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야..
이제 전방은 한겨울에 접어들었겠구나.
상하이는 아직도 가을날씨다. 쌀쌀한 늦가을이기는 하지만...
잘 지내고 있겠지? 짧은 만남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건강해보이는 너를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너를 보호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달까...
엊저녁에 네 어릴 때 사진과 중학교 때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너무 오랫동안 너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뿐 아니라 정서와 영혼까지 나누어갖던 그런 대화....
유년 시절에는 그랬던 것 같은데 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가끔은 그런 순간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너와 마음을 깊이 나누는 데 실패했던 것 같아. 아빠도 가끔 놀리지 않았니, 둘이 왜 싸우냐고...
내가 정신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 그런 거라는... 그래서 네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내가 좀 그렇다... 기질이 외향적인 나는 내성적인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 (내성적으로 타고난 아빠와 22년째 살면서도 말이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이제야 겨우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있단다.
표현하지 않으면 그 속에 숨겨진 것을 잘 보지 못하고 내 방식으로 단정해버리는 이 유아적인 엄마는 나와 사고방식이나 표현방식이 다른 너의 고민도 역시 잘 이해하지 못했지. 그저 내 생각 같지 않은 너를 안타깝게 여기고, 짜증 내면서 ‘이렇게 하면 좋겠다, 저렇게 하면 좋겠다...“ 잔소리만 늘어놓고... 지금 생각하면 네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 뒤늦게 가슴이 매우 아프단다.. 친구도 별로 없고 적절히 활동할 곳도 없는 외국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텐데...
그리고 사실은 네가 혼자 지냈던 1년 반의 외국이나 다름없는 한국생활이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한단다.
청소년 시절, 그럭저럭 잘 해오긴 했지만 웬지 자신감이 없고 불안해 보이는 너에 대해 (모든 부모가 자식을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여기기는 하지..) 아빠와 나는 네가 ‘과잉보호로 이것저것 경험할 기회가 적어서 자신감이 없는 것 같으니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 해서 경험이 많이 쌓도록 하자’는 결정을 했던 거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네가 혼자 있었던 시간이 그리 네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지가 않아. (아닌가?)
면회 갔을 때 어학연수 얘기도 하고 그랬지만... 어학연수가 되었든 다른 일로 경험을 쌓든... 아니면 (졸업 후 진로에 대한 부담과는 상관없이) 학창생활을 네 방식으로 자유롭게 꾸려나가든 간에... 중요한 것은 네가 네 안에 숨어있는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엄마 아빠는 단순히 네가 남들 눈에 ‘성취’로 보이는 어떤 것을 위해 매진하기를 바라진 않는단다.(믿을지 모르겠지만... 아빠 역시도...)
사람에게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지. 나름대로 ‘이만하면 멋지다’라고 느끼고 만족하면서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가치있는 삶 아니겠니..
어제 뉴스를 보니 취업실패와 과다업무로 인한 사회불안증(social phobia)을 겪어 상담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8%나 된다고 하더라. 미국은 13%나 된다고 하던데... 남의 얘기가 아니라 주변에서도 우울증이나 자폐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다 보니 그 기사가 정말 남의 일 같지 않더구나.
사회 경쟁은 치열해지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병리현상이 보편화되고(세상에, 대규모 수능부정사건 좀 봐라.. 해외토픽감 아니니) 가치관이 혼란을 겪으면서 순수한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적으로 공황상태를 경험하게 될 지경이니... 그 속에서 개인이 병들어가고...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회 속에서 건강하고 자신있게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을 잘 돌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듯하다. 이에 더하여 작지만 자기가 가치있게 여기는 일을 찾아 그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면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면 더욱 강한 자신감으로 자신을 세울 수 있겠지...
그래도 네게는 아직 사회에 나갈 때까지 유예기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행복한 줄 알아라. ^^ 사회인으로서 가장으로서, 원치 않는 압박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건강하게 할 여유를 갖기 어렵게 되기 전까지... 충분히 네가 필요로 하는 시간을 갖고, 너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털어버리고 네가 필요로 하는 훈련들을 해나가면서 이 낯선 사회와 관계를 가져나가기에 충분한 힘과 자신감을 갖춰나가면 된다. 초조해할 필요 전혀 없단다.
나도 그동안은 이런 문제에 대한 태도가 참으로 무지했었던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인해 우리의 인생, 인생의 가치에 대해 한번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네 문제를 포함하여 나와 네 아빠의 문제까지... 이제는 좀더 여유를 갖고 들여다보려고 한다. 너와도 모자관계를 넘어서 인생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로서 좀더 너를 잘 이해하고 싶다.
