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지 않고 거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둠 속에 가로등 불빛이 근사하게 번져 있구나. 짙은 안개에 젖은 것이다.
소파에 걸터앉은 정물이 되어 오래오래 밤안개를 감상했다.
아침이 되니 장면이 바뀌어 있다. 어둠 대신 짙은 숲이 안개에 몸을 푹 담그고 있다. 아니, 가랑비인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 살면 우울증 걸리기 쉽다고 누가 그러던데
숲이 올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살면 좀 안전할지도 모르겠다. 숲은 가끔 생기를 준다.
벽산아파트는 우리 아파트 바로 이웃이지만 거기로 한번 건너가려면 언덕으로 올라가 터널을 지나서 우리 동네보다 더 급한 경삿길을 내려가야 한다. '오늘의 운동'으로 부족함이 없는 고된 코스다.
그게 싫다면 길고 긴 난곡길의 절반 정도 내려가 디귿자로 돌아서 10분 정도 더 달리다가(자동차로 말이다) 다시 좌회전으로 꺾어 올라와야 한다. (즉 쓰다 만 미음字로 제자리를 향해 와야 한다는 얘기다) 차량으로도 도보로도 뚫기 어려운 미음字의 안쪽에는 꽤 가파른 '산'級 언덕이 들어 있고 그 언덕의 오르막 내리막에는 서민들의 보금자리들이 어깨를 비비대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지막 좌회전으로 꺾어들어오는 길에는 '은행나무'라고 불리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수령이 얼마나 됐길래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 은행나무는 그리 크지도 않고 볼품도 없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이름을 아슴아슴한 기억의 저편에서 불러냈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변해 옛날의 흔적을 읽지 못하고 무심히 드나들던 길.... 이 동네로 이사온 지 몇 달 만에야 간신히 알아챈 것이다.
가슴이 아릿했다. 결국 이 동네로 돌아왔구나.
동일여고 못미쳐 은행나무....
1974년 무렵 그곳은 이재민촌이었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는 질퍽거리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서 숨이 턱에 닿도록 올라왔던 기억이 난다. 고개를 꺾어야 윗집이 보이는 고달픈 비탈길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인 판잣집이었지만 몇발짝만 더 올라가면 맑은 개울이 흐르고 해바라기 하기 좋은 바위도 있었다. 그때가 고1 무렵이었나보다. 거기서 오빠가 조립한 엉성한 전축 가지고 음악다방에서 쏟아져나온 팝송 빽판 무자게 돌려댔지. 볕이 잘 들지 않는 눅눅한 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흥에선 세 번이나 옮겨다녔네.
맨 처음 살았던 곳이 107번 종점 동네... 멀찌감치 산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기는 평지였다.
그 다음으로 이사간 곳이 박미라고 불리던 동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어디쯤인가 궁금하다. 아마 시흥에서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한 동네가 아니었을까 싶다. 말이 서울시였지 완전히 산골이었던 그 동네에서는 수도가 따로 없어 물을 길어다 먹었고 빨래는 산에 가서 했다. 지금 같으면 환경을 오염시키는 무지몽매한 행동이었겠지만 그 동네에선 너나없이 그렇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학이 되면 나도 고무다라이 한가득 빨래를 담고 책 한권을 얹어 뒷산으로 가곤 했다. 카시미론 이불을 흐르는 개울에 넓게 펼쳐놓고 하이타이 훌훌 뿌려 밟아대는 그 기분이란!
비누거품 다 가시도록 밟다가 물이 말개지면 바위에 걸쳐놓고 책을 읽거나 뭔가 끄적끄적..... 그러다 한나절 해가 기울면 보송보송 마른 이불과 옷가지들을 개켜가지고 산을 내려왔지.
고양이가 주인은 몰라봐도 자기 집에는 상당한 애착을 보인다던데 아마 나는 고양이띠인가보다. 주민등록등본에 다 적지 못할 정도로 무수히 돌아다닌 그 동네들을 나는 다 기억하고 있다. 지난 시절 어느 지점을 돌이키다 보면 그때 살았던 집부터 먼저 떠오른다.
