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 이후 1년짜리 세계일주를 접고 1년에 한 대륙씩 공략하기로 마음을 바꾼 뒤 첫번째 목표로 삼은 게 남미대륙 남북일주다. 더 나이 들면, 자금이 차츰 바닥을 보이게 되면, 혹 일꺼리라도 생겨서 뭉텅이시간 내기 어렵게 되면.... 포기할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남미는 여행시기가 춥든 덥든 상관없다니 빠르면 이번 여름, 늦어도 올 겨울에는 출발하리라 결심하고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회화책 하나, 문법책 하나 사가지고 자습을 시작했는데....
왜 이리 진도가 안 나간다냐. 외울 건 또 왜 이리 많은지.... 집중력도 기억력도 예전같지 않으니 욕심 내지 말고 놀멘놀멘 하자던 마음과는 달리 스트레스가 솔솔 쌓인다.
이럭저럭 4과까지 어거지로 밀고 나갔는데, 집안 대소사로 며칠 딴짓하고 돌아와보니 쌩기초인 ser동사와 estar동사조차 엉켜버렸다. 확실히 어학을 혼자 공부한다는 건 누구 말마따나 '소같은 짓'이 맞나보다. 그렇다고 급할일도 없는 처지에 학원까지 찾아다니는 것도 좀 오버 같고.....
그러던 중 한 스페인어학습 까페에서 개설한 오프라인 강좌를 알게 되었다. 이름하여 스.무.따.(스페인어 무조건 따라하기). 실용회화 중심이라는 컨셉이 내 필요와 맞아떨어졌고, 어차피 자습으로 마스터하려던 거니 일주일에 한번 정도 도움이면 딱이겠다 싶었다. 두 달짜리 왕초보회화 코스, 일단 시작해보세!
그 첫강의가 바로 오늘이었다. 하필이면 남편과 아들넘이 오랜만에 집을 꽉 채워준 황송한 공휴일이지만, 칼을 뺐으면 호박이라도 찔러야지.... 찌게 한냄비 끓여놨으니 둘이 오붓하게 점심 먹어라 하고는 집을 나선다. 처음 내딛는 발걸음은 늘 설레게 마련. '룰루랄라 신촌을 향하는 내 마음은 마냥 두근두근' ♬
약속장소는 한 '모임전문까페'. 벽 한 군데 화이트보드를 걸고 긴 테이블을 중심으로 작게는 6인에서 크게는 20인까지 둘러앉게 해놓은 방이 한 층에 너댓개쯤 있는데, 9층 건물 가운데 몇개 층이 그런 용도로 쓰이는 것 같다. 소집회를 위해 전체를 다 쓰게 해놓은 층도 있다. 사용료는 무한리필이 되는 1000원짜리 커피나 음료면 그만이니(이것조차 모임 회비를 지불했다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모임이 많고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 입장에서나 장기적인 손님을 confirm하고 싶어하는 까페주인 모두에게 이 얼마나 감동적인 컨셉의 까페인가. 우리가 공부할 방 건너 방에서는 '술'을 연구하는 60대 어르신들의 모임이 목하 진행중이다. 오랜만에 발랄한 동네에 온 이 할마씨, 잠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
왕초보회화반 인원은 6명. 예상과는 달리 재학생은 하나뿐이고 (짐작컨대) 30대가 두 명 40대가 두 명이다. 생각보다 중후하게 가겠군... 하면서 살짝 마음을 놓았는데 웬걸, 막상 수업이 시작되고 보니 말이 왕초보지 이런저런 기회에 스페인어 맛을 적잖이 본 멤버들 같다. 부지런히 따라가지 않으면 망신살 뻗치게 생겼다. 나잇값 한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할텐데....(여기서도 역시 내가 왕언니다. ㅡ.ㅡ)
교재는 고등학교 교과서... 문법과 회화 모두를 고려하여 정한 교재란다. 12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8주에 마친다고 하니 한 번에 한과 반씩은 나가야겠다. 戰意가 불끈 솟는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선생님은 스페인어나 잘하는 정도의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스페인과 카리브해 연안에서 오래 사셨다곤 하지만, 스페인어권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그 해박함... 이해력을 팍팍 자극하는 신선한 설명방식... 회화수업의 최대덕목인 '연습'을 충분히 고려한 수업설계 등등을 미뤄볼 때 절대 예사로운 내공이 아닌 듯...
강의 중 재밌었던 대목 일부를 옮겨보자면
!Buenos dias! (영어로 해석하면 Good day!)
dia는 day에 해당하는 말인데 왜 복수를 나타내는 s를 붙였을까?
말하는 나와 얘길 듣는 너 모두에게 좋은 날이 되라고...
Adios. (A+dios)
(A=to, dios=God) 비교적 오래 헤어지게 될 경우에 쓰는 인사.
