다.
대부분 한국인 밀집 지역에 모여 있다. 上海에 오래 산 한국인들은 『이렇게 한국 상점 밀집 지역이 형성된 것은 2002년 전후』라고 말한다. 駐中(주중)한국인회는 중국에 장기 거주하는 한국인을 北京(베이징) 10만 명, 靑島(칭다오) 7만 명, 上海(상하이) 5만 명으로 파악한다.
수도인 北京과 「대한민국 靑島市」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인 靑島보다는 체류자가 적지만, 上海는 중국에서 한국 교민 사회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이다. 외교통상부 집계에 따르면, 2003~2005년까지 중국 전체에서 한국인 체류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지역이 上海(3만1000명)다.
2010년 세계박람회 때까지 上海의 한국 교민이 2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移民(이민)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적 취득이나 영주권 개념이 없으며, 외국인은 매년 연말마다 1년짜리 거류증(일종의 비자)을 다시 받아야 한다. 그만큼 신분이 불안정하다.
경제는 개방됐지만, 중국은 아직까지 엄연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현지에서 살아 보면, 과거 5공화국 시절을 연상케 하는 사회 통제를 수시로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한국인이 上海에 몰려드는 것은 上海가 아시아 금융 비즈니스 허브로 발돋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주요 기업과 금융기관 등이 현지 법인이나 사무소를 빠짐없이 설치했다.
최근 上海의 한국인 사회는 「이민 공동체」로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기업체 주재원과 유학생 위주로 3~4년 정도 단기 체류하고 돌아가던 것에서 영구 정착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흔한 사례는 기업체 주재원이 본사의 귀임 발령을 받으면 사표를 쓰고 눌러앉는 것이다. 중국은 「關係(관계)」라 부르는 인맥이 중요해, 일단 중국에 나온 기업체 주재원은 4~5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체류하는 경우가 적다.
이렇게 자리 잡은 주재원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중국 체류를 선택하고 있다. 중국이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초고성장을 지속하면서 사업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국내 대기업 D社 上海법인의 주재원 李모씨는 『1992년 우리 회사가 上海에 진출한 이후 부임한 주재원 40여 명 중 임원으로 승진해 귀국한 사람 1명을 제외하면 전원 임기가 끝난 뒤 퇴사하고 上海에 잔류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눌러앉은 회사 선배는 대부분 자신이 맡던 중국인 거래선을 대상으로 서울 본사의 대리상(대리점)을 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며 『본사도 이들에게 대리상을 맡기면 중국인보다 믿을 수 있으므로 굳이 독립을 말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우자동차 上海법인의 애프터서비스 담당자로 파견됐던 鄭炫秦(정현진)씨는 현재 자신이 일하던 대규모 자동차 정비공장의 사장이 됐다. 鄭씨는 대우자동차가 GM에 넘어가면서 해외자산 정리 과정에서 이 공장을 인수해 上海에 정착했다.
그는 이 공장을 上海의 유일한 한국産 차량 종합수리업체로 키웠고, 현재 중국 현지 자동차업체에 부품을 공급하는 사업을 기획하는 등 「교포 기업인」으로 성장하고 있다.
鄭씨와 같은 사례도 있지만, 『귀국 포기는 주재원 본인의 선택 못지않게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가족의 반대가 이유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上海의 한국기업 단체인 「上海 한국상회」 관계자는 말했다.
낯선 중국 땅에서 불과 몇 년 살고 나서는 왜 태어나서 자란, 친지와 친구가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할까?
『환경 좋은 국제학교에 다니는 중고생 자녀를 국내에 데려가 入試(입시)지옥에 몰아넣을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이들은 입을 모은다.
7년 전 대우 계열사 주재원으로 중국에 건너온 金모씨는 조만간 辭職(사직)하고 上海에서 개인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金씨는 『원래 지난해쯤 귀국하려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중국으로 데려와 현재 대학 1학년인 아들이 「중국 생활에 어렵게 적응했는데 친구 한 명 없는 한국에 돌아가 새로 적응하기 싫다」며 중국 대학에 진학해 귀국을 포기했다. 현지에서 사업을 하며 계속 살 계획』이라고 말했다.
3년 전 上海에 건너온 국내 기계업체 上海법인 대표 Y씨 역시 『고등학생인 딸이 중국에서 대학을 가겠다고 하면 중국에 눌러앉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 주재원이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은 자녀를 대부분 영국·미국·싱가포르 등에서 설립한 국제학교나 上海中學(상해중학) 등 현지 명문교 국제부에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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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몰려드는 중국 上海의 차이나·유럽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쿨. |
아들을 영국 국제학교에 보내는 C씨는 『국제학교는 1년 학비가 2만 달러 이상 들지만, 아이들이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배우면서 국제 감각을 익힐 수 있는 데다 한국의 私교육비를 생각하면 이 쪽이 이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업체 주재원이 「上海 이민」을 선택하는 것은 부인이 다시 귀국하기 싫어하는 것도 크게 작용한다. 상당수의 주재원 부인은 서울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50~60평대 넓은 아파트에서 가정부를 고용하고 생활한다.
