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하니 신작 개봉을 앞둔 영화감독이나 된 양 흥분지수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반면... 한편으론 소올솔 빠져나가는 실바람이 느껴지는데
그건 바로....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나 피해가고 싶은 '관광지의 현실'이란 넘이다.
여행지로 택한 곳이 선진국이 아닐 경우에 흔히 빠지기 쉬운 착각이 '오지의 때묻지 않은 현지인들과 그들의 소박한 삶을 만나겠다'는 거 아닐까. (ㅎㅎ 꿈 깨시지.)
Lonely Planet은 더이상 lonely하지 않기 때문에 차량이 통하는 곳이라면 그들의 '전통문화'라는 것들 역시 포장까지 마친 상품이 되어 구매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공되지 않은 인심을 만나기 위해 여행정보에 나와 있지 않은 곳을 굳이 찾아갈 수도 있겠지. 허나 시간과 비용의 제한을 받는 보통의 여행자들이 멀리 유럽에서 한국까지 건너와 경복궁이나 비원 대신 신림동 순대골목을 선택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그러니 여행지에서 장기체류를 하지 않는 한 '때묻지 않은 인심', '가공되지 않은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겠다는 욕심은 일찌감치 비우는 게 좋겠다.
여행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삐끼들과 좀도둑, 구걸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더욱이 이름난 관광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아수라장을 필사적으로 헤쳐나가며 내가 여길 왜 왔을까 후회하기 십상.
중국에서 살았던 나로서 삐끼라면 나름 일가견이 있다. 그 지역 사정에 밝다면 어느 정도 삐끼들의 등쌀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나아가 유용한 합작으로써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도 있다. http://blog.daum.net/corrymagic/1030675
남미는 낯선 지역이니 나의 삐끼들과의 합작능력은 다시 시험대에 올라야겠지. 내가 익숙한, 우리동네 방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거래조차도 낯설 것이다. 허나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우리 동네에선 그리 흔치 않은..... 거래상황이 아닌 일방적인 강탈상황.
전통의상을 입고 장 보러 나온 인디오 여인네, 업혀다닐 만한 나이에 동생을 업은 꼬마.... 그들도 영업중이다. 사진 찍으면 돈 줘야 한다.(철없는 낭만이 산산이 깨어지는 이 상황조차도 나는 이 동네의 '거래상황'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당장 먹을 게 없는데 돈 벌 구멍이 있으면 어떻게든 벌어야지.)
오물을 묻히거나 동전을 떨어뜨려 주의를 돌린 틈에 가방을 채가는 3인조 소녀 소매치기...
길을 물어보는 여행자에게 친절하게 정보를 주며 경계심을 푼 뒤에 좋은 환율이라는 미끼를 써서 달러를 갈취해가는 위조지폐 환전상 아줌마....
말 못하고 물정 어둡다고 화폐 단위를 현지화에서 달러로 살짝 바꿔말하는 기사아저씨 등등....
남미 여행(특히 페루와 볼리비아) 다녀온 사람들이 입을 열면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길거리에서는 아무하고나 얘기하지 말라느니, 택시기사가 총 든 강도로 변하니 아무리 피곤해도 택시 함부로 타지 말라느니, 대중교통 이용하다가 배낭에 칼자국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웬만하면 택시를 이용하라느니(어느 장단에 춤출까?), 뚤레뚤레 구경에 정신팔지도 말고 오로지 배낭, 지갑에만 신경을 쓰라느니......(게다가 사진기조차 날치기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도둑사진을 찍으란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여행을 다니냐고....
심지어 남미에서 장기체류했던 친구 말에 따르면 그 동네에선 사진 찍히기 위해 전통의상 차려입고 관광지를 어슬렁거리거나 좀도둑질을 하거나 지겹게 달라붙는 삐끼행각.... 이 모든 것이 다 '직업'으로 묵인된다니....경찰이 강도로 변하기도 한다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목구멍이 포도청잖아.
허나 호의를 가지고 찾아간 입장에서 이런 대접을 받으면 배신감으로 치가 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럼 민박을 하면서 그집 식구들이랑 사귀면 되잖아."
"민박집?"