기억력이 생기기 시작한 너덧살 무렵,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순화동 뒷골목집
기다란 툇마루로 셋방들이 주욱 연결되어 있던 북아현동, 석원네 집
오빠들이 산넘어 물 길러가고 엄마가 남의집 일을 다니던 홍제동, 마당 깊은 집
늘 배급 받은 강냉이가루로 빵을 쪄 밥을 대신했던 청파동 집.... 주인집 딸이 그거 얻어먹고 저녁 안 먹는다고 주인집이 먼저 저녁을 지어먹고 상을 물릴 때까지 고픈 배를 움켜쥐고 기다려야 했지
산기슭에 축대를 쌓아 지은 집의 한뼘짜리 앞마당에서 까불다 축대 아래로 떨어졌던, 옥천동 문간방.
6남매를 데리고는 셋방 얻기도 쉽지 않았을 꺼다. 일 년이 멀다고 이삿짐을 싸야 했던 엄마를 떠올리면 가슴이 묵직해진다. 지금의 나라면 계속 그렇게 대책없이 끌려다니고 있었을까? 아니면 어떤 수를 냈을까?
넓고 자유로운 신천지를 찾아 떠났던 천연동 산 4번지... 처음으로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토담집이나마 방을 세 칸까지 늘려 5년 가까이 살았다. 여기서 초등학교에 들어갔지.
허나 알고 보니 우리는 서울시의 세를 들어 산 거였어. 무허가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지어준다기에 우리는 봉천동 달동네에 다시 잠깐 셋방살이를 해야 했어. 그집 아저씨 성이 양씨였고 귀찮은 꼬맹이 둘이 눈만 뜨면 나를 졸졸 따라다녔던 생각이 나. 특히 큰 녀석이 내 치마 속에 관심이 많아 때려주기도 하고 그랬지. 이제 와보니 거기가 2005년에 아들넘 자취집이라고 얻었던 바로 그 자리군 그래.
그리고 다시 시민아파트가 지어진 천연동으로 돌아왔지. 금화아파트라고.... 몇 년 전 그 동네를 가보니 보상문제만 남겨두고 입주민들은 거의 철수해버린 유령아파트가 되어 있더군. 8평짜리였다니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헌데 그 집이 우리 여덟식구에겐 넓고 넓은 천국같았다니까. 믿거나 말거나.
헌데 아버지는 합법적으로 갖게 된 아파트를 저버리고 길 건너 아파트에 세를 얻으셨다. 독립문 옆 인왕산 기슭에 지어진, 금화아파트나 비슷한 수준의... 거기서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리고는 위에서 읊은 시흥 본동-시흥 박미-시흥 동일여고 뒤쪽으로 옮겨다녔고 여고생이 되면서 드디어 서울시 밖으로 밀려났다. 부천시 심곡동.... 경인선 어느 역인가의 역무원이던 아저씨가 우리에게 한칸, 혼자 사는 총각에게 한칸 방을 내어줬는데..... 머리 빡빡 밀고 검은 고무신 신고 늘 산기도를 다닌다던 수상한 그 총각, 우리 언니에게 꽃도 주고 편지도 주고 해서 언니가 여기 안 살겠다고 울고불고 하던 생각이 난다. 그래서 이사간 건 아니었겠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는 서울 삼양동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아는 분이 비워둔 집 아니었을까? 엄마가 살아계실 때 연유를 한번 여쭤봤어야 했는데...
그러고도 모자라 이사 퍼레이드는 계속 이어진다. 면목동으로 장안동으로 면목동으로... 그 사이에 위로 오빠 셋이 다 결혼하여 분가를 했기 때문에 단칸방도 그럭저럭 살 만 했다.
마지막으로 안착한 곳이 부천시 송내동, 친구들을 데려와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24평(!) 연립주택이었다. 이게 전세였던가? 그것도 모를 정도로 난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때마침 나는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로 들어갔고, 3년 뒤에 가출인지 독립인지를 했고.... 그리고는 결혼을 했으니까.
돌이켜보면 난 어릴 적부터 산과 아주 가까이 살던 처지였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그 야산은 지금처럼 풍성하진 않았지만 헐벗은 어미의 진정으로 나의 성장통을 감싸안아주었다. 베란다로 보이는 저 산이 바로 그 산이다. 여기서 내 생을 마감하게 될까? 아니면 다른 곳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나는 대로 두들기다 보니 내가 뭔 얘길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햇볕이 쨍 나는 날을 기다리며 한옆으로 밀어둔 이불빨래더미를 보니 풍성한 계곡물로 빨래하던 그시절이 생각나 궁상 좀 떨어봤다.
(가난이 업신여겨지는 시대에 공개적인 궁상이라니!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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