가정부 1개월 급여가 한국 돈으로 10만원 정도일 만큼 물가가 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배경에는 上海의 1인당 소득(GDP)이 이미 2004년 6600달러를 넘겨 중국에서 가장 높아 생활 환경이 좋고, 국제화된 도시로 외국인들이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이 없다는 점도 일조한다. 이렇게 눌러앉아 「사업가」가 된 교민들은 이전에 재직하던 기업의 주재원들과 선후배로 엮이면서 그들과 교류한다.
2000년대 이후 上海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가지고 있던 아파트 시세가 2~3배 이상 올라 재산을 불린 교민들도 흔하다. 그러나 부동산 투자에 대한 적극성은 언제 上海에 들어왔는지에 따라 다소 다르다. 1997년 이전부터 上海에 거주한 「터줏대감」들은 東아시아 각국의 외환위기 사태 여파로 부동산 시장이 폭락하는 것을 목격해 투자에 신중한 편이다.
그러나 경기가 회복되고 부동산이 다시 수직 상승을 시작한 2000년 이후, 특히 2003년 이후 上海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여러 채 구입하는 등 투기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적잖다.
上海의 부동산 소개업자 鄭모씨는 『지난해 중국 정부의 부동산 규제 정책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은 상당수가 2003년 이후에 투자했던 교민』이라고 말했다.

자영업자를 위주로 하는 일군의 한국인은 이들과 다른 부류의 교민 집단을 형성한다. 이들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음식점, 인테리어 업체, 민박, 직업소개소, 부동산 등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기업체 파견자 출신이 아닌,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건너온 사람이 많다. 중국에 눌러앉은 한국인을 조선족에 빗대 「新鮮族」(신선족·新조선족이라는 뜻)이라는 신조어로 부르는데, 新鮮族은 대체로 주재원 출신보다 이들을 가리킨다.
한국 음식점 수백 곳이 밀집해 있는 롱바이·구베이 등지에는 「코리아타운」이 형성돼 있다. 上海에선 삼겹살이면 삼겹살, 보신탕이면 보신탕을 전문으로 취급하며 맛이 없으면 손님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요식업 경쟁은 한국과 차이가 없다. 음식점을 차린 교민 중 일부는 큰돈을 벌어 사업을 확장하면서 국내 일류호텔 주방장을 스카우트해 오기도 한다.
한국 기업 K社 주재원 부인 金知恩(김지은)씨는 『코리아타운이 형성된 곳에서 조선족 가정부를 고용하면 중국어 한 마디 못 해도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영어 까막눈이라도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선 평생 불편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이 上海에서 재연된 셈이다.
중국인이 하는 생선가게에 가면 조기를 한국식으로 소금에 절여서 내걸어 놓고 파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국인 밀집 지역에는 입시학원도 여러 곳 있다. 한국 학생들 대부분이 국제학교 수업을 마치고 다시 국내 대학 입시공부를 하러 학원에 다닌다. 롱바이의 「즈텅루」에는 「즈텅루 상가입주업체 대표자협의회」까지 구성돼 있다. 上海총영사관 관계자는 『浦東 지역을 포함해 上海 전체에서 한국인이 하는 음식점 등 자영업소가 1000곳 이상일 것』이라고 추산했다.

사실상 이민으로 건너와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주재원 출신에 비해 언어 장벽과 현지 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 문화 차이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상당수는 조선족과 동업하거나 조선족에게 영업을 맡기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중국의 商거래 규정이나 관행에 어두워 사기를 당하는 사례가 많다.
유학생이 눌러앉는 모습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尹少映(윤소영·여)씨는 대학 2학년 때인 1994년 어학 연수를 왔다가 그 길로 復旦大(푸단대)에 편입해 졸업하고 上海에 남았다.
上海 교민소식지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스탠다드차타드은행 上海지점에서 일하고 있다. 윤씨는 上海에서 부동산개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장기적인 목표다. 부산大를 졸업하고 上海 인근 浙江大(저장대) 중문과에 다시 입학해 졸업한 陳泳洙(진영수)씨는 上海의 한국系 화공업체에 취직했다.