친구가 피식 웃는다. 손님을 위하여 방을 내주고 일곱 식구가 한방에서 바글거리는 게 안쓰러워 아이 둘을 자기 방에서 같이 자자고 불렀더니 절대 안 오더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통닭을 사와서 같이 먹자고 불렀더니 여전히 낯을 가려... 할 수 없이 먹을 만큼 내놓고 내어주니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낼름 들고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버리더란다. 그 집 식구들이 유난히 낯을 가리는지 자기 태도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지인 사귀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 사람들 맨날 보는 게 여행객들이잖아. 그런데 자꾸 놀자고 하면 귀찮지 않겠어?"
맞는 얘기다. 남미엔 그링고라는 말도 있다잖은가.
미국 군복 색깔을 나타내는 green과 go가 합쳐져 미국인을 지칭하는 말인데(이 말이 서양여행객들까지 지칭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쁘진 않다는 얘기겠지?
또 피부가 노랗고 눈이 찢어진 사람들은 일단 '치노'로 간주한다는데, 지금까지도 '치노'가 아이들을 잡아가 요리해먹는다고 믿는 인디오들이 있다고도 하고 멕시코 사람들은 황인종 엄청 무시한다는 불평도 자주 들리는 걸 보면 아시아 사람 역시 그리 이쁜 존재가 아닐 수도 있지. 어쨌거나 먹고살기 위해 그링고나 치노들에게 미소를 짓고 친절을 베풀고 서비스를 팔아야 하는 게 그들의 현실이다.
왜 그들이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길 바라는 거지?
말 나왔으니 말인데.... 감언이설로 상대방의 정신을 쏙 빼놓아야 먹고 살 수 있는 동네가 어디 거기뿐이겠냐고. 소비자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해서 세련되게 팔든 그런 재주가 없어서 앵벌이로 팔든 간에, 우쨌든간 팔아야 먹고사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잖아. 우리 사는 동네도 세련된 폼을 갖추긴 했지만 어차피 먹고 먹히는 정글이잖아. 파는 관행이 우리동네랑 좀 다르다고(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사회의 상거래 수준이지) 그렇게 미워하고 판단할 건 없잖은가 말이지.
도둑질로 봐도 그래. 횡령하는 넘들, 뇌물 먹는 넘들, 피땀어린 세금 날로먹는 넘들..... 좀도둑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도둑넘들은 봐주면서 1달러도 안 되는 돈에 게거품을 무는 건 좀 웃기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나도 사기, 도둑질 당하기 싫다. 돈도 돈이지만 그 사회에 적응못하는 바보 취급 당하는 기분이 더 싫은 거다(인지상정이겠지). 소매치기 당하고 바가지 썼을 때 이렇게 생각해보면 좀 덜 분하려나? 내가 이상한 나라에 와서 적응을 못하고 있는 거라고...
어쨌든 거리에서 길을 물으며 친구 사귀는 게 내 장끼이자 취미인데 완전히 마음을 닫아걸어야 한다니, 긴장 속에서 돌아다녀야 한다니 정말 피곤하겠다. 존경하는 한비야 슨상은 인복이 있었던 걸까? 오지만 다녀서 그랬을까? 그때만 해도 남미가 지금 같지 않았을까?
친구 얘기도 남미는 어차피 관광객끼리 몰려다니는 곳이니 관광객답게 즐기라고 한다.
여행자들 속에서 친구 사귈 기대도 접으라고 한다. 아시아나 인도 쪽을 찾는 서양 애들은 낯선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비교적 있는 편인데 남미를 찾는 애들은 가깝고 오기 쉽고(미국이나 유럽에서 오는 항공편이 무지 많다) 놀기 좋아서(트래킹, 각종 해양스포츠, 살사 바 등 놀거리가 무궁무진)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문화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뻔한 애들이 대부분이란다.
이런 생각들이(남미 사람들에 대한 거나 서양 관광객들에 대한 거나) 다 지독한 선입견일 수 있고 오히려 인정과 친절로 남미여행을 못잊게 만들어준 사람들 얘기도 미웠던 사람들 얘기만큼이나 많다는 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 한발 들여놓으려는 이 소심녀는 이것도 정보라고 소중히 챙겨 여행보따리에 집어넣는다.
과연 남미는 어떤 얼굴로 나를 맞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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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중남미 분들이 보셨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저도 어디서 한국에서의 나쁜 경험을 얘기하는 글을 보면 열받겠지만요....전체적으로 매도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구요, 제가 겪을지도 모를 일들에 대해 지독하게 예방주사를 한방 놓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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