옛날엔 세상이 험하여 먼길 떠나면 안전보장이 안 되니 죽더라도 하나님께 가라는 뜻에서 그리 인사했는지 모른다 (혹 하늘나라 가라는 얘긴 아닐까? ^^)
왜 스페인 사람들은 감탄문과 의문문의 뒤뿐만 아니라 앞에까지 느낌표나 물음표를 붙일까?
마지막에 달린 감탄부호 보고 당황하지 말고, 아예 처음부터 문장부호에 맞는 감정을 잡고 시작하라는 배려이다. 친절한 에스빠뇰씨..^^
Mujer Bonita처럼 왜 스페인 애들은 형용사를 뒤에다 쓸까?
Mujer는 woman, bonita는 pretty에 해당하는데 영어는 예쁘냐 어떠냐를 먼저 관심에 두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일단 아가씨라는 대상 자체에 우선 관심을 둔다.
(인간적이군! 갑자기 스페인 사람들이 좋아진다)
이런 설명이 정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접두/접미어, 합성어, 어원 등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어찌나 수업이 재미가 나는지.... 수업 내내 뜻밖에 그러쥐게 된 나의 행운을 절감하며 전율! ㅎㅎㅎ
두 시간 반에 걸친 열강이 끝나고 헤어지기 아쉬웠던 왕초보회화반 멤버들.... 근처에서 냉면이나 먹으면서 '왜 이 낯선 언어를 배우려고 하는지' 서로 인터뷰하기로 했다.
사람들 사는 거 보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는 방식도 취향도 참 다양하다.
레알 마드리드의 열혈팬으로 현지에 가서 축구를 보고 싶어 시작했다는 대학 1년 여학생(요즘 애들 참 멋지게 사는구나... 격세지감!), 스페인 음악을 즐기는, 내 또래라고 하기에는 내가 황송해질 정도로 멋진 4학년 8반 아주머니, 아줌마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가씨 같은 sen~ora, 스페인어 한마디 모르는 채 멕시코로 놀러갔다가 1년 반을 지내고 이제서야 제대로 배우겠다고 벼르는 sen~orita.....바빠서 먼저 가신 40대 아저씨는 남미쪽과의 사업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두 스페인어권과의 구체적인 만남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이니....꽤나 열심들이겠다.
처음엔 소일삼아 시작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욕심이 난다. 간단히 한 코스... 가 아니라 셋트로 이루어진 여섯달짜리 세 코스를 다 들을까보다. 내친김에 델레 초급까지 따봐?
이렇게 재밌으면 굳이 여행까지 안 가도 될 것 같다. ^^
Hasta miercoles! (수요일에 만나요!)
<부록 : 수업 첫머리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스페인어를 배워두면 좋은 이유>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인구는 많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골고루 퍼져 있다.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인구는 스페인 인구 4100만과 남미대륙의 5억 2천만, 미국 내 히스패닉계 4500만 외에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미국인들에게 스페인어는 제2외국어나 다름없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 제대로 공부한 미국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안다.
뿐만 아니라 각자 언어가 다른 유럽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공통어로 쓰이는 것은 영어가 아니라 스페인어. 이유는, 원자재의 공급처이자 상품시장으로서 남미대륙의 가치가 부각되면서 약 15년 전부터 유럽대륙에는 스페인어 배우기 열풍이 불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취업이나 사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스페인어를 배우기 때문이란다.
스페인어를 배워놓으면 로망스어권(라틴문화 지배하에 있었던 포르투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루마니아)의 언어들을 쉽게 배울 수 있어 순식간에 4개국어, 5개국어 보유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
엑스포 때 스페인어 부스에서 통역봉사를 하고 있는데 이태리어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는 선생님 귀에 옆 부스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이 나누는 이태리어가 들어오더란다. 너무나 신기하여 옆 부스로 가서 스페인어와 이태리어로 두 시간이나 얘길 나눴단다. 상대방 나라의 말은 못해도 70~80%는 서로 알아들을 수 있더라나. 라디오를 들어보니 루마니아어의 경우도 비슷하더란다. 불어의 경우 발음은 다르지만 써놓으면 똑같은 철자가 많기 때문에 필담이 가능하다. 따라서 스페인어를 배워두면 스페인어권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나라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한국 역시 여러가지 필요에 의해 스페인어를 배우려는 인구가 점점 늘고 있으며 10년 전만 해도 전국을 통틀어 세 개뿐이었던 스페인어 학원이 최근 들어 열 두 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스페인어는 배우기 쉽다
-영어와 스페인어의 어휘 중 70%가 공통사항이다. 따라서 영어를 웬만큼 하면 스페인어 배우기는 쉽다.
-스페인어 사전에는 발음기호가 없다. 몇 개 자음을 제외하면 알파벳에 따라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
-스페인어는 문법에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영어의 5형식에 준해 말하기는 하지만 순서가 이리저리 바뀐다 해도 (단 목적어가 대명사일 때 동사 앞에 두어야 하는 것 말고는) 용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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