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2011)/花樣年華

'공안기관 습격사건 1'의 진상은 이렇다

張萬玉 2007. 9. 2. 23:56

어제 밤늦게 필이 꽂혀 쌩뚱맞게 옛 얘기를 썼는데 아침이 되니 이 사건에 관한 자료집이 어디 있을 것 같았다. 묶어놓은 옛날 책을 풀어 뒤져보니 아이고, 아직도 있네그려....

그 사건 후,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문장가 모모씨(그도 같은 사건 구속자의 가족이었다)와 함께 골방에 숨어서 타자기를 두들겨 만든 170쪽짜리 자료집이다. 우연히도 표지도 뻘겋게 씌우고 당시의 분노를 대변하듯 문투도 어지간히 살벌하여 정말 '뻘갱이책' 같지만, 판단을 담고 있는 문장 외에 사실관계는 명백한 진실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사료로서 가치가 있을 듯하다. 인쇄한 갱지는 누렇게 바래고 제본도 좀 뜯어지긴 했지만 아마 몇 부 남아있지 않은 희귀본이 아닐까 싶다.(자세히 보고 싶으시면 사진을 클릭하세요)

  

 

 

읽어보니 어제 내가 올린 내용은 세월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왜곡되었더군.

가족들끼리만 간 걸로 기억하는데 자료집을 보니 민통련(문익환 목사님, 계훈제 선생님이 의장으로 계시던 단체) 회원들 몇몇과 외신기자들도 동행했고.... 현장에서 들려나온 게 아니라 오랜 싸움 끝에 관계자들을 만나 구금자들 소재에 관한 단서를 얻었더군. 

 

(어제 올린 내용과 대동소이하지만 이 자료가 정확하기 때문에 다시 올리고, 어제 얘기와 다른 부분은 빨간 글씨로 바로잡는다.)

 

우리는 14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강동구 거여동 보안사 정문 앞에서 면회를 요구하며 싸웠다. 우리는 1) 몇몇 노동자들이 석방될 때 가렸던 눈을 풀어준 지점이 문정동, 잠실, 성남 등 송파 일대였고

2) 비행기 소리가 자주 들렸으며(송파 상공이 항공로이다),

3) 서울대 사회학과 심성보군의 어머니가 아들을 연행한 승용차를 송파 부근까지 미행하다 놓친 사실 등을 토대로 추리한 끝에 33번 시내버스 송파 종점 좌측 야산 속에서 보안사 건물을 찾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33번 버스 종점에서 내려 20여분 산길을 걸어서 보안사 정문에 도착했다. 철조망과 육중한 검은 철문으로 방비된 살벌한 흰색 2층건물, 그곳에서 우리 아들, 딸, 형제자매, 남편들이 갖가지 참혹한 고문을 당하며 빨갱이 자백을 강요받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2시간 동안 면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민간인을 납치하여 열흘이 넘게 감금, 고문하면서 가족에게는 영장제시는 물론 소재조차 알려주지 ㅇ낳았던 보안사의 백정놈들은 낯두껍게도 사복군인들을 시켜 진입로에서부터 우리를 제지하였다. 우리는 단호히 그들을 뿌리치며 철문 앞까지 밀고 올라가 철문을 발로 차고 뒹굴며 "우리 가족 내놔라!'고 절규하였다.

 

숨겨진 장소까지 들킨 이들은 당황하여 20여 명의 군인들을 철문에 배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우람한 덩치의 깡패들을 내보내어 "여기는 군사작전 지역이라 민간인이 들어올 수도 없고 들어온 적도 없는 곳이다. 계속 소란을 피우면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들의 협박은 아랑곳없는 가족들의 격렬한 몸싸움과 항의가 계속되자 이들은 "어제 나갔다"는 말로 처음의 "민간인은 한 명도 들어온 적이 없다"는 말이 거짓말이며 우리 가족들을 이곳에 분명히 잡아두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백하고 말았다.

꼬리가 잡히자 이들은 "민간인이 이곳에 왔다면 간첩일 것이다." "여기는 아무리 빨간 놈이라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곳이다"라며 을러댔다.

 

결국 가족들은 실랑이 끝에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실종자들의 소재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청량리 경찰서에, 서울노련 관련 노동자들은 서울 시경에 이첩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울시경 누구에게 인계했다는 확인서를 써주거나 같이 전화로 확인하자는 요구를 묵살함으로써 또 속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무인지경의 산중에서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인간백정들의 만행에 대한 저주를 남긴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앞글의 '강제로 버스에 실려 먼 곳에 버려졌다'는 얘기는 그 이후 경찰서 면회투쟁과 법정투쟁 때 하도 많이 당한 일이라.... 그냥 아무 기억에나 오버랩 되는 모양이다. ㅎㅎ) 

 

우리는 바로 남대문 서울시경 4층 정보과로 갔다.

우리는 거기서 서울시경이 보안사와 공모하여 진행시키고 있는 또하나의 음모를 명확히 목격하였다. 시경으로 이첩되었다는 서노련 간부들은 물론 14일 석간신문에 서울시경에서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으로 보도된 구국학련 사건 관련 학생들의 소재해 대해서조차 시경 정보과는 오리발만 내미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족과의 면회할 권리조차 박탈하는 비인간적인 처사가 김근태씨의 경우처럼 고문으로 인한 상처와 흔적을 없앨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음모로 규정한다. 또한 가족들은 오늘 시경에서 당한 모욕과 협박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1986. 5. 15 

보안사에서 납치, 고문당하고 있는 노동자 구출을 위한 노동자가족투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