그는 『영업을 하며 중국 비즈니스를 배운 뒤 내 사업을 하며 중국에서 살겠다. 중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上海에 한국 교민 사회가 자리를 잡으면서 각종 교민 행사도 이어진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인 모임에는 上海 거주자 700여 명이 가입해 있다. 이들은 주말마다 上海 주변 사적지를 탐방하거나, 스포츠나 취미활동 동호회 활동을 한다.
고교와 대학교 동창을 자발적으로 찾아 동문회를 구성하는 움직임도 빈번하다. 모두 上海 교민사회가 단순히 직장이나 생계를 위해 모여든 집합체에서 유기체적인 공동체로 발전해 가고 있다는 증표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작은 도시 한 곳에 해당하는 사람이 모여드는 데 따르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한국인이 너도나도 국제학교에 자녀를 보내면서, 외국인 사이에 한국인의 극성에 눈쌀을 찌푸리는 경우가 적잖게 보인다.
上海의 영국 국제학교는 초등부와 유치부에 한국인 입학비율 상한선을 20%로 정하기까지 했다.
탈법 유흥문화와 사기 등도 번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연말 上海에 한국인 호스트바가 생겼다. 上海 시내 중심가 건물 2~3층을 쓰는 이 호스트바는 한국에서 온 남성 접대부 50명이 고용돼 있다.

上海市 공안 관계자는 『한국 조직폭력배가 호스트바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上海 시내 한국음식점과 미용실 등에서 배부하는 생활정보지에 광고까지 내며 영업을 하고 있다.
탈북자를 낀 조선족이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를 밀반출했다』며 上海의 한국인을 상대로 은밀하게 판매를 시도하기도 한다. 지난해 가을에도 이런 북한 문화재 암거래상이 上海에 등장해 총영사관에서 조사해 본 결과 가짜로 판명된 적이 있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해 연말엔 廣東省(광둥성)에서 올라온 중국인들이 『우리는 문화재 전문 도굴단이다. 도굴한 금 조각상을 녹여 만든 금괴를 사라』고 한국인을 유인해 일부 교민이 거액을 날리기도 했다.
한국인의 上海 이주는 韓·中 수교 이후인 1990년대에 처음 이뤄진 것은 아니다. 1842년 南京(난징)조약으로 上海가 강제 개항된 이후 외국인이 이 도시에 몰려들었다. 한국인(당시엔 조선인)도 이 행렬에 끼어 있었고, 본격적인 上海 이주는 일제 침략이 본격화된 19세기 말부터 광복 때까지 계속됐다.
上海 華東(화둥)사범대학 사학과 謝俊美(시에준메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上海에 장기 거주하는 조선인은 6000명에 달했다. 당시 上海 인구는 350만 명으로, 인구 비율(현재 上海 인구 1700만 명)로 따지면 上海 인구 중 한국인 비율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당시 上海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대부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온 사람이거나 독립운동가 등이었다. 이들 중 일부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上海에 남았으나, 1949년 중국이 공산화한 뒤 대부분 생존을 위해 북한 국적을 선택했다.
이들과 후손 중 일부가 아직 上海에 살면서 관광가이드 등으로 생계를 잇지만 1990년대 이후 들어온 우리 교민과는 거의 접촉이 없다.
외국으로 이주한 이민이 현지 사회에 융합하는 정도는 이민자의 주거지가 얼마나 확산되는지, 현지인과 접촉하는 비즈니스가 얼마나 많아지는지 등으로 판단한다. 예컨대 만약 미국에 이민한 한국인이 각 도시의 코리아타운에만 모여 살면서 모든 사람이 한국인끼리 주고받는 장사를 하며 먹고 산다면, 한국 이민이 미국 사회에 화학적으로 결합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국 이민은 역사가 100여 년에 이르면서 이미 이런 단계를 벗어났다. 上海는 어떨까? 한국상회 관계자는 『우리가 중국보다 소득이 훨씬 높기 때문에 굳이 현지화할 필요도, 현지화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한국 교민이 모여 사는 上海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아파트 단지이다. 매연 많고 인파와 차량 경적으로 시끄러운 도심지와는 뚝 떨어져 있다. 현지 중국인이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동네가 아니다. 또 아직 한국인이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는 거의 없다. 그 반면,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는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한국 교민 사회」는 한국인이 중국인을 상대로 번 돈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한국 기업의 지갑에서 나오는 자금과 한국인들끼리 주고받는 돈을 중국 사회에 소비하면서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上海 총영사관 관계자는 『上海의 한국 교민 사회는 중국 경제가 경착륙하면 직격탄을 입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교민 사회가 上海 현지의 중국인·華僑(화교)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비즈니스 현지화 등을 통해 자생력을 갖춘 이민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