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엄마는 나와 너무 다르기에 감추고 있었던 너의 고민... 힘들었던 일들까지 나를 믿고 내게 내려놓아줄지 모르지만....그래도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엄마 아빠는 어떤 경우에라도 네 편이라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힘든 문제들을 털어놓을 탈출구를 필요로 하지. 친구든, 부모든, 애인이든... 적절한 사람이 없으면 글을 쓰든지, 종교에 의지하든지, 공부나 운동에 목숨을 걸든지... 나쁘게 풀리면 허접한 친구들이랑 싸돌아다니든지... 돈을 뿌려대든지... 술이나 여자나 인터넷에 빠져 현실을 도피하든지...
어쨌든 누구에게나 탈출구가 필요해.
건강한 탈출구를 찾으면 현실과 맞설 힘이 생기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회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것이지. 요즘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니.. 특히 먹고사는 문제와 절박하게 씨름하며 단련되어온 우리세대들과는 달리 스스로 세상을 헤쳐보지 않은 요즘 젊은애들 중에 정말 사회와는 단절하고 사는 애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그래서 폐인이라는 말도 그리 흔한 거겠지. 참 걱정이야. 안쓰럽기도 하고... 어찌 보면 부모로서 건강한 마음을 키워주지 못하고 단순히 물리적인 care에만 신경을 쓴 우리 부모세대의 책임인 것 같아 마음이 무겁기도 하단다.
J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아직은 마음을 털어놓을 벗이나 애인이 없다니 참으로 고독할 때가 많을 줄 안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심정으로 너의 마음 속에 닿기를 원한다. 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내 일에 몰두하여 너를 많이 외롭게 했고 불안하게 했고, 네가 성장기에 고민이 많을 때 내 생각에 잡혀서 너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라도 네게 깊은 용서를 구하고 싶구나. 이제부터라도 네게 정말 잘 해주고 싶다(밥이라든가 옷이라든가 용돈이라든가 학업상의 문제라든가... 이런 것 말고..^^)
어째 쓰다보니 오늘의 편지는 참으로 심각하게 되었다.
내 마음이 조금은 네게 전달되었으리라 믿는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아빠의 마음이기도 하단다. 요즘 아빠랑 네 이야기 많이 한다.
아빠는 네가 어렸을 때 공사다망하여 정말 아빠가 필요했던 시절에 네 곁에 없었던 시절에 대해 몹시 가슴아파하신다. 그게 어디 아빠 개인의 책임이었을까만은 애비로서의 심정은 그게 아니신가 보다. 내가 보기에는 어쩌면 나보다 아빠가 너를 더 잘 이해하실 것 같다. 성향이 비슷하잖아.
그러나 내가 보기에 너는 아빠에 대해 거리를 많이 두고 있는 것 같아. ‘나약한 내 모습을 강인해 보이는 아빠가 얼마나 이해하고 인정해주실까..’ 하고.. 맞나?
그러나 아빠는 내가 잘 안다. 아빠도 대학 2학년 때까지는 너하고 많이 비슷한 분이셨다. 친구도 별로 없고 겉돌고... 특히 자기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현실세계에서 그리 빠릿빠릿하지 못한.. 그에 대해 열등감도 많이 가졌고..
그러나 지금의 아빠 모습.. 많이 다르지? 어떤 계기에 그렇게 달라졌는지 알게 된다면 네게 큰 힘이 될 것 같은데...(나는 그리 오래 함께 살았으면서도 남편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지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장성한 너를 통해 내 남편을 깊이 이해하게 된 것 같구나).
이야기가 한없이 길어지는구나.
우리가 좀더 속깊은 얘기를 터놓는다면 정말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사실 지난주 면회 갔을 때 이런 얘길 많이 하고 싶었는데 그전에 해왔던 습관대로 하기 쉬운 얘기들만 나누고 왔던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도 나는 너와 함께여서 얼마나 즐거웠는지--이거 엄마가 아들을 너무 사모하나? 하하..)
오늘은 이만 줄이겠다.
답장을 쉽게 보낼 수 있는 환경이라면 답장 꼭 해라고 채근할 텐데...
내가 여건을 모르니 조를 수도 없고....
곧 크리스마스네.
크리스마스 전에 다시 편지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오늘 어디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중국어 가사를 발견했기에 미리 보낸다. 사람들 앞에서 불러 박수 좀 받아 ^^
1.
平安夜, 圣善夜, 万暗中, 光华射
照着圣母也照着圣婴, 多少慈祥也多少天真
静享天赐安眠, 静享天赐安眠
2.
平安夜,
圣善夜, 牧羊人, 在旷野
忽然看见了天上光华, 听见天军唱哈利路亚
救主今夜降生, 救主今夜降生
3.
平安夜,
圣善夜, 神子爱, 光皎洁
救赎宏恩的黎明来到, 圣容发出来荣光普照
耶稣我主降生, 耶稣我主降生
이제 그만 줄일께.
오늘 너무 많이 썼어. ‘필’받았나봐..^^
기독교 식으로 인사할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네 마음에도 임하여
깊은 평안과 기쁨 누리길...
물론 동상 안 걸리게 간수 잘하고....
(1월에 아빠랑 같이 면회 가려고 추진중이니 절반만 기대하고 있어 